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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pression of life
: 압축된 삶

130년이고 싶었던 40년.

by 맨모삼천지교

여행중 피로와 햇빛에 심해진 임파선염으로 상비약으로 가져갔던 항생제를 여행 내내 먹어야 했다.

그리고 그 직후에 조직검사를 위해 절제했던 부위의 염증을 막기 위해 먹은 또 한번의 항생제. 몸을 스쳐간 이 약물들은 끝내 다시 장을 무너뜨리고 떠났다.

장염과 비슷한 증상은 다시 길고 길게 이어졌다.


루푸스 진단 이전에도 몇 달 동안 같은 증상이 반복되곤 했었다.

밥을 먹고 돌아서면 찾아오는 복통. 친구와 여유로운 식사, 수다 한번이 쉽지 않던 시간들. 음식이 몸에 들어와 건강한 영양분을 전달해서 충전이 되는 것이 아니라, 음식이 몸을 스쳐가는 느낌이랄까.다만, 그때는 그것이 그저 피로로 스쳐가는 좀 긴 배앓이라고 생각했었다.


조금 나아졌다 싶어 일반 식을 먹으면

여지없이 다시 찾아오는 통증에 여러모로 삶의 즐거움은 빠르게 증발했다.


루푸스와 쇼그렌을 빠르게 진단 받고 항염제와 스테로이드를 먹기 시작하면서 되려 복통은 잦아들었었는데…그런데, 항생제의 방문과 함께 또 다시 장이 무너졌다.

질병은 이렇게 삶의 질을 형편없이 바닥으로 끌어내린다.

내 몸과 마음은 버티는 중이지만, 삶의 질은 여러모로 기울어 간다.


요즘 한국에서 건강에 대한 담론을 이끌어가는 중인 정희원 박사가 언급한 개념이 있다.

[Compression of morbidity : 질병상태 압축]

간단히 설명하자면, 말하자면 생애주기 내 병을 앓는 기간을 줄이는 것을 의미한다.


같은 85년을 살더라도 60세에 만성질환이 시작되어 25년을 투병한 A

80세에 만성질환이 시작되어 5년만 투병하다가 생을 마감한 B의 삶은 전혀 다르다.

같은 시간을 지구에 머물다 가더라도 ‘병든채 오래’가 아닌 ‘건강하게 오래’ 사는 삶을 사는 방향으로 고령화 사회의 관점을 바꾸어야 한다는 것이 이야기의 핵심이었다.


한국인의 기대 수명은 83.6세.

하지만 건강 수명은 약 66세.

이 사이의 17년은 ‘건강하지 않은 채’ 살아가는 시간일 것이다.

서울 시민들의 경우 대중교통이 잘 되어 있어 일상속 운동량이 많은 편이고, 병원 접근이 쉽다 보니 건강 수명이 지방도시 보다는 조금 높은 편이라지만,

그마저도 70세 언저리.

그러니 서울 사람들에게 ‘노인’은 일흔부터란다.

경제활동을 줄이고 거동이 불편해져 실내에 머무르는 경우가 많아지는 떄문이다.


그의 이야기를 들으며, 난 좀 다른 생각을 했따.

이미 나의 건강수명은 끝났으니까.

루푸스 진단을 받은 순간부터,

내게는 좀 다른 이름의 여정이 시작되었으니까.


내 나이 40대 초반.

운이 좋아 합병증 없이 잘 관리된다고 해도 한국인의 평균 기대수명 만큼 살 수 있을까?

산다고 해도, 나에게도 일흔이 넘은 시점부터가 노인과 같은 삶일까?

그렇다 쳐도, ‘건강한 삶’은 이미 나에겐 과거형에 불과하다.

이제 ‘병과 함께 사는 삶’을 앞으로 이어가야 한다는 말인 셈이니.


병의 끝 대신, 건강하고 활력있는 삶의 끝은 꽤 선명하게 그어졌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한번 그어진 선으로 인해 몇가지 더 선명해진 것들 또한 존재한다.

가을빛으로 떨어지는 낙엽들, 갖은 애를 써야 올라 볼 수 있던 풍경, 아이 손을 잡고 잠드는 저녁.

모두 유한함이라는 이름을 붙인채 기억속에 아주 선명하게 남고 있다.


보통은 어떤 병을 진단 받게 되면, 대부분의 의사들은 어떤 ‘치료법’을 권한다.

암이라명 항암치료나 수술, 그 외. 기타 질병이어도 그에 맞는 치료약을 권한다.

그런데 루푸스와 쇼그렌은 치료의 개념이 존재하지 않는다. 진단은 치료의 시작이 아니라, 끝이 안보이는 병원 어드벤처 입장권에 불과하니까.


루푸스는 자기 몸의 부위를 가리지 않고 공격하는 병이다. 한마디로, 어디로 어떻게 터져나와도 이상하지 않다는 것. 심장에 생기는 염증이 생겨 심근염이 되기도, 신장에 이상이 생겨 루푸스 신염이 되기도 , 시력을 잃게 되기도 한다. 언제 어디로 어떻게 진화할 지 모르는, 끝이 보이지 않는 트랙.

그랬다. 제일 싫은 건. 끝이 없다는 것.

언제 끝날지 모르는 싸움이라는 사실.


그래도 그 안에서 낼 수 있는 힘을 다해,밸런스를 잡아보려 애쓰던 와중에 다시 찾아온 복통은 참 여러모로 몸도 마음도 지치게 만들었다.

하지만, 세상 모든것이 하시 싫어져도, 놓을 수 없는 것 한가지는 아이의 삶을 지키는 일이었다.

그래서 조금이라도 컨디션이 허하는 날이면, 나의 한정된 시간 자원을 어떻게 해야할까 선배들을 만나 조언을 구해보던 어느날. 폐암 4기를 이겨낸 적 있다는 사실을 고백한 선배 Mrs.B가 긴 점심 이후 헤어질 즈음 의외의 말을 꺼냈다.


“그런데 사실, 나는.

루푸스가 더…힘들다고 생각해요. 끝이 없잖아.”


아주 친한 대학 친구가 루푸스를 오래 앓아왔고, 그래서 곁에서 오래 지켜봐왔다며 손을 꼭 잡는 그녀의 눈과 말에, 알 수 없는 울컥한 뜨끈함이 마음에 고였다. 병의 우열을 가린다는 것이 말이 되지 않지만, 스스로 꺼내본 적 없던 나의 답답한 마음을 어루만지는 그녀의 말 속에 온기가 스며있었다. 누군가’그럴 수도 있다'고 말해준 순간, 버티기만 하던 마음이 잠시 가쁜 숨을 쉬었다.


병이라는 것을 가까이 두게 되면서 영원할 것 같던 젊음과의 이별도, 영영 오지 않을 것 같은 죽음이라는 결말도 결국 당연한 삶의 수순이라는 사실을 자연스레 받아들이게 되었다. 동시에, 병이나 장애에 시달리더라도, 그 나름의 즐거움으로 충만하고 만족스러운 삶을 살 수 있다는 것또한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어떤 단계의 환자에게도 기본적으로 가능한 모든 연명치료를 권유하는 것이 기본인 한국의 의료 시스템 내에 머물고 있다는 것도 안다. 그러니, 환자 스스로가 삶에 대한 주관을 명확히 가지고 치료와 연명의 방향을 잘 정해야 한다는 생각 또한 하기 시작했다.

과연 나는, 어떤 모습으로 얼마나 어떻게 머물기를 원할까? 라는 질문과 함께.


어느 저녁. 잠이오지 않는 밤,

내 손을 유난히 꼭 잡던 아이가 말했다.


“엄마. 있잖아.나는 나중에 엄마아빠가 지구에 없으면 나도 있기 싫어.”


“그때는, 네 곁에 또 너의 다른 가족들이 생길거야.

엄마에게 아빠랑 네가 있는 것 처럼.”


“아냐. 그래도 엄마아빠가 있으면 좋겠어.”


“그럴 수 있지.

그렇게 오래오래 곁에 있어줄 수 있게 노력할게.”


“엄마 나 100살까지만 살테니까, 엄마도 그때까지 있어야헤.”


오래오래 곁에 있어야 한다며 손을 꼭잡는 아이 때문에 눈물이 터졌다.

얼른 웃음으로 눈물을 가리며 아이에게 엄살을 부렸다.


“어머~네가 100살이면 엄마 130살인데,

그건 좀 너무하잖아~~~

엄마 그렇게 오래 살면 거북이같이 변할 것 같아.

피부도 딱딱하게, 쭈글쭈글 깊은 주름…아휴. 엄마 그런 130살은 싫어~~~~!”


아이는 대답했다.

“아냐, 엄마. 거북이 같아도 좋아.

그러니 130살까지 곁에 있어줘.”


아이를 토닥이며, 그날 밤. 조용히 기도했다.


‘부디 이 아이의 마음에 빈자리가 너무 크지 않을 시점까지,
아이의 삶에 짐이 되지 않는 시점까지.
지금처럼만 머물게 해주세요.
그 이상도 이하도 바라지 않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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