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던 빼고 영국 여행] 스코틀랜드, 하이랜드(Highlands)
영국을 이루는 4개 구성국(잉글랜드, 웨일즈, 스코틀랜드, 북아일랜드) 중 북쪽에 자리한 스코틀랜드(Scotland). 스코틀랜드 중에서도 더 지대가 높은 지역을 ‘하이랜드(Highlands)’라 부른다.
보통의 사람들이 지척에서 서로 부대끼며 삶을 영위해가는 인구밀집 지역에서 멀리 떨어진 땅. 그래서인지 하이랜드를 직접 눈으로 보기 전부터 그곳은 어딘가 '먼 곳의 전설 같은 땅', '현재를 잊게 만드는 비현실이 존재하는 땅', '알지 못하는 무엇인가가 존재하는 미지의 땅'과 같은 이미지로 다가왔다.
참고로, 스코틀랜드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뉜다. 사람들이 주로 사는 대도시 에든버러와 글래스고 등이 있는 ‘로우랜드(Lowlands, 낮은 땅이라는 뜻이다)’와 산지가 많고 척박해서 인구가 적은 ‘하이랜드(Highlands)다. 흠... 하이랜드를 향한 막연한 동경과는 별개로, 명칭이 ‘낮은 땅’과 ‘높은 땅’이라니. 영국은 지역 이름을 굉장히, 좋게 말하면 직관적으로, 다른 말로는 일차원적으로 짓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스코틀랜드에 이어 찾은 곳이 조만간 소개할 잉글랜드 북서부의 ‘레이크 디스트릭트(Lake District)’인데, ‘호수 지역’이란 뜻이다. 하하.
스코틀랜드 북부 지역, 하이랜드로 향하는 길은 말그대로 긴 여정이었다.
잉글랜드 남부에 있는 바스(Bath)에서 출발하여 잉글랜드 중부 요크(York)를 여행하고, 잉글랜드 북부의 안윅캐슬(Alnwick Castle)을 경유하면서 틈틈이 멈추었지만, 전체적인 여정은 차를 타고 계속 스코틀랜드 북부를 향해 달리는 중이었다.
달리는 차창 밖으로 초록 물감을 가득 머금은 풍경화가 끝없이 이어졌다.
영국의 도로 주변 풍경은 말그대로 한 폭의 그림 같았다. 산악지대가 많은 우리나라와 달리 완만한 논과 밭, 혹은 잔디가 넓게 펼쳐진 들판은 평화롭고, 들판 곳곳에 무리지어 형성된 우즈(Woods)의 나무들은 유려했다.
특히나 영국 남부 지역의 자연 풍경은 상대적으로 더 평평하고 우아한 느낌인데, 이런 창밖의 풍경이 북부 지역에 가까워질수록 점차 변하는 것이 눈에 보였다.
도로의 표지판에 ‘스코틀랜드’가 나타날 즈음에는 교과서에서 배운 침엽수를 닮은 키가 크고 꼿꼿한 나무들이 도로 양쪽에 벽처럼 서 있었다.
그 구간을 지나면 큰 나무는 거의 사라지고, 낮은 풀들의 초록이불을 덮은 산과 언덕, 구릉 들이 이어졌다.
곧이어 불모지 같기도 한 거칠고 황량한 평지가 펼쳐질 때는 광활한 낯선 풍경에 나도 모르게 입을 벌려 감탄하며 ‘광막함’이란 단어를 떠올렸다.
스코틀랜드의 하이랜드는 직관적인 이름처럼, 북쪽의 땅에 가까워질수록 특별한 안내판이나 설명 없이도 직관적으로 내가 하이랜드에 이르렀음을 느끼게 했다. 흔히들 ‘아이슬란드(Iceland)’가 다른 행성을 다룬 영화 ‘인터스텔라(Interstella)’의 일부 장면을 촬영할 정도로 보통의 지구 같지 않은 독특한 땅과 지형이 있는 나라라고 한다. 하이랜드를 다녀온 뒤 두어 달 후 아이슬란드에도 다녀왔는데, 스코틀랜드는 아이슬란드의 마일드 버전 같은 느낌이었다.
낯설고 이질적인 하이랜드의 풍경을 향한 감탄과 함께, 스코틀랜드를 향해 차를 타고 달리는 동안 내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던 또 하나의 상념이 있었다.
먼 북쪽의 땅으로 이어지는 긴 도로에서는 ‘야생동물주의’ 표지판을 수시로 만날 수 있었다. 자연을 있는 그대로 두길 좋아하는 영국의 지방 도로에서 야생동물주의 표지판이 희소한 것은 아니었지만, 특히나 스코틀랜드 하이랜드로 향하는 길에는 더욱 자주 그 표지판이 보였다. 그리고 실제로 도로에서 (슬프고 안타깝게도) 차에 치여 쓰러져 있는 야생동물들의 사체를 여러 차례 목격하고 눈을 질끈 감았다.
야생동물주의 표지판과 도로가에 쓰러진 동물들을 지나치면서 인구가 많은 남쪽의 지역들에 비해 자연과 야생이 더욱 생생하게 살아있는 스코틀랜드구나 하는 생각이 듦과 동시에, 이 길은 그 야생동물들의 터전인 야생의 자연을, 순수의 땅을 인류가 만든 이기로 파괴하는 길이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인류가 자리잡은 땅 어느 곳이 태초에 순수한 야생이 아니었던 곳이 있겠냐마는, 눈으로 직접 확인하는 야생의 죽음은 훨씬 강렬하고 끔찍하게 다가왔다. 그래서인지 하이랜드로 가는 길 내내, 하이랜드로 떠나기 전 읽었던 얀 마텔(Yann Martel)의 <포르투갈의 높은 산>이라는 소설이 떠올랐다.
하나의 소재에 얽힌 여러 인물의 이야기가 옴니버스 식으로 전개되는 소설의 첫 번째 이야기에는 아직 자동차가 보편화되지 않은 시기에 차를 타고 차도도 만들어 지지 않은 지방의 마을 길을 지나가는 내용이 나온다. 먼지가 풀풀 날리는 비포장 마을길에 등장한 자동차를 보고 마을 사람들은 처음엔 두려워하다가 점차 모여들어 차가 지나갈 수 없을 지경에 이르고, 차를 몰던 주인공은 가까스로 그 마을을 빠져나온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마을의 한 아이가 차에 깔려 죽는 일이 생긴다. 소설을 읽으며 주인공이 운전하는 자동차가 문명의 이기를, 개발되지 않은 마을은 태초의 순수성을 상징하는 것이라 여겼는데, 하이랜드로 향하는 도로에서 길에 쓰러져 있는 동물들이 마을의 아이 같다는 생각이 떠나질 않았다. 아이러니 한 것은 소설 속 주인공이 차를 타고 도로도 정비되지 않은 시골 마을을 기어코 달려간 길이 구원을 위한 길이었다는 것이다.
앗, 이런... 분위기가 너무 무거워져 버렸다. 그러나 이 감정으로 계속 여행을 한 것은 아니었다.
하이랜드의 도로 주변의 광활한 풍경은 곧 내게 야생의 파괴와 상실에 대한 슬픔과 애도를 잠시 접어 두고, 자신을 향한 감탄을 계속 내뱉도록 만들었다. 오로지 풍경만 보고 어딘지도 모르는 길에서 내려 그저 눈앞에 펼쳐진 땅을 감상하고, 사진을 찍었다. 많은 사람들이 이 낯선 땅을 직접 밟으며 하이킹을 하기 위해 하이랜드를 찾는다고도 했지만, 아직 아이들이 어렸던 우리 가족의 하이랜드 여행은 이렇게 차를 타고 ‘가다, 서다’의 반복이었다(우리 말고도 곳곳에 세워진 차들이 많았다. 하하).
단점이라면 지날 때마다 탄성을 자아내는 풍경 탓에 전방주시에 부단한 노력이 필요했다는 것, 그리고 이 스코틀랜드의 풍경이 특별하고 귀하다는 것을 아직 어른처럼 느낄 수 없기에 자주 멈추는 자동차가 지겨워진 아이들에게 “또야?”라는 핀잔을 들어야 했다는 것.
특히나 인상적이었던 지형은 ‘글렌코(Glencoe)’라는 지역이었다. 글렌코는 오래 전 화산 폭발로 형성된 거대한 U자형 협곡이다. 앞 편에서 소개한 글렌피넌에서도 들어가는 ‘글렌(Glen)’은 스코틀랜드 전통 언어인 게일어로 ‘협곡, 계곡, 골짜기’이란 뜻이다.
지질학적 측면에서 고대 화산 활동과 빙하 침식, 다양한 암석이 복합되어 있는 중요한 지질 구조로 평가되는 글렌코. 그러나 지질학에 대해 아는 바가 없는 일반인의 눈에는 그저 낯설고 신비로운 풍경이었다. 현실에 없는 가상의 세상을 만드는 사람들의 눈에도 그렇게 보였는지, 해덕으로서 중요한 정보를 조금 더 나누자면, 이 글렌코에서 <해리 포터> 영화의 여러 장면을 촬영했다고 한다. CG 등 다양한 후반 작업으로 실제 글렌 코 주변 지형이 그대로 나오진 않았겠지만, 해그리드의 오두막집, 호그와트 주변 풍경을 보여주는 장면, 벅빅을 타는 장면 등이 글렌코에서 촬영되었다고.
영화 속 가상 세계 말고도, 일상의 현실을 벗어나 하이랜드로 떠나온 사람들에게도 글렌 코는 하이킹 명소로 당연 인기라고 한다. 글렌코 주변을 지나칠 때, 비가 오는 중에도 글렌코 위를 걸어가는 사람들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었다. 대자연을 거니는 자유로운 그 모습을 직접 보니, 하이킹을 할 준비가 되지 않아 눈으로 보기만 하고 스치듯 떠나는 발걸음이 정말로 아쉬웠던 순간이었다.
그러나 글렌코의 주요 하이킹 포인트에 가기전, 글렌코 주변의 이름 모를 어느 멋진 협곡에서 자유롭게 걸었던 우리의 산책도 말할 수 없게 근사했다.
광활한 협곡이 구비구비 이어진 하이랜드의 오묘한 지형들을 지나면서 나중에 꼭 다시, 그땐 긴 시간을 할애하여 스코틀랜드를 방문해 함께 글렌코를 걸어보자고 남편과 약속했다. 비록 스코틀랜드 외에도 꼭 다시 방문하자고 약속한 곳들이 수북이 쌓여 어느 땅과의 약속을 먼저 지켜야 할지 알 수는 없지만 말이다.
하이랜드는 산 지형 외에도 크고 긴 호수들이 많다. 글렌피넌에서 보았던 '로크 실(Loch Shiel)'도 아름다웠지만, 하이랜드의 진짜 명소 중 하나가 '로크 네스(Loch Ness)', 네스 호수다. 너무 엄청난 장관을 한 번에 몰아치듯 만나면 소화력이 떨어질 수 있으니 로크 네스는 하이래드의 주도 ‘인버네스’, 그리고 강처럼 긴 호수 속에 사는 신비한 미확인 생명체와 함께 다음 편에서 만나기로 하자.
[런던 빼고 영국 여행] 스코틀랜드, 하이랜드
북방의 땅, 하이랜드로 가는 길 _ 마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