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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를 닮은, '캣벨(Catbells)' 위를 걷다

[런던 빼고 영국여행] 잉글랜드 레이크디스트릭트 캣벨(Catbells)

by 노현지
< 호수와 따라 푸른 능선이 펼쳐진 레이크 디스트릭트 전경 >


가장 높은 산이 약 1km 정도인 레이크 디스트릭트(Lake District)에는 어렵지 않게 등반을 할 수 있는 능선들이 여럿 있다. 아름다운 레이크 디스트릭트 호수를 둘러 구비구비 펼쳐진 푸른 능선들을 보고 있으면 나도 한 번쯤 그 능선 위를 걸어보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대자연 속에서 하이킹을 하기 위해 일부러 걸음하는 곳이 여기, 레이크 디스트릭트였다.

더하여 날씨와 장비, 시간 등 여러 가지 사정으로 바로 직전 여행지 스코틀랜드 하이랜드의 글렌코를 걷지 못하고 떠나온 미련이 마음 끝에서 섭섭하게 대롱거리고 있었기에 두 번째 미련은 쌓고 싶지 않았다.


나와 같은 마음이자, 우리 가족 여행의 총괄 매니저인 남편이 아직은 어린 아이들과 같이 가볍게 등반을 할 만한 곳을 찾았다. 지금까지 주로 둘러본 윈드미어와는 조금 떨어진, 레이크 디스트릭트의 북쪽에 자리한 ‘캣벨(Cat Bells)’. 한때 아생 고양이(Cats)의 은신처(Bields)였다고도 하고, 부드러운 봉우리 모양이 고양이 등을 닮았다고도 하는 캣벨은, 여하튼 이름 덕분에 작고 귀여운 ‘고양이’ 캐릭터를 연상시키며 산의 모습 또한 아담할 것 같은 느낌을 준다.

특히, 영국의 어느 유명한 등산 가이드북 작가가(알프레드 웨인라이트(Alfred Wainwright)라고 한다) ‘할머니와 유아(infants)가 함께 오를 수 있는 곳’이라고 캣벨을 소개한 이후로 많은 가족 단위의 여행객들이 가벼운 등반을 위해 캣벨을 찾는다고 했다.


< 레이크 디스트릭트 북쪽에 자리한 '캣벨' 위치 (출처 : 구글지도) >


귀여운 이름과 만만한 소개말에 완전히 현혹된 우리 가족 또한 초등학생 4학년, 1학년인 두 아이를 앞세우고 캣벨 등반에 올랐다. ‘현혹’이라는 말을 썼으니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의 개인적인 생각으로 캣벨은 할머니와 아이가 함께 오를 수 있는, 그렇게 가볍고 만만한 등반길은 아니었다.


< 우리가 오를 '캣벨'이 저기 있다! >


앞으로 마주칠 길에 어떤 반전이 있을지 모르고 ‘눈누난나’ 리듬감 있는 투스텝으로 뛰어 캣벨 초입에 도 도착했다. 캣벨 위로 오르는 길은 좁았지만 나름 잘 닦여 있었다.


< 캣벨 등산로의 시작점, 이제 등반을 시작합니다~>


그러나 얼마 걷지 않아 생각보다 가파른 경사를 만났고, 엄마 아빠의 ‘가벼운 하이킹’이라는 말만 철석같이 믿고 흔쾌히 캣벨을 오르기 시작한 아이들의 허리가(남편과 나의 허리도!) 점점 아래로 접혀 고꾸라졌다.

예상치 못한 경사보다 더 놀라웠던 것은 등반길 바로 옆의 난간도 없이 가파르게 내려다보이는 비탈. 힘이 들어 허리가 접힌 아이들이 흔들흔들 좁은 길을 걷다가 비탈 아래로 구를까, 아이들뿐 아니라 나도 그럴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걱정으로 눈앞이 아찔하고, 오금이 저렸다.


< 초반부터 가파른 캣벨의 비탈에 당황했다 >
< 등산로 바로 옆으로 보이는 아찔한 비탈 >
< 점점 고꾸라지는 우리의 허리 >


다행히 초반의 경사를 오르고 나니 그런대로 완만한 구간이 나왔다. 그러나 난간이 없는 것은 마찬가지였기에 옆으로 넘어져 산비탈 아래로 구르는 상상을 하지 않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야했다.



완만한 길을 조금 걸어가자 이번엔 큰 돌들이 쌓여 층이 훌쩍 높아지는 구간에 직면했다. 이 구간을 오르기 위해서는 암벽을 타듯 사이사이의 바위와 돌을 잡고, 밟고 올라야 했다. ‘가벼운 등반’에서 손을 쓰게 될 줄이야. 아이들에게 밟아야 하는 돌을 일러주고, 손을 당겨주며 전원 무사히 암벽(?) 구간을 통과했다.


< 멀리서 찍은 암벽(?) 구간, 완만해 보이지만 가까이서 보면 훨씬 가파르다 >


중턱이라 부를 수 있을 곳에 이르자, 그간의 당혹감을 달래주려는지 난간이 없는 것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평평한 구간이 나왔다. 잔디에 앉아 잠시 쉬었다.



산책하듯 가볍게 오를 수 있을 거란 예상과 달리 ‘시험의 길’을 오르느라 보지 못했던 캣벨 주변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레이크 디스트릭트에서 가장 흔한 양들이 풀을 뜯고, 잔잔하게 고인 푸른 호수와 초록의 산은 계속 보아도 계속 감탄이 나왔다. 산에는 밭을 일군 경작지들 간에 구역을 경계 짓는 나무덤불이 한 줄로 가지런히 늘어서 있었는데, 그 풍경이 마치 초록색 조각천(작은 경작지)을 한데 모아 더 진한 초록색 실로 바느질하여 엮어둔 것처럼 보였다. 넓게 엮은 이 초록 이불을 덮으면 싱그럽고 평화로운 꿈만 꿀 수 있지 않을까.


< 캣벨 비탈 곳곳에서 풀을 뜯고 있는 양들 >
< 캣벨 옆 호수, 더웬트워터(Derwentwater) 호수 >
< 초록색 조각이불을 연상시키는 레이크 디스트릭트의 초원 >


캣벨 중턱의 풍경 관람을 마치고 다시 앞으로 걸었다. 초반에는 조금 심술을 부렸지만 지금까지의 고난(?)은 ‘아름다운 보상’을 받기 위해 감내해야 했던 소소한 대가였을 뿐, 앞으로 남은 구간은 진짜 ‘할머니와 유아가 함께 오를 수 있는’ 길을 걸으며 캣벨의 진가를 느끼는 길이 되리라는 희망을 품으며.

나의 이런 희망에는 이유가 있었다. 이제부터 캣벨에서 우리가 걸어갈 길이 내 눈 앞에, 그 마지막 지점까지 온전하게 쭉 이어져 펼쳐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도 아주아주 솜씨 좋은 화가의 손길로 그려 놓은 것 같은 황홀한 모습으로.



나른하게 기지개를 켠 고양기의 등을 연상시키는 아담하고 구불구불 완만한 길이 저 먼 정상을 향해 찬란하게 뻗어 있었다. 이 길을 따라 걸으면 평화와 사랑이 가득한 다른 세계로 들어갈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길 옆으로 경사진 비탈도 더는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었고, 초록의 잔디는 이 길을 걷는 사람들에게 내리는 축복 같았다.

사실 이 캣벨에 오르자고 결심하기 전, 인터넷으로 찾은 블로그 사진을 통해 캣벨에 오르면 이 풍경을 볼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사진 속 풍경이 너무 아름다워 직접 이 캣벨에 올라 눈에 담고 가기로 했던 것. 그러나 아무리 좋은 카메라라도 사진은 절대 사람의 눈으로 직관하는 자연을 이길 수가 없다. (내가 찍어 온 사진도 마찬가지. 실제로 느낀 감동의 반의 반도 담기지 못했다. 그것이 안타깝다.)


한 발, 한 발 앞으로 발을 내딛었다. 길을 걸으면서도 ‘내가 감히 이 아름다운 길 위를 걷고 있다니’, 그런 황송하고 감개무량한 생각이 절로 났다. 너무 과장하는 것처럼 들리겠지만, 이 능선 위에 실제로 서서 대자연에 둘러싸이면 누구라도 이렇게 벅찬 감정을 느끼리라.



이 찬란한 길의 끝까지 갔다가 돌아오는 사람들이 반대편에서 걸어오고 있었다. 점차로 가까워지자 사람들 사이에서 익숙한 소리가 들렸다. 한국어였다. 먼 곳의 깊은 산 속, 조용한 산의 능선 위에서 들리는 한국어가 무척 반가웠다. (내가 살았던 바스(Bath)에는 한국인이 별로 없어서, 그들을 만나기 전까지 한국말을 거의 듣지 못하고 지내는 중이었다.)

우리보다 앞서 캣벨의 ‘평화와 사랑’을 경험하고 오는 한국인 가족은 독일에서 살고 있는 분들로, 영국으로 휴가를 왔다고 했다. 나이 지긋하신 부모님과 다섯살쯤 돼 보이는 아이, 3대가 함께 걷고 있었다. 정말로 ‘할머니와 유아가 함께 오를 수 있는’ 캣벨을 몸소 증명하는 등반이었다.

아름다운 풍경에 감화된 어른들과 달리 이미 지친, 무엇보다 이젠 등산이 지겨운 아이들을 생각하여 한국인 가족 중 아이 아빠에게 저 멀리 정상까지는 얼마나 걸리느냐, 또 남은 길은 보이는 풍경처럼 이렇게 평화로우냐 물었다.


“어후, 아니예요. 저기까지 30~40분은 더 가셔야 될 걸요. 그리고 정상 가까이 가면 경사가 꽤 가팔라져요. 돌을 잡고 기어서 올라가야 해요. 저희도 가볍게 오를 수 있다고 해서 왔는데, 하하, 생각처럼 만만하지가 않네요.”


듣던 것과는 달리 가볍지 않은 캣벨의 사정에 아이를 업고 정상까지 올라갔다 왔다는 아이 아빠의 목소리에는 당황스럽고 억울한 기색이 묻어 있었다. 옆에서 ‘허허’ 웃는 부모님도 우리 아이들을 보며 조심하라고 일러주셨다. 경험자의 생생한 증언에 당황스럽기는 우리도 매한가지. 홀가분하게 내려가는 한국인 가족과 서로 조심하라고, 그리고 남은 여행도 즐겁기를 바라는 인사를 건네고 각자의 방향을 향해 반대로 걸었다.


< 멋있는 건 한 번 더! (어디로 갈지 고민중입니다) >


그 뒤로 우리는 어떻게 했을까? 먼 타국에서 만난 한국 동포의 경험을 타산지석 삼아, 끝까지 오르는 것을 포기하고 그 가족들 뒤를 따라 돌아 내려왔다. 아무리 생각해도 업기에는 크고, 혼자 오르라고 하기에는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끝까지 가는 것은 무리일 것 같았다.

무엇보다 우리가 캣벨에서 보고 싶었던, 캣벨 능선을 따라 길게 뻗은 평화롭고 찬란한 풍경을 이미 보았기에 미련은 없었다. 아, 남편은 정상을 밟지 못했다는 미련이 있었다. 찬란한 이 길을 반대방향에서 바라보면 또 다른 풍경으로 볼 수 있을 거라는 미련도.

그러나 어쩔 수 있나, 나와 아이들 모두 이미 한국인 가족들의 무용담을 들어버린 것을. 정상까지 다녀오면 시간도 꽤 걸릴 테니 차라리 일찍 하산하여 바스로 돌아가기 전(이날이 여행 마지막 날이었다.) 시원한 맥주를 마실 시간을 확보하자는 나의 유혹에 남편도 미련을 털어내고, 온가족이 함께 안전하게 하산하였다.


< 내려오는 길도 그림 같은 캣벨 >
< 쉬어가는 시간, 찬란한 순간 >







마지막 목적지였던 캣벨을 떠나 집으로 가기 위해 레이크 디스트릭트 남쪽으로 향했다. 지나는 길에 마지막 점심을 먹을 적당한 마을을 찾다가 캣벨에서 조금 아래로 내려와 윈드미어 북쪽에 자리한 마을, 엠블사이드(Ambleside)로 들어갔다.

엠블사이드는 꽤 번화한 곳이었다. 레이크 디스트릭트의 중심에 자리하고 있어 여러 트레킹 루트와 연결되기 때문에 여행자들이 주로 찾는 거점 역할을 하는 곳이라고 했다. 기념품 가게나 음식점, 펍들도 많이 있는 마을에는 생기가 넘쳤다.


< 엠블사이드 마을 전경 (출처 : 구글 이미지) >


캣벨 중턱에서 약속한 시원한 맥주를 마시기 위해 펍에 들어갔다. 정상까진 가지 못했으나, 그래도 열심히 등반을 한 뒤에 마시는 맥주가 레이크 디스트릭트의 능선을 직접 밟아보았다는 보람만큼이나 시원하고 맛있었다. 사실 등반을 하지 않아도 레이크 디스트릭트에서 마시는 맥주는 다 맛있었다.


< 생기있고 어여쁜 엠블사이드에서 찍은 유일한 사진, 맥주 (^^;;) >


호수와 나무에 둘러싸인 레이크 디스트릭트는 보통의 일상을 잊고 대자연의 신선함을 느끼게 해 주는 특별한 곳이다. 그리고 내게는 다른 의미로 특별하고 참으로 묘한 곳이었다.

나는 주량이 약한 편이었다. 소싯적에는 맥주 한 잔을 누가 빨리 마시나 내기도 하고, 대학교 앞 술집에서 날이 바뀔 때까지 놀기도 하고, 입사하여 신입 때는 폭탄주도 양주도 마다하지 않고 마셨던 적도 있었지만, 그런 것들은 실제 나의 능력치가 아니라 다 젊은 체력으로 버텼던 것이었다는 걸 점차 나이가 들면서 티가 나게 줄어드는 주량으로 깨달았다. 점점 줄어든 한계는 이제 겨우 맥주 500cc 한 잔. 그 이상을 먹으면 반드시 두통이 왔다.


그런데 레이크 디스트릭트에서는 맥주 한 잔 이상을 마셔도 괜찮았다. 숙소에서 조식을 먹은 후 숲과 호수를 돌아보고 나서 오전에 시원하게 한 잔, 오후 일정을 소화하고 또 나른하게 맥주 한 잔, 그리고 저녁에 숙소에 돌아와 편안한 마음으로 맥주 한 잔, 어쩌다 기분 좋으면 한 잔 더. 이렇게 마셔도 아무 이상이 없었다.


내 잔을 다 비우고, 두 번째 잔을 마시는 남편의 맥주를 호시탐탐 노리며 홀짝 홀짝 빼앗아 마시는 나를 남편이 신기하게 바라보았다. 나는 이 이유에 대해 나름의 진단을 내렸다.


“여봉봉, 레이크 디스트릭트 공기가 진짜 맑고 깨끗한 거 같아. 그래서 술을 마셔도 안 취하고 바로바로 깨나봐!”


< 매일매일 맛있는 맥주를 제공해 준 레이크 디스트릭트의 숙소, Many Thanks! >



주량의 증가로 대기질을 측정하는 나의 황당한 능력에 남편은 박장대소를 했지만, 다른 이유를 찾지 못했으니 남편도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더 놀라운 사실은 나중에 바스로 돌아간 뒤로 나의 주량은 다시 정확히 맥주 한 잔이 되었다는 것. (그 뒤 한국으로 와서는 500cc 보다 더 줄었다! 과학일지도?!)


< 맥주잔을 꼭 쥔 손에서 단단한 행복이 느껴지는가? 하하. >


어느 덧, 잉글랜드 남쪽 바스(Bath)에서 출발해 점차 북쪽으로 점차 전진하여 요크(York)와 안윅(Alnwick)을 거쳐 스코틀랜드(Scotland)와 레이크 디스트릭트로 이어진 긴 여행의 마지막 날이었다. 이 모든 여행길의 운전자이자 일정까지 세세하게 챙긴 남편과 영국의 평온한 숲 속 마을 펍에 앉아, 말이 안되는 말을 진지하고 우습게 나누며 마시는 맥주 달고 달았다. 이 다정한 여행매니저 덕분에 혼자서는 생각도 하지 않았을 캣벨에 올라 찬란하게 아름다운 풍경도 보았다.

캣벨 위의 근사한 풍경을 바라보며 남편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나는 앞으로 우리 가족 앞에 펼쳐질 날들이 이 캣벨 능선 위의 길처럼 구불구불 휘어지기도 하고, 때로 가파르기도 하고, 아주 가끔은 거친 암벽의 순간이 오기도 하겠지만, 그럼에도 오래도록 길게 아름답고 찬란하기를 빌었다.




[런던 빼고 영국 여행] 잉글랜드 레이크디스트릭트 캣벨(Catbells)

고양이를 닮은, ‘캣벨(Catbells)’ 위를 걷다 _ 마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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