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고를 다루는 사람의 특권

아동 의류 영업MD가 하는 일 - 01

by 버과장

기획한 프로모션이 생각보다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전 직장인 아동 의류 회사에선, 매년 5년 차 상품을 정리한다. 기부를 하거나, 배에 태워 수출을 보낸다. 23년이 신상품이라면 18년도 이월 상품은 정리 대상이 된다는 뜻이다. 쌓여봐야 판매도 되지 않고, 시간이 갈수록 가치는 더 떨어진다. 헐값이라도 창고 효율을 높이는 편이 낫다. 이번 기획은 그런 상품들을 모아 저렴한 가격으로 구성하고, 하나의 박스로 만들어 판매하는 방식이었다. 정상가 기준으로 보면 10만 원을 훌쩍 넘는 구성을 체감가 절반 이하로 설계한 것이다.


재고를 관리한다는 건 생각보다 큰 특권이다. 상품MD가 기획하고, 디자인팀이 그리고, 생산팀이 엄청난 노력을 들여 만든 상품이 매장으로 간다. 영업팀과 매니저들이 열과 성을 다해 판매한 매출로 회사는 돌아간다. 내 일은 그 결과물들을 어디에, 어떻게, 어떤 가격으로 풀지 고민하는 일이다. 매장에 얼마만큼 분배할지, 재고가 소진되면 어떻게 매장 간 이동을 할지, 전략적으로 매출을 만들어야 하는 매장에는 어떤 상품으로 대응할지. 재고로 상황에 대응할 수 있게 만드는 역할이다. 이번 프로모션 역시 사이즈가 깨져 오랫동안 판매되지 않던 상품을 묶어 고객과 본사 모두에게 부담을 줄이는 방향으로 구상했다.


업무가 그렇다 보니 고객의 기분을 생각하는 일이 중요해졌다. 생산팀에 있을 땐 ‘왜 이런 걸 신경 쓰지’ 싶었던 부분들을, 이제는 고객의 입장에서 다시 보게 된다. 싸구려라고 느끼진 않을지, 박스를 열었을 때 실망하진 않을지. 브랜드 이미지를 해치지 않으면서도 서로 윈윈이 되는 지점을 찾는 건 쉽지 않다. 결혼을 유지할 생각이면서도 변호사에게 위자료를 물어보는 것처럼, 항상 최악의 경우까지 계산해야 한다. 박스를 열어봐야 가치가 결정되는 상품이기에 환불과 교환이 어렵다는 문구를 명시했지만, 전자상거래법상 온라인 구매는 고객이 원하면 7일 이내 교환·환불이 가능하다는 사실도 이번에 처음 제대로 알게 됐다. 그런 상황이 생기지 않도록 구매 전 정보는 최대한 많이, 선택지는 최대한 넓게 두었다. 여러 사람의 도움으로 세팅을 마쳤다.


성황리라고 말하기엔 조금 과장일지도 모른다. 다만 저렴한 가격에 판매 흐름이 나쁘지 않았고, 핫딜과 맘카페에 몇 개의 글이 올라오며 반응이 이어졌다. 내가 고민했던 지점들이 누군가에게는 납득 가능한 선택지로 닿았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했다. 판매가 이어지는 화면을 보고 있자니 기분이 묘하게 좋았다.


회사가 오랜 시간 공을 들여 만든 상품들을 어떻게 마무리할 것인가를 고민하는 일은 가치가 큰 일이다. 이 프로모션을 기획하기 전, 이사님은 내가 올린 기획을 보고 바로 진행해 보라고 했다. 내용을 다 보셨을까 싶은 속도였지만, 그 신뢰가 날 새벽까지 일하게 만들었다. 임팩트 있는 재고가 아니더라도 이 시도가 회사에는 하나의 레퍼런스가 되고, 나에겐 경험이 될 거라는 계산이 있으셨겠지. 사업가는 결국 사람에 투자한다고들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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