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순이도 가끔은 집이 지겨워
왜인지 연말에는 여행을 가야 할 것 같았다. 아무리 집을 사랑하는 나라도, 재택근무를 하며 타지에서 혼자 집에 박혀있으려니 좀이 쑤셨다. 나는 집순이고 남자친구도 집돌이인데, 이런 면에서 잘 맞는다. 우리는 12월 초 크리스마스 여행계획을 짜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크리스마스에 "올란도"에 가서 "유니버설 스튜디오"를 가는 것이었다. 이때가 이미 12월 초였다. 발등에 불 떨어진 심정으로 비행기표를 찾아봤다. 뉴욕에서 플로리다 가는 비행기표가 이렇게 비싸다니. 그래도 샀다. 하지만 유니버설 스튜디오의 티켓 가격을 보자마자 비행기 티켓을 취소할 수밖에 없었다. 하루에 한 사람의 티켓값이 200만 원이었다. 둘 다 너무 놀라서 바로 다른 옵션들을 찾기 시작했다. 따뜻한 곳에서 편히 쉬고 싶었다. 우리의 다음 타깃은 비행기로 갈 수 있는 멀지 않은 중남부의 도시였다. 구글 플라이츠에서 뉴욕출발행 비행기로 여러 도시를 조사했다. 몇 번의 머리굴림 끝에 둘 다 한 번도 가보지 않은 "애틀랜타"로 정했다. 2시간이라는 적당한 비행시간에 날씨도 뉴욕보다 따뜻했다.
원래 계획은 12월 23일에 애틀랜타에 미리 도착해서 쉰 후에, 근사하게 크리스마스이브 디너를 먹는 것이었다. 하지만 12월 20일쯤, 미국 동부에 엄청난 한파폭풍이 온다는 뉴스가 떴다. 사실 뉴스를 보기 전에 이미 알았다. 새벽 내내 뉴저지 아파트가 부서질 정도로 심한 비바람이 불어서 잠이 깼었다. 이 날씨에 비행기가 뜰 리가 없었다. 아침에 일어나 바로 함께 여행을 가기로 한 남자친구에게 "우리 여행 취소하거나 다음 주로 미뤄야 할 것 같은데.."라고 문자를 보냈다. 극 J의 부지런한 남자 친구는 이미 항공사에서 우리가 선택 가능한 옵션들을 보고 있었다.
Spirit. 우리는 이 저가항공사를 선택한 시점에서 죄를 지은 것이다. 다른 대형 항공사에서는 훨씬 유연한 항공권 변경 타임라인을 제공해 주었지만, spirit 항공권은 고작 며칠만 미룰 수 있었다. 우리는 12월 23일에서 12월 26일 여행을 12월 28일로 미뤘다. 심지어 12월 26일 뉴욕도착비행기는 환불도 안 됐다. 울며 겨자 먹기로 한 주일 여행이 미뤄졌다. 다행히 뉴욕 눈폭풍은 사라졌고 출발 당일이 되었다.
"나 이렇게 여행 안 짜고 가는 여행 처음이야"
공항을 가는 차 안에서 남자친구가 말했다. 나는 좀 놀랐다. 왜냐면 계획을 꽤 야무지게 짰기 때문이다. 새삼 이 친구가 계획 세우고 지키는 것을 최고로 잘하는 J 인간임을 다시 깨달았다. 나도 정식 MBTI 테스트를 하면 J로 나오긴 하는데, 우리 둘의 티어가 다르다. 나는 상대적으로 유연하고 여유로운 성향에, 후천적으로 학습된 계획형 인간이다. 그래서 이뤄야 할 목표가 있는 공적인 일이 아닌 이상, 타이트한 계획을 세우진 않는다. 반면 남자친구는 계획과 규칙과 함께 태어난 듯하다. 뭘 하자고 하면 일단 지구 맨틀까지 뒤져서 모든 정보를 가져온다. 특히 목표가 있는 일을 하는데 매우 부지런하고 성실하고 꼼꼼한 타입이다. 하지만, 이번건은 일이 아니라 연말 휴식 여행이잖아! 아래는 우리가 함께 짠 계획표다.
28일은 애초에 저녁 9시 이후에 도착하는 예정이고, 31일은 혹시 모를 컨디션 난조를 고려하여 비워뒀다. 사실상 모든 주요 일정은 픽스가 되었는데, 이 정도면 꽤 계획적이지 않았나,라고 자연산 P는 생각한다. 다음에 정말 무계획 여행에 한번 남자 친구를 초대하고 싶다. 처음부터 끝까지 눈누난나의 여행의 아름다움을 꼭 느끼게 해주고 싶다.
웃긴 것은 저 모든 계획은 미리 티켓을 사지 않은 탓에 다 어그러졌다. 여기서 P이 유연함이 나온다. 계획이 엉망이 되었어? 오히려 좋아. 마음 가는 대로 흘러가는 여행의 시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