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던 빼고 영국 여행] 잉글랜드 레이크 디스트릭트
스코틀랜드를 떠난 우리의 발길은 잉글랜드의 북서부, 스코틀랜드와 맞닿아 있는 산악지대 ‘레이크 디스트릭트(Lake District)’로 향했다.
영국에서 가장 큰 국립공원인 ‘레이크 디스트릭트’는 자연이 잘 보존되어 있어 영국 내에서도 빼어난 자연 경관으로 손 꼽히는 곳이다. 떠나온 스코틀랜드의 거칠고 황량한 광활함과 달리, 레이크 디스트릭트는 무성한 나무로 빽빽한 산과 숲, 또 호수와 계곡이 많은, 보통의 사람들이 생각하는 ‘아름다운 숲 속’의 전형 같은 곳이 아닐까 한다.
이 레이크 디스트릭트에는 영국에서 가장 높은 산인 ‘스카펠 파이크(Scafell Pike)’산이 있다. 영국은 전체적으로 높은 산맥이 발달한 지형은 아니어서, 가장 높은 산도 해발 978m, 약 1Km 밖에 되지는 않지만 그래도 어쨌든 영국 내에서는 가장 높은 산을 보유한 대표 산악지대다. 그래서 이곳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하이킹과 산책, 캠핑 등을 하며 자연을 즐기기 위해 모인다.
또한 이름이 ‘레이크(Lake)’인 이유를 증명하듯 산과 산, 계곡 사이에 형성된 호수가 많은데, 가장 높은 산에 이어 (표면적 기준으로) 영국에서 가장 길고 큰 호수, ‘윈드미어(Windermere)’가 있는 곳도 이곳 레이크 디스트릭트다.
스코틀랜드에서도 협곡과 호수를 한참 보다가 왔는데 레이크 디스트릭트에도 또 산과 호수라니! 너무 볼거리가 중복되는 것 아닌가 싶긴 하다. 게다가 앞 편의 글에서 여러 번 감탄했듯 스코틀랜드의 지형은 다른 곳에서 쉽게 볼 수 없는 독특한 것들, 광막함이 떠오르는 거대하고 인상적인 것들. 이 긴 여행을 떠나오기 전, 스코틀랜드 여행 후 레이크 디스트릭트에 간다는 우리의 여행 계획을 들은 한 영국 지인도 고개를 갸웃하며, 그러면 레이크 디스트릭트가 조금 실망스럽게 여겨질 수도 있다고 염려했었다.
그러나 스코틀랜드의 자연과 레이크 디스트릭트의 자연은 각자의 멋이 있어, 그 어느 것도 서로의 매력을 상쇄시키지 않았다. 황량한 광활함 뒤에 만난 레이크 디스트릭트의 풍성하고 유려한, 그리고 무엇보다 익숙한 초록의 정취는 다정하고 푸근한 엄마의 품처럼 여유롭고 편안했다.
영국에서 가장 길고 넓은 호수 ‘윈드미어’
레이크 디스트릭트의 대표 호수 윈드미어는 레이크 디스트릭트의 남쪽에 위치해 있다(위쪽 지도 참고). 영국에서 가장 긴 호수답게 세로로 긴 형태의 윈드미어는 어디서 보느냐에 따라 다른 모습을 보여주리라 생각된다.
그래서 윈드미어의 전경을 볼 수 있는 전망 포인트가 몇 곳이 있는데, 우리는 가장 많은 사람들이 찾는 ‘오레스트 헤드 전망대 (Orrest Head)’에서 윈드미어를 감상했다.
오레스트 헤드는 윈드미어의 가운데 지점에서 조금 북쪽에 위치한 언덕으로, 윈드미어역에서 20~30분 정도 언덕 길을 오르면 되는데 길이 잘 닦여 있어 아이들도 쉽게 오를 수 있었다.
오레스트 헤드에 오르니 과연 소문대로 윈드미어가 한눈에 들어왔다. 흐린 하늘 탓에 풍경의 톤이 전체적으로 어두웠지만 대신 푸른 기운이 도는 호수는 더욱 맑고 시원한 느낌이었다.
스코틀랜드에서 내내 좋았던 날씨의 운은 끝이 났는지, 레이크 디스트릭트에서는 대체로 날이 흐렸다. 하지만 영국 여행에서 ‘날씨가 내내 좋았던 기간’이 있었던 것만으로도 감사한 일이기에, 조금의 불만도 없었다. 특히나 호수가 많은 지역 특성상 원래 흐린 날이 많은 것이 레이크 디스트릭트였고, 더하여 장대비나 우박이 쏟아지지도 않고, 비바람이 몰아치지도 않고, 그저 구름이 가득한 잿빛 하늘 정도인 날씨는 영국에서는 일상일 뿐이라는 걸 이해하게 된 영국살이였다. 때때로 고혹적인 느낌마저 주는 영국의 구름, 그런 구름을 잔뜩 머리 위에 인 윈드미어는 참 근사했다.
윈드미어의 허리쯤에 위치한 전망대를 기준으로 오른쪽과 왼쪽, 양쪽으로 길게 뻗은 호수는 호리병처럼 허리가 잘록해졌다, 다시 넓어졌다를 반복하며 잔잔한 호수면에 리듬감을 더했다. 긴 호수 주변에는 높지 않은 산들이 멀리 여러 겹으로 겹쳐 물결처럼 퍼져나갔다. 시야를 완전히 막지 않을 정도의 높지 않은 레이크 디스트릭트의 산세가 호수와 함께 흐르듯이 어우러지는 풍경은 그야말로 ‘그림처럼’ 장관이었다.
호수를 등지고 언덕 뒤쪽으로 돌면 호수 너머 멀리 펼쳐진 산들의 자세한 사정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또 다른 산의 능선들이 구비구비 가까이 펼쳐졌다.
낮은 언덕이라도 정상은 정상이라, 바람이 꽤 불었다. 바람에 맑은 초록빛이 실려오는 것 같았다.
바람이 부는 산의 정상에 있으니 조금 더 높이 비상하고 싶어진걸까? 아이들에게 바람을 타고 나는 듯 높이 뛰어올라 보라고 주문하며 사진을 찍었다. 아이들을 따라 나도, 남편도 다함께 붕붕붕~
속세를 벗어난 대자연의 바람을 온몸으로 흡수하고, 자연이 주는 기쁨을 온몸으로 표현한 작품사진을 흐뭇하게 감상하면서 윈드미어 감상을 마쳤다.
낭만적 시인 워즈워스가 사랑한 ‘그라스미어’
가장 큰 호수인 윈드미어에서 위쪽으로 많이 떨어지지 않은 곳에 또 하나의 유명한 호수, ‘그라스미어(Grasmere)’가 있다. 윈드미어에 비하면 작은 호수이지만, 아름답기로 소문난 그라스미어를 따라 걷는 산책로가 특히 좋다고 했다. 윈드미어에서 본 전체적인 호수 전경도 근사했지만 ‘호수(Lake)’가 특산물인 ‘레이크(Lake)’ 디스트릭트에서 잔잔하게 고인 호수를 가까이에서도 보고 싶던 참이었는데, 이 인기 산책로가 마침 우리 숙소 근처에 있다기에 저녁을 먹기 전 늦은 오후에 가족들과 느릿느릿 산책을 나서 보았다.
그라스미어로 가는 길은 말그대로 ‘숲 속 길’이었다. 산책로가 나 있는 완만한 숲 길을 걷다 보면 시원하게 흐르는 계곡물을 만난다. 물가에서 무리를 지어 헤엄치는 오리들과 큰 날개를 펄럭이는 두루미 같은 큰 새가 계곡에 생명력을 불어넣었다.
일방적인 ‘인간’의 방식이지만 새들에게 다정한 손인사를 반가운 마음을 건네고 앞으로 나아가는데, 계곡 위쪽에서 갑자기 진짜 인간이 나타났다. 카약을 타고 래프팅을 즐기는 사람들. 얕아진 계곡물에 서로의 배를 당겨주며 래프팅을 하는 커플의 모습이 앞서 본 새들만큼이나 즐겁고 자유로워보였다. 실로 다양한 종류의 생명체들이 저마다의 방식으로 자연을 즐기는 ‘아름다운 숲 속’ 레이크 디스트릭트였다.
야생 새들과 계곡 모험가, 그리고 아름다운 계곡 풍경을 지나자 또 다른 분위기를 선사하는 산책로가 이어졌다. '목장길 따~라 밤길 거닐어~' 흥얼흥얼 노래가 절로 나는 목가적인 길이었다.
그렇게 조금 더 걸어 좁은 나무 문을 지나자 앞이 환하게 넓어지며 시야가 트였다. 드디어 그라스미어에 도착!!
저녁 때가 다 되어가는 늦은 시간이라 그런지 우리 말고는 아무도 없는 그라스미어는 무척 고요했다. 호숫가 바로 곁에 서서 본 레이크 디스트릭트의 호수는 정말 유리처럼 맑고 잔잔했다. 여전히 흐린 날씨는 아름다운 윤슬이 반짝이는 호수를 보여주진 않았지만, 구름 낀 하늘색이 비친 호수면은 아주 부드러운 실크를 펼쳐 놓은 것처럼 매끄러웠고, 덕분에 몽롱하고 신비로운 분위기가 넘실거렸다.
맑은 호수를 가만히 보고 있자니 나도 모르게 발걸음을 떼 들어가 보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조금만 정신을 놨으면 내가 진짜 들어갔겠다 싶은 생각에 혼자 화들짝 놀랐다. 호수를 처음 본 것도 아니건만, 호수를 보고 이렇게까지 눈을 떼지 못하게 끌렸던 곳은 그라스미어가 처음이었다.
이 오묘하게 맑고 청초한 그라스미어를 정말 사랑한 시인이 있었다. 멀리 호수 건너 편을 자세히 보면 몇 채의 집들이 있었다. 오래전 저 마을의 집들 중 한 곳에서 지내며 매일 그라스미어를 노래했던 영국 시인, 윌리엄 워즈워스(William Wordsworth)다.
이름을 들어본 적이 있긴 한 거 같은데 ‘워즈워스’가 누구더라, 하는 사람들을 위한 간단 설명 타임.
윌리엄 워즈워스는 18~19세기 영국의 대표적 낭만주의 시인이다. 워즈워스는 이곳 레이크 디스트릭트에서 태어나 유년기를 보내다가 그후로는 캠브릿지 대학교에서 수업을 받고, 프랑스, 독일 등 유럽으로 나가 넓은 세계를 보기도 했지만, 늘 고향을 그리워했다고 한다. 그래서 나중에 다시 이곳으로 돌아와 여생을 보낸, 레이크 디스트릭트를 너무도 사랑했던 시인.
워즈워스의 시는 자연의 아름다움, 자연에서 느끼는 감상을 노래하기로 유명한데 대표적인 시로 무지개와 수선화가 있다. 수선화는 영국의 대표 봄꽃으로 겨울에서 봄으로 넘어가는 3월에 아마도 이 그라스미어 주변에도 가득했을 것이다. 그리고 비가 잦은 영국에서는 무지개도 자주 만날 수 있는 아름다운 자연 현상. 이렇게 워즈워스는 일상 속에서 늘 곁에 있는 자연을 시의 소재로 삼았다.
비록 나이가 들어가지만, 어린 아이일 때 품었던, 그 수순함을 끝까지 잃고 않고 지켜가고자 하는 다짐이 잘 드러난 워즈워스의 대표시 무지개에는 우리에게도 친숙한 문장이 나온다. 시를 잘 몰라도 한번쯤은 들어 봤을 문구, “어린이는 어른의 아버지”.
이 유명한 문장을 쓴 사람이, 워즈워스다. ‘워즈워스가 사랑했던 그라스미어’라고 하면 그가 누군지 몰라 거리감이 있을 수 있지만, 우리가 익히 알고 있던 문장을 쓴 시인이 사랑했던 그라스미어,라고 하면 조금 더 가깝게 느끼지 않을까 기대해 본다. 하하.
다시 눈 앞의 그라스미어로 돌아오자.
여전히 황홀하게 아름다운 그라스미어를 쉽게 떠나지 못하고 서성였다. 이 레이크 디스트릭트를 보고 있자니, 이렇게 아름다운 풍경을 매일 보고 사는 삶에는 걸음마다 시가 절로 흘러나오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위대한 시인을 낳은 것은 이토록 아름다운 레이크 디스트릭트의 자연이 아니었을까.
앞서도 말했듯, 우리가 그라스미어를 바라본 호수 건너편으로 가면 워즈워스가 여동생과 함께 약 8년간 살았던 집 ‘도브 코타지’가 대중에게 개방되어 작가의 집 박물관으로 운영되고 있다. 우리는 하필 휴관일인 월요일에 그라스미어에 머무르게 되어 아쉽게도 직접 가 보지는 못했다. 혹시 그라스미어에 간다면 잔잔한 그라스미어 산책로를 찬찬히 눈에 담은 뒤에, 레이크 디스트릭트를 글로 담은 위대한 시인의 집을 방문하여 자연을 벗삼은 시인의 일상의 풍경을 직접 감상하는 것도 좋은 여행이 될 것 같다.
[런던 빼고 영국 여행] 잉글랜드, 레이크 디스트릭트(Lake District)
영국의 어느 아름다운 숲 속, 낭만적인 호숫가에서... _ 마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