싱가포르 3일, 세 부부가 함께 다시 쌓은 이야기
뜨거운 나라에서 다시 확인한 우정
- 싱가포르에서 3일, 세 부부가 함께 다시 쌓은 이야기
세월이 흐를수록, 여행의 목적은 ‘장소’보다 ‘사람’에 가까워진다.
이번 싱가포르 여행이 딱 그랬다.
오래 알고 지낸 고교 동창들, 그리고 그 배우자들과 함께 떠난 3박 5일.
45년의 시간을 지나온 칠송회가, 이제는 수도권에 남은 세 부부만이 자연스레 ‘삼송회’가 되어 떠난 여정이었다.
예전 내가 도쿄·요코하마를 처음 가본다는 친구 부부들을 안내해 준 적이 있었다.
“그때의 고마움을 꼭 갚고 싶었다”며 이번 여행을 기획한 건 그 친구들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말 그대로 ‘초대받은 여행자’였다. 마음은 가벼웠고, 그래서 눈에 들어오는 것들도 더 따뜻했다.
1. 싱가포르의 밤은 늘 깨끗했다.
- 낮은 뜨겁고, 밤은 비가 내리고
10월부터 우기가 시작된다는 예보에 우산을 챙겼지만, 단 한 번도 우산을 펼치지 않았다. 싱가포르의 비는 기가 막히게 밤에만 내렸고 아침이 되면 도시 전체가 깨끗하게 닦여 있었다.
낮은 한국의 8월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 뜨거웠다. 조금만 걸어도 등줄기를 타고 땀이 흘러내렸다. 여행은 결국 날씨와 체력의 싸움이라는 걸 새삼 느꼈다.
2. 비싸도 너무 비싼 도시
- 쇼핑을 포기하게 만드는 가격표
싱가포르에서 가장 놀란 건 물가였다.
백화점 브랜드는 한국보다 최소 20% 이상 비쌌고 스타벅스 음료 세 잔이 3만 원 가까이했다.
“이건 한국 가서 사자.”
쇼핑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도 지갑을 닫게 만드는 도시였다.
3. 편리함의 극단, Grab
- 하지만 끝내 타보지 못한 MRT
싱가포르는 이동이 정말 편하다.
Grab 앱을 켜고, 목적지를 입력하고, 차가 오면 타면 그만. 한국보다 더 단순하고 직관적이었다.
반면 ‘싱가포르의 자존심’이라 불리는 MRT는 시간 관계상 한 번도 이용하지 못했다.
2038년까지 ‘집에서 3분이면 지하철 도착’이라는 국가 목표를 듣고서, 나는 지하철 역까지 버스로 25분은 걸리는데... 하며 부러운 마음이 살짝 들었다.
4. 돗자리 위의 사람들
- 도시의 세련됨 아래 존재하는 소박한 풍경
가장 인상 깊었던 장면은 돗자리였다.
싱가포르에서는 집주인이 일요일에 집에 있으므로 그날만큼은 가사도우미들이 공원에 모인다. 돗자리를 넓게 펴고 고향 음식을 꺼내 서로 나누어 먹는 풍경. 그 모습이 어쩐지 우리 어린 시절 소풍 장면과 겹쳤다. 도시의 세련됨 아래 자리한 작은 인간미가 뜻밖의 따뜻함을 안겨주었다.
5. 우리가 함께 기억할 것들
- 여행의 주인공은 도시가 아니라 ‘사람’
초대하는 마음,
그 마음을 기꺼이 받아준 태도,
낯선 도시에서 서로를 챙긴 배려들,
땀 흘리며 함께 걸은 시간들.
싱가포르는 뜨거웠고, 비쌌고, 편리했지만 무엇보다 ‘우정이 여전히 견고하다’는 사실이 이번 여행을 특별하게 만들었다.
- 여행 기록
Day 1: 공항의 숨결을 지나, 도시의 품으로
창이공항 문을 나서는 순간, 싱가포르의 공기는 이상하리만큼 다정했다. 습하지만 불쾌하지 않은 공기, 은근하게 반짝이는 도시의 불빛.
호텔 Mercure Singapore Bugis에 도착해 짐을 풀어놓고 커튼 사이로 스며드는 야경을 바라보며 싱가포르에서의 첫 밤을 조용히 맞았다.
Day 2: 나무와 빛, 그리고 거대한 미래의 식물원
둘째 날 아침, 싱가포르 국립식물원에서 난(蘭)의 세계에 빠져드는 것으로 하루가 시작됐다. 햇빛과 수분을 머금은 열대 식물들은 마치 또 하나의 도시처럼 웅장했다.
에메랄드힐의 파라나칸 가옥들은 색색의 창틀과 오래된 타일이 싱가포르의 옛 정취를 전했다. 이곳의 오래된 주택 가격이 2천억 원을 넘는다는 이야기에 “대한민국의 집값이 오히려 저렴한 편인가?”웃으며 이야기할 정도였다.
오차드로드의 활기,
가든스바이더베이의 ‘미래형 식물원’,
플라워돔·클라우드포레스트,
시내 관광은 Big Bus,
리버 크루징,
그리고 슈퍼트리 ‘가든 랩소디 쇼’...
싱가포르 시내를 일주하는 Big Bus 여행. 운 좋게 구름 낀 하늘이 뜨거운 햇살을 가려주었고, 시원한 바람을 가르며 더위를 잊게 해 주었다.
돔 안에서 인공 폭포가 떨어지는 소리를 듣는 순간 자연과 인공의 경계가 모호해지는 ‘싱가포르다움’을 실감했다.
저녁은 Michelin 2025에 선정된 레스토랑에서 보라색 밥을 먹었다.
밤에는 클락키에 들러 리버 보트를 타고 야경을 즐겼다. 어디를 배경으로 찍어도 사진이 작품이 되는 도시.
우리는 그저 “와!”하며 연신 셔터만 눌러댔다.
밤이 깊어갈 무렵, 랩소디 쇼(슈퍼트리쇼)에 맞춰 허겁지겁 이동하였다. 조명과 음악은 도시의 심장소리처럼 은은하게 울려 퍼졌다. 야경과 불꽃놀이는 빛은 소음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증명하는 듯했다.
호텔로 돌아와 가져온 술을 꺼내놓고 오랜만에 깊은 대화를 나누었다.
여행의 둘째 날 밤이 그렇게 흘렀다.
Day 3: 도시와 나 사이에 틈을 만드는 하루
셋째 날은 온전히 ‘자유 시간’이었다.
아침에 포트 캐닝 파크의 깊은 계단과 고목 사이를 걷고, 유명한 ‘트리 터널’에서 사진도 찍었다.
박물관에서는 다민족 국가를 이끌어온 리콴유 총리의 리더십이 박정희 대통령을 연상케 했다.
점심은 뜨거운 새우국수 한 그릇.
국물 한 숟가락이 신기하게 피로를 풀어주었다.
아랍 스트리트와 하지레인의 벽화·카페·음악. 싱가포르는 이런 작은 골목에서 가장 진짜 모습을 드러냈다.
수영장에서 자쿠지를 즐기고, 재래시장에서는 두리안과 망고를 맛보았다.
두리안 특유의 냄새도 이상하게 싫지 않았다.
저녁을 맞이하며 해안가에서 찍은 한 컷은 영원히 기념할만한 사진이었다.
저녁은 라우 파사 사테거리에서 꼬치구이와 맥주. 야외 테이블 위로 바람이 적당히 불어와 그날 하루의 열기를 식혀주었다.
Day 4: 가장 높은 곳에서 가장 깊은 곳으로
마지막 날, 우리는 마리나베이샌즈 스카이파크에 올랐다. 높이 200m, 38초 만에 지하 1층에서 56층까지 올라가는 초고속 엘리베이터.
도시 풍경은 사진보다 더 선명했고 바람은 신기하게도 ‘여유를 가진’ 바람이었다.
점심은 오페라 하우스에서 딤섬.
멀라이언이 입에서 내뿜는 물줄기는 돈줄기가 되리라 믿고 각을 잡아 한 컷.
이후 차이나타운을 돌아보았다. 불아사(부처님 치아 사리 사원), 교회, 이슬람 사원, 힌두 사원이 한 구역에 공존하는 싱가포르의 다양성이 인상적이었다.
오후에는 센토사로 이동해 케이블카를 타고, 푸른 바다 위를 건너 루지를 두 번이나 탄 뒤 스카이라이드를 타고 다시 올라왔다.
저녁에는 ‘윙스 오브 타임’ 쇼.
익숙한 음악, 워터스크린·레이저·불꽃이 어우러진 싱가포르 특유의 ‘야외 쇼의 품격’을 느꼈다.
프리미엄석에서 마신 음료 한 잔이 마지막 밤을 더 특별하게 했다.
귀국길 공항에서 감상한 쥬얼창이의 폭포 쇼는 싱가포르 여행의 화려한 마침표였다.
- 여행을 마치며
여행 일정표에 적힌 식물원, 에메랄드힐, 오차드로드, 스카이파크, 센토사...
이 단순한 지명들은 돌아와 보니 모두 하나하나의 ‘장면’이 되어 있었다.
나무가 흔들리던 풍경,
도시 위로 켜져 가던 조명,
뜨거운 국물 한 숟가락의 위로,
함께 웃던 친구들의 목소리.
그 모든 순간이 싱가포르의 온도와 함께 오랫동안 마음속에 머물 것이다.
우리의 우정이 여전히 단단하다는 것을 다시 한번 확인한 여행.
이 뜨거운 나라에서, 우리는 오래된 신뢰와 따뜻한 마음을 다시 꺼내 서로에게 건넸다.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싱가포르는 내게 아주 특별한 도시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