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신 경험은 저마다 다르고 여성들의 서사는 납작하지 않다. 송해나, <나는 아기 캐리어가 아닙니다>
임테기 두 줄로 존재를 드러내다
임신 이야기부터 조금 해보자. 계획 임신은 아니었다. 때는 2011년 가을. 그때 나는 일주일에 네 번은 대학원 연구실로 출근하고, 하루는 실습생 신분으로 대학병원으로 출근했다. 실습하는 병원에서 집으로 가는 버스 노선 중간에는 친정집 앞 버스정류장이 있었는데, 그래서 일주일에 한 번, 나는 신혼집으로 가는 대신에 친정집으로 퇴근해 밥도 얻어먹고 엄마랑 수다도 떨다가 느지막이 집으로 돌아오곤 했다. 남편은 어차피 매일 야근이었고, 아무도 없는 빈 집에서 혼자 덩그러니 앉아 저녁을 먹는 것보단 그 편이 훨씬 나았으니까.
내 인생에서 평생 못 잊을 9월 셋째 주 월요일. 그날도 어김없이 병원에서 바로 친정집으로 퇴근했는데, 현관문을 열자마자 엄마가 만 원짜리 한 장을 건네며 약국에 다녀오라고 했다. "왜?"라고 어리둥절하게 되묻자 엄마는 약국에 가서 임신테스트기를 사 오라며 내 등을 떠밀었다. 바로 전 주에 내가 스쳐 지나가듯이 "지난 주가 생리 예정일이었는데 아직 생리를 안 해."라고 얘기했었고, 일주일 내내 엄마 머릿속에는 '혹시...?' 하는 염려가 가득했던 것. 엄마는 그날 하루 종일 '이따 저녁에 퇴근한 딸에게 아직도 소식이 없다면 꼭 검사를 시켜야겠다'라고 벼르고 있었고, 현관문이 열리자마자 엄마의 첫 질문은 "너 아직이지?"였다.
이미 2주 전엔가 나도 임신테스트기로 소변검사를 했었고 결과는 음성이었다. 게다가 나름 피임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임신일 가능성은 현저하게 낮다고 생각했고, 그저 엄마 마음이나 편하게 해 주자고 순순히 약국에 가서 테스트기를 사 왔다. 그리고 친정집 화장실에서, 너무너무 선명하다 못해 심하게 진한 두 줄을 보았다.
"엄마. 두 줄인데. 어떡하지?"
화장실 문을 열고 나오며 해실 해실 웃으며 말했다. 엄마는 그럴 줄 알았다며 철없는 딸내미에게 등짝 스매싱을 날렸다. 유부녀 5개월 차, 이렇게 빨리 서프라이즈를 선사할 생각은 없었는데.... 뭔가 웃고 있는 얼굴과는 달리 속으로는 덜컥 겁부터 났다. 어쩌면 현실감이 없어서 얼굴 근육이 마비되었는지도 모르겠다. 미혼모도 아니고 경제적 상황이 어려운 것도 아닌데 임신했다고 펑펑 울면 너무 이상할 것 같고, 그렇다고 해서 기쁜 소식인 거 같긴 한데 그냥 해맑게 웃기에는 기분이 너무 이상했다. 임신했다고? 내가? 임신이 아닌데 테스트기가 두 줄이 나올 일은 없겠지? 정말 배 속에 아기가 있다고? 그럼 지금부터 어떻게 되는 거지? 뭘 해야 되는 거지? 머릿속에 수백 가지 질문들이 한꺼번에 쏟아졌다.
일단 공동책임자(?)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보, 내가 할 말이 있는데... 바빠?" 연애하던 5년 간 오빠라고 불러왔지만 결혼한 지 일주일 만에 여보라는 호칭이 입에 착 달라붙어, 마치 오래 산 부부 같아 보이는 우리. 막상 결혼을 하긴 했는데 평일에는 너무 바빠 얼굴을 보기 힘들어 부부라기보다는 룸메이트 같았던 우리. "어, 바쁘긴 한데.. 무슨 일이야?"라고 되묻는 남편에게
"나 임신했어."
라고 한 방을 날렸다. 아, 표정이 너무 궁금한데. 사실 전화로 할 이야기는 아닌데. 연애하던 순간부터 이 대사를 내뱉는 순간의 짜릿함을 얼마나 많이 상상해 왔었는데 표정을 볼 수 없다니. 그러나 (언제가 될지 모를) 퇴근까지 기다릴 수는 없었다. 어떻게든 이 전대미문의 대 사건을 얼른 상대방에게 털어놓지 않고서는 1초라도 버틸 수 없었다. 수화기를 든 손은 바들바들 떨렸고, 심장소리는 전화기 너머 상대방에게 들릴 만큼 커다랗게 울렸다. 과연 그의 반응은 무엇일까.
"정말? 진짜? 아, 어. 정말?"
이라고 진위여부를 몇 번이나 재확인하던 남편은(속고만 살았냐고 묻겠지만 나한테 많이 속으며 살긴 했다...)
그날 밤, 야근을 했다. 늘 그랬듯이.
제사보단 젯밥, 산부인과보다는 가로수길
당장 병원부터 정해야 했다. 그런데 어느 병원으로 가지? 20대 중반의 내 인맥 중에 '산부인과 정보'를 알고 있는 사람은 없었다. 당장 동네에 산부인과 의원이 어디 있는지도 몰랐다. 일단 나이도 어리고 딱히 지병이 있는 것도 아니니 대학병원으로 가는 건 오버일 것 같고, 그렇다고 너무 작은 동네 개인 클리닉에 다니기보다는 분만까지 해결할 수 있는 병원으로 가고 싶었다. 그때 연구실 2년 선배 C양이 가로수길에 있는 한 산부인과를 추천하면서 내게 이렇게 말했다.
"나는 나중에 임신하면 그 병원 다니는 게 로망이야. 검진 갔다가 간 김에 남편이랑 가로수길에서 데이트할 수도 있고 좋잖아."
오호, 듣고 보니 그럴싸했다. 게다가 나보다 열다섯 살 많은 시누에게 물어보니, 자기 지인들 중에서도 그 병원에서 출산한 사람들이 많다고 했다. 병원 홈페이지도 들어가 보고, 인터넷에서 간단하게 후기도 찾아보니 나쁘지 않았다. 병원이 곧 이전 예정이라 시설이 낡았다는 후기가 있었지만 그 정도는 크게 문제 될 것 없어 보였다. 무엇보다 여자 의사 선생님들이 많았다. 그래, 이곳으로 정했어. 핑크빛 가로수길 데이트를 꿈꾸며 그 병원에서 첫 진료를 예약했다.
처음 진료를 받으러 갈 때는 친정엄마와 함께 갔다. 주말에는 워킹맘들 때문에 병원 예약이 쉽지 않다는 걸 나중에야 알았다. 나는 수업 스케줄만 피하면 평일 진료를 받으러 가기 어렵지 않은 대학원생 신분이라 그 뒤로도 쭉 평일에 검진을 갔다. 남편은 물론 계속 회사에 있었고.... 함께 병원 진료를 보러 가서 꿈꾸던 가로수길 데이트를 한 건 딱 한 번 뿐이었다. 그것도 밤샘 금식과 4시간의 채혈이 이어지던 임신성 당뇨 2차 검사를 마쳤던 날. 그날 치아바타 샌드위치가 참 맛있었지. 근데 나는 샌드위치 말고도 파스타도 먹고 싶었고, 멕시칸 음식도 먹고 싶었는데. 커피도 술도 마시지 못하는 임신부에게 가로수길 맛집들이 그림의 떡일 수 있다는 건 차마 생각하지 못했다. 막상 열 달 뒤 아이를 낳았던 그날 밤에는 친구들을 만나기 좋은 가로수길에 병원이 있어서 나는 병실에, 남편은 친구들과 병원 앞 술집에 있었다. 아빠가 된 축하를 듬뿍 받으며, 남편은 병원이 가로수길 한복판에 있으니 좋다고 말했다.
산 넘고 물 건너 디카페인 커피를 찾아서
첫 병원 진료를 받았을 때 나는 이미 임신 7주 차였다. 임신 사실을 알게 된 지 일주일 만에 기가 막히게 입덧이 시작되었다. 임신인 거 몰랐으면 안 했던 거 아닐까? 이거 괜히 심리적인 거 아니야?라는 의심이 들 정도로 아기집을 확인하자마자 속이 울렁거리기 시작했다. 직접 입덧을 경험하는 나도 이렇게 생각할 정도였는데 주변 사람들은 어땠을까. 저 임신했어요, 라는 말을 꺼내자마자 그다음 날부터 웩웩대는 꼴이라니.
문제는 내가 입덧을 하는 사람을 주변에서 한 번도 본 적 없는 스물다섯 살의 어린 임신부였고, 그것은 내 주변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그들은 입덧을 하는 임신부가 같은 공간에 있을 때 무엇을 어떻게 배려해야 하는지 몰랐다. 당시 내가 다니던 대학원에서는 6명의 석사과정생들이 3평 남짓한 작은 방에 책상 예닐곱 개를 들여놓고 함께 사용하고 있었는데, 수업이 있는 시간이 아니면 각자 과제나 개인연구에 시간을 할애하며 아침 9시부터 6시까지 자기 책상을 지켰다. 그리고 점심 식사도 연구실에서 이루어졌다. 때로는 외부 식당에서 도시락이나 중국음식을 시켜먹기도 하고, 바쁘면 학교 매점에서 김밥이나 샌드위치를 사서 먹기도 하고, 가끔은 컵라면이나 떡볶이 같은 음식들도... 우웩. 24시간 음식 냄새가 가득 배어있는 연구실에서 반나절을 보내야 한다니. 내 입덧 시기의 최대의 난제였다.
나도 내 연구를 하려면 내 책상, 내 컴퓨터가 필요한 데 그곳에 앉아있기만 해도 속이 뒤집힐 것 같으니 도저히 연구실 자리를 지킬 수가 없었다. 그나마 속을 울렁거리지 않게 하는 유일한 음식 냄새는 커피 향이었다. 따뜻하고 고소한 아메리카노 한 잔을 책상 위에 놓으면 모락모락 풍기는 커피 냄새가 코 속으로 들어오는 다른 냄새들을 완화시켜주는 역할을 했다. 그래도 속이 뒤집힐 것 같으면 그때마다 한 모금씩 마셔주었다. 그런데 일반 학교 매점에서는 디카페인 커피를 팔지 않았고, 연구실에서 도보 20분 거리의, 야트막한 언덕을 하나 넘어가면 나오는 기숙사에만 디카페인 커피를 파는 외부 브랜드의 커피 체인점이 입점해 있었다. 가는 데 20분, 오는 데 20분. 왕복 40분의 거리를 오로지 디카페인 커피를 위해 매일 오가기 시작했다.
어려 보이는데, 임신했어요?
기혼 여성이 없고, 출산 경험이 없는 집단에서 임신 시기를 보낸다는 건 생각보다 다이내믹한 일이었다. 그러나 누굴 탓하리. 내가 좋아서 빨리 결혼했고, 내가 좋아서 빨리 임신한 것을. 당시 한 여성잡지에서 대한민국 평균 초산 연령이 만 32.1세라는 기사를 본 적이 있는데, 내가 만 23세에 임신을 했으니 평균보다 9년이나 앞서간 셈이었다.
예정일이 가까워지며 커다랗게 부른 배를 내밀고 대학교 캠퍼스를 걸어 다니는 건 좀 겸연쩍은 일이 되었다. 얼굴에서라도 중년 여성의 면모가 좀 보였다면 교수거나 강사거나 하고 다들 생각했을 텐데, 배만 불룩 나왔을 뿐 얼굴에는 아직 어린 티가 포실포실 나는지라 지나가는 사람들이 내 얼굴 한 번 보고, 내 배를 한 번 보고, 다시 내 얼굴을 힐끔힐끔 쳐다보며 가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그나마 학부생 신분이 아니고 대학원생의 신분이라, 옆 박사과정 연구실에도 나와 예정일 한 달 차이의 임신부 선생님이 있었고, 교수님 중에서도 둘째를 임신한 분이 있다는 사실이 크게 위안이 되었다. 그러나 한 번 더 생각해보면 입장이 전혀 달랐다. 그분들은 30대. 나는 20대.
어느 날은 지나가던 어떤 남학생이 "저보다 어려 보이는데, 임신했어요?"라고 대놓고 물어보는 일까지 생겼다. 지금 생각해보니 진짜 무례한 사람이었는데 나는 그걸 왜 또 일일이 상대했을고. "나이 먹을 만큼 먹었거든요?"라고 발끈했으나 실제 그 남학생이 나보다 한 살 더 많길래 끝까지 나이를 밝히지 않고 슬그머니 그 자리를 피했다. 당시에는 혼인증명서라도 있으면 얼굴에 붙이고 다니고 싶다고 생각했는데, 이제 와서 다시 생각해보니 미혼 모면 어떻고 속도위반이면 어떤가. 지들이 보태준 것도 없으면서. 평균의 잣대를 세워놓고 거기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면 사람들은 손가락질하길 좋아했다. 죄지은 것도 없고 잘못한 일도 없는데 그 손가락질이 참 아팠다.
학교 셔틀버스는 대중교통이 아닌가요
내가 다녔던 학교는 캠퍼스가 세로로 길쭉하게 생겨서, 그리고 대학교 정문이 지하철역에서 꽤 거리가 있어서 실제로 연구실에서 지하철 입구까지의 직선거리를 위성지도로 측정하면 2.7킬로미터가 나왔다. 임신 초기에는 무리가 없었는데, 점점 뱃속의 아이가 무거워지면서 매일 왕복하기에는 꽤 부담스러운 거리가 되었다. (게다가 언덕이었다.)
그런 나를 위해 학교 측에서 마련한... 것은 아니지만 내가 임신했던 해부터 학교에 셔틀버스라는 신문물이 생겼다. 학부 4년 내내 아무렇지도 않게 캠퍼스를 걸어 다녔던 나도, 임신 후반부에 이르러서는 학교 셔틀버스를 자주 애용하게 되었다. 문제는 15분에 한 번씩 배차되는 스쿨버스에, 타려는 학생들은 많고 버스 내 좌석은 턱없이 부족했던 것. 보통 한 번에 50여 명의 학생들이 우르르 몰려 타다 보니 대부분의 학생들은 서서 가게 되는데, 배가 불룩한 D라인의 내가 올라타면 모두 시선을 피했다. 그건 내가 일상적으로 타던 지하철 2호선에서도 매우 흔한 일이었지만, 내 앞에서 눈을 감고 졸고 있는 청년을 볼 때마다 나는 정말 그가 졸려서 잠을 자고 있겠거니... 하고 믿으려 했다. (물론 믿지 않았지만 그렇게 생각해야 내 마음이 편했다.) 그렇지만 이건 학교 셔틀버스가 아닌가. 우리 대학교 정문만 지나면 곧 강의실 앞인데? 아무리 길게 타봐야 버스 안에서 보내는 시간이 10분이 채 안되는데? 근데 진짜 이 버스에서 눈 감고 자고 있다고?
물론 임산부 배려석이나 노약자 배려석 따위 설치되지 않았던 학교 셔틀버스에서 내게 당당히 자리양보를 요구할 권리는 없었다. 그리고 솔직히, 버스가 엄청 만석이어서 뒤에서 하도 밀어대는 통에 배가 눌렸던 몇 번의 경험을 제외하고서는 그렇게 버스 좌석이 간절했던 적도 없었다. 왜냐하면 나도 지하철역에서 강의실 입구까지, 딱 10분만 버스를 타면 되니까. 나도 딱 10분만 버티면 되니까. 그렇지만 내 배를 보자마자 재빠르게 자는 척했던 너. 그날 갈색머리 너. 그 녀석의 꼭 감은 눈을 떠올릴 때마다 왠지 뱃속에서 부글부글 분노가 끓어오른다.
공공버스나 지하철과 다르게, 학교 셔틀버스에서는 자리 양보를 받은 경험이 희한하게도 단 한 번도 없었다.
20대 대학생들이 가장 팔팔하고 에너지 넘칠 거라 생각하는 건 세간의 편견이었나 보다.
내게 가장 많이 자리를 양보해주신 분들은 4-50대 여성분들이었다.
지하철 자리를 먼저 차지하겠다며 가방부터 던지고 보는, 시트콤 속의 한국 아줌마는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