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던 빼고 영국 여행] 스코틀랜드 하이랜드 '인버네스'
지난 편에서 함께 보았듯 하이랜드와 로우랜드로 나뉘는 스코틀랜드. 그 중 하이랜드는 척박한 지형 탓에 사람이 살기에 좋지는 않은 환경이다. 그래도 사람들은 터를 잡았고, 또 모였다. 하이랜드 인구의 1/4이 살고 있는 도시 ‘인버네스(Inverness)는 스코틀랜드의 대표 호수인 ‘로크 네스(Loch Ness)’의 하류에 자리한 도시로, 하이랜드의 주도로써 중심 도시 역할을 하고 있다.
하이랜드에서는 나름 주요한 도시이지만, 솔직히 인버네스는 우리의 영국 북쪽 지역을 향한 여행에서 그리 중요한 곳은 아니었다. 하이랜드의 광활한 자연 지형을 탐험한 후 하루 묶어갈 곳이 필요했고, 그렇게 하루 묶고 나서는 하이랜드 여행에서 빼놓을 수 없는 ‘로크 네스(Loch Ness)’를 봐야했으니 호수에서 멀지 않은 숙소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큰 기대 없이 발걸음한 도시의 얼굴이 얼마나 청량하고 평화로웠는지! 지금도 가슴이 답답한 날이면 문득문득 떠오르는 그날, 머리카락을 흩트리고 뺨에 닿던 청량한 인버네스의 바람을 잊지 못한다. 잠시 머문 단 한나절의 인버네스에서 나는 진심으로 충만한 시간을 보냈다.
그러나 미리 밝히자면, 인버네스에서 우리는 특별한 곳, 그러니까 인버네스 성이나 박물관 등등 여행자들이 주로 찾는 곳들을 관람하지는 않았다. 그저 로크 네스에서 흘러온 네스 강 가와 거리를 산책하고, 야외 테이블에서 식사를 하고, 기념품샵을 포함한 작은 가게들을 구경했다.
그 척박한 곳에 도시를 다듬어 간 인버네스의 노고를 생각하면 우리의 수박겉핥기식 여행이 미안해지지만, 날씨의 도움으로 가장 아름다운 인버네스의 얼굴을 만나고 와서, 아직도 여전히 그 아름다움을 잊지 않고 있으니 어쩌면 인버네스도 나의 얕지만 짙은 사랑을 이해해주리라.
인버네스는 스코틀랜드 전통언어인 게일어로 ‘네스 강의 하류(게일어 Inbhir Nis에서 유래’)라는 뜻이라고 한다. 도시명에도 호수와 강의 이름이 들어가 있는 인버네스에는 도시 가운데를 흐르는 넓은 '네스 강'이 있다.
네스 강 근처 주차장에 주차를 하고 차에서 내리기 위해 차문을 열자 시원한 바람이 ‘와락’ 안겨왔다. 그때가 5월말 6월초로 해가 쨍한 날은 차 내부의 온도가 꽤 올라가는 시기였음에도 에어컨에서 냉방과 난방의 사이쯤 되는 바람이 나오는 차를 타고 한참을 달려 만난 인버네스의 청량한 바람은 그곳이 천국처럼 느껴지게 했다.
의아하게 들릴 수 있겠으나 영국의 차들 중에는 에어컨이 시원찮은 차가 많다(없는 차도 있다. >.<). 물론 돈을 아주 많이 주고 산 차는 에어컨이 빵빵하게 잘 나오겠지만(우리 차는 중고차였다.), 여름이 아주 덥지 않은 영국이기에 그곳 사람들은 차량 에어컨에 대해 우리나라만큼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았다. 남편이 영국인 지인에게 차 에어컨 성능이 별로라고, 정비소에서 한번 점검을 했는데도 달라진 게 없다고 말하자 대수롭지 않게 ‘그냥 창문 열고 다녀~’라고 조언을 해 주었다고 한다. 물론 그의 차에도 에어컨이 없었다. 하하.
파란 하늘 아래 초록의 잎들을 시원하게 살랑이는 바람을 맞으며 바라보는 네스 강은 눈으로 보는 것만으로도 시원했다. 꽤 넓은 강폭과 시야를 막지 않는 주변의 낮은 건물들 때문에 시야가 탁 트이는 기분이 배가되었다.
강 가까이 다가서서 보는 강물도 아주 깨끗했다. 넓은 폭에 비해 얕은 깊이 때문에 네스 강은 더욱 맑게 느껴졌다. 맑은 강 위로 바람이 일으키는 물결이 ‘차르르르’ 찰랑일 때면 ‘청량함’이란 단어를 눈으로 보고 있는 것만 같았다.
다시 한번 온몸으로 흡수한 강바람은 막 뚜껑을 딴 사이다처럼 청량했다. 강물만큼 깨끗하게 정비된 강가를 따라 걸으며, 또 벤치에 앉아서 강물을 바라보며 유유자적 일상을 즐기는 인버네스 사람들이 보였다. 이 도시에도 반복되는 생활이 있고, 쉽게 해소되지 않는 스트레스가 있을 텐데 먼 곳에서 온 이방인의 눈에는 그저 도심을 맑게 가로질러 흐르는 여유와 행복만 보인다. 그리고 아마도 이런 풍경 속에 살아가는 생활이라면 ‘작은 나라의 대도시’ 속 바쁘고 팍팍한 삶보다는 훨씬 여유롭고 평안한 것이 사실일지도 모른다.
인버네스는 몇 해 전에 영국 189개 도시 중 삶의 질 측면에서 5위를 차지했다고 한다. 인버네스를 눈으로 보기 전에는 북쪽의 춥고 척박한 지역의 삶이란 힘들 것이라 생각했는데, 또 그곳은 그곳에 맞는 삶이 펼쳐지고, 오히려 복잡한 대도시가 아니라 더욱 행복을 느끼는 인버네스, 하이랜드 사람들이 아닐까 생각해 보았다.
네스 강 가에 자리한 야외 테이블이 근사한 식당으로 저녁을 먹으러 들어갔다. 사실 맥주가 더 고팠다. 청량한 강물과 바람 속에서 갓 따른 시원한 맥주를 꿀꺽꿀꺽 마시고 싶었다.
내리쬐는 햇살 사이사이로 바람이 오가는 야외 테이블에서 마시는 맥주는 기대 이상으로 맛있었다. 그리고 기대 이상으로 기분이 들떴다. 우리 가족이 앉은 테이블도, 눈앞에 펼쳐진 맑은 도시도, 여행을 잘 따라와 주는 아이들도, 모든 것이 사랑스러웠다. 그날 내가 마신 것은 단지 맥주가 아니라, 헬륨보다 더 가볍게 느껴지는 인버네스의 청량한 공기 아니었을까. 그래서 기분이 그렇게 동동 떠다녔던 것이리라.
그러나 들뜬 기분에 취해 안 하던 생선 요리를 주문하고만 것은 실수였다. 영국에서 지내는 동안 피시 앤 칩스가 아니면 생선 요리를 잘 주문하지 않았다. 낯선 음식에 대한 나의 낮은 수용도 탓이다. 그런데 인버네스에 취한 나는 바닷가에 자리한 이 도시의 멋진 식당에서 추천하는 생선 요리가 그날따라 궁금해져서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생선 요리를 주문했고, 회도 아니고 구이도 아닌 숙회와 초절임 중간 느낌의 처음보는 생선 요리를 한 입, 두 입, 꾹꾹 참고 먹다가 결국 절반도 먹지 못하고 백기를 들었다. 혹시 이 다음에 맑고 청량한 인버네스를 만나게 된다면, 지나치게 신선한 하이랜드의 공기에 홀려 안 하던 짓을 하고 싶어 질지도 모른다. 그래도 절대로 안 먹던 것은 주문하지 말길. 먹지 못하고 남긴 음식은 기념으로 가져올 수도 없는 노릇이다.
인버네스의 남은 생선 요리는 아깝게 가져올 수 없었지만, ‘인버네스의 마스코트’는 잘 챙겨서 한국까지 데리고 왔다.
여행을 하면서 절대 빼놓지 않고 들리는 곳이 기념품 샵이다. 여행지의 열쇠 고리를 모으고 있는 첫째 아이와 손에 뭐라도 쥐어 주어야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가능한 둘째 아이 때문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내가 여행지의 작고 소소한 것들을 구경하길 좋아했다.
인버네스에서도 거리를 돌아보며 몇 곳의 기념품 가게와 소품샵을 구경했다. 목각 인형도 갖고 싶었고, 스코틀랜드의 또 다른 명물인 위스키도 사고 싶었지만 가장 갖고 싶었던 것은 그 모든 가게에서 상당히 다양한 종류로 변형되어 존재감을 뿜어내는 아이, 바로 인버네스의 마스코트이자 로크 네스의 미스터리 호수 괴물, ‘네시(Nessie)’ 였다.
인버네스에 도착해 차에서 내려 강가로 내려설 때도 산책로 초입에 안내판으로 세워져 있었던, 네시. ‘호수 괴물’이라는 무시무시한 아이덴티티와 극명하게 대비되는 귀여운 모습으로 인버네스의 소품샵을 차지하고 있는 네시는 네스 강을 거슬러 올라가면 있는 호수, 로크 네스에 산다고 여겨지는 호수 괴물의 이름이다. 호수 괴물이라더니, 또 마스코트는 뭐고, 귀여운 네시 인형은 뭐란말인가. 도대체 ‘네시’의 정체가 무엇인지 궁금할 것이다. 나도 말로만 듣던 호수 괴물이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라 이렇게 애정어린 대우를 받고 있는 것이 매우 신선했다. '괴물'과 '귀여움'의 이미지를 동시에 갖고 있는 '네시'에 대해서는 다음 편 로크 네스 여행기에서 다시 자세히 알아보기로 하자.
위도가 높아 해가 늦게 지는 인버네스에서의 짧은 시간을 뒤로하고 예약한 숙소로 가기 위해 주차장으로 향했다. 돌아가는 인버네스의 거리는 여전히 여유롭고 청량했다. 이런 도시에서 매일 산책을 할 거리의 사람들이 다시금 부럽게 느껴졌다.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 매일 미세먼지 농도를 체크하는 생활을 떠올리니 안타깝기도 했고. 그러나 내게 이 북쪽 끝의 도시에서 살라고 하면, 아마도 두 손을 흔들며 고사하겠지. 여름 인버네스의 청량한 여유를 누리기 위해 견뎌야 하는 이곳의 우울과 혹한의 시간도 쉽지 않을 것이기에.
어찌보면 모두들 양 손에 각자의 기쁨과 고난을 쥐고 살아가는 중에, 잠시 나의 고난을 내려놓고 누군가의 기쁨으로 충만해지는 것이 여행인 것 같기도 했다. 그러니 나는 인버네스가 내게 알려준 청량한 충만함을 잘 간직했다가 언젠가 나의 일상이 힘들어 질 때 소중히 꺼내어 잠시 먼 곳의 기쁨을 누릴 것이다. 그것이 기대조차 없이 찾아와 도시를 제대로 들여다보지도 않고 너무 큰 충만함을 안고 돌아가는 나의, 인버네스를 향한 예의이다.
'청량함'을 도시화한다면, 하이랜드 ‘인버네스’
[런던 빼고 영국 여행] 스코틀랜드, 하이랜드, 인버네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