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던 빼고 영국 여행] 잉글랜드 콘월 세인트아이브스(St. Ives)
세인트 아이브스(St. Ives)의 바다는
청록 빛이 푸르렀지만 흰 색으로 각인되었다.
파도는 먼 곳에서부터 하얗게 부서진 채로 밀려왔다.
사람들은 그 파도 위에 몸을 실었다.
파도는 언제든 바다로 돌아갔고,
사람들은 또 다시 밀려올 다음 파도를 기다렸다.
바다는 청록과 흰 색 사이에 있었고,
사람들은 파도와 파도 사이에 있었다.
그것 외에는 그것이어야만 하는 것은 없는,
세인트 아이브스는 자유로운 존재들의 낙원이었다...
약 일 년 남짓의 기간 동안 영국에 머물기 위해 우리 가족이 처음 영국에 도착했을 때가 여름이었다.
살 집을 겨우 마련한 뒤, 황금 같은 영국의 여름(영국의 여름 날씨는 정말 최고다!)이 아까워 부랴부랴 떠난 곳이 이 지구에 공룡이 살던 쥬라기 시기 해안선과 독특한 지형으로 유명한 도싯(Dorset) 지방이었다. 도싯이 품은 것들에 비해 기간을 짧게 잡고 떠난 여행이 아쉬워 다음 여름에 꼭 다시 방문하자고 했지만, 섬 나라인 영국에는 유명하고 아름다운 해안 도시가 ‘너~~~~무’ 많았다.
시간이 흘러 다시 온 여름. 우리는 도싯과의 약속을 지키지 못하고, 영국인들이 사랑하는 또 다른 아름다운 해변, '세인트 아이브스(St. Ives)'로 떠났다.
세인트 아이브스는 콘월(Cornwall)에 있는 작은 해안 마을이다. 그럼 콘월은 어디인가?
‘영국사람(English)’이 아닌 ‘콘월사람(Cornish)’
콘월은 잉글랜드 남서쪽 끝에 있는 지역으로, 영국 전체에서 가장 남쪽에 있는 지역이다. 날씨가 따뜻하고 아름다운 해변이 많으며, 특색 있는 지역 문화 때문에 영국인들에게 인기 있는 여름 휴양지다. 우리나라로 치면 제주도 같은 곳이라고 봐도 될 것 같다.
특히, 이 콘월 지역 사람들은 오래전 고대 영국에 가장 먼저 정착한 민족인 ‘브리튼(Britons) 계열 켈트족’의 후손들이 지켜온 땅인 ‘콘월’ 자체에 대한 자부심이 강해서, 행정구역상으로 콘월이 잉글랜드에 속해 있음에도 자신들을 잉글랜드와 구분하여 ‘콘월 사람(Cornish)’이라고 지칭한다고 한다.
이런 배경으로, 큰 영국(The UK)을 구성하는 4개의 구성국(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웨일즈, 북아일랜드)은 대외적으로는 한 나라이면서도 내부적으로는 각 지역의 독자적인 문화와 뿌리가 인정되는데, 콘월 사람들은 콘월 또한 스코틀랜드나 웨일즈처럼 독자적인 지역으로 인정받고자 하는 바람을 담아 문화 부흥 운동을 진행중이다. 콘월과 동일한 조상의 뿌리를 가진 웨일즈가 독자적 구성국의 지위에 있고, 웨일즈 내에서는 웨일즈어를 사용하고 있으니 콘월 입장에서는 자신들의 다른 구성국들처럼 콘월만의 정체성을 되찾고자 하는 마음이 이해도 된다. 콘월인들의 지속적인 노력에 힘입어 2014년, 영국 정부는 공식적으로 콘월인을 ‘소수 민족’으로 인정하였다고.
‘고대 영국’이 나오고, ‘켈트족’이 나오고, 갑자기 웨일즈까지 나오다가 ‘공식 소수 민족’에 이르는 위의 내용이 조금 멀고 복잡하게 느껴질 것이다. 어차피 우리가 콘월 지방의 사람들과 긴밀한 교류를 하러 온 여행도 아니고, 그저 아름다운 콘월의 풍경과 분위기를 즐기다 떠나면 그만이긴 했다. 그럼에도 콘월의 여행기를 풀어놓기 전 콘월의 특별한 사정을 간단하게라도 소개하고 싶었다. 콘월에서 보낸 멋진 시간들에 대한 보답이기도 하고, 무엇보다 ‘진짜 자신’을 찾기를 희망하는 간절한 사람들을 향한 응원의 마음이다. ‘다들 그렇게 사니까’라는 말로 오랜 시간 방치되었다가 뒤늦게 돌아보는 ‘진짜 나의 꿈’을 응원하는 마음 같달까?
이런 콘월의 역사적/문화적 배경 때문에 ‘콘월’은 문학에서 독특한 장치로 쓰이기도 한다. 영국, 혹은 영국인이 나오는 소설 중에 등장인물에 대해 ‘콘월사람’이라는 표현이 쓰이는 경우가 있다. (제목은 기억하지 못하나, 내가 책에서 ‘콘월사람’이란 문구를 목격한 것이 최소 3권 이상은 된다.)
소설 속 ‘그’ 혹은 ‘그녀’가 ‘콘월 사람’이라면 앞서 언급한 콘월의 사정을 떠올려 보길 바란다. 아마도 작가는 그들이 (민족적 정체성을 찾고자 하는 의지에서 발현된) 고집과 주류에 대한 방항심이 있고, 독립적인 성향의 인물로 보여지길 바랄 것이다. 또는 콘월의 바닷바람에 길들여진 거칠고 강인하고 자유로운 영혼의 사람. 혹은 영국의 남서쪽 끝, 땅과 바다의 경계가 주는 신화적이고 신비로운 분위기를 가진 사람으로 보여지길 바랄 수도 있다. 그도 아니면 단순히 콘월이 고향인 어업 종사자일 수도 있고. 하하.
단순하게 보면 그저 영국의 여러 지방 지역들 중 하나인 콘월이지만, 주류 도시들과 멀리 떨어져 지리적으로, 또 문화적으로 고립되고 소외된 세월 속에서 자신만의 특별함을 쌓아왔을 콘월. 그러니 ‘콘월사람’이라는 자부심을 찾아가는 그들을 조금 특별하게 바라봐 주자. 콘월뿐 아니라 그외 자신의 정체성을 찾는 여정에 있는 모든 이들(나도 포함이다. 그리고 당신도 포함이다.)이 끝내 바라는 바에 도달하길 바라는 애틋한 마음을 담아.
어이쿠, 서론이 너무 길었다. 개인적 애틋함이 많이 담긴 사적인 콘월 소개를 마치며 앞으로 풀어낼 콘월 여행기에는, 마치 기억상실 반전드라마처럼 ‘콘월의 진지한 사정’은 콘월 바다의 파도처럼 하얗게 잊고, 아름답고 멋진 풍경에 매혹된 즐겁고 뻔한 이야기가 이어질 예정이다.
20세기 영국 현대 예술가들의 안식처, ‘세인트 아이브스(St. Ives)’
자, 이제 진짜 목적지, 세인트 아이브스(St. Ives)로 가 보자. (어쩐지 멀리 돌아 드디어 도착한 듯한 느낌이다. 하하.)
콘월의 북쪽 해안선의 세인트 아이브스 만(St. Ives Bay)의 서쪽 끝자락에 자리한 세인트 아이브스는 아름다운 해변으로 유명한 콘월의 대표 도시이자, 인기 휴양지이다.
그러나 세인트 아이브스가 지금과 같은 대중적인 휴양지가 된 것은 18~19세기부터 귀족과 상류층의 대표 휴양지였던 브라이튼(Brighton)이나 본머스(Bournemouth) 등에 비해 비교적 근래의 일이다. (그래서 19세기에 쓰여진 상류층의 삶을 소재로한 제인 오스틴의 소설에 브라이튼과 본머스는 나오지만 세인트 아이브스는 안 나온다.)
20세기 전까지 세인트 아이브스는 대대로 작은 어촌 마을이었다. 19세기경 인상파 화가들 중 몇몇이 세인트 아이브스의 눈부신 햇살의 찰나를 화폭에 담기 위해 찾아왔다고는 하나, 세인트 아이브스의 위상에 큰 영향을 미치지는 못했다.
본격적으로 세인트 아이브스가 알려진 것은 20세기 초중반 세계대전을 피해 런던의 예술가들이 세인트 아이브스로 옮겨오면서부터였다. 영국의 현대 예술가들은 세인트 아이브스의 아름다운 자연에 매료되었고, 그들의 작품에 세인트 아이브스를 담았다. 그렇게 대중에 알려진 세인트 아이브스는 이제 아름다운 해변, 멋진 해안 절벽 등의 자연풍광과 함께 예술의 도시로도 유명하다.
나는 세인트 아이브스가 이렇게 근사한 예술의 도시라는 것도, 영국 현대미술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는 것도 모르고 그곳을 찾는 우를 범했다. 그래서 런던 테이트 미술관(Tate Britain)의 분관인 '테이트 세인트 아이브스(Tate Ives)'를 방문하지 못하고 왔다. 더 놀라운 고백은 런던 테이트 미술관조차 못 보고 한국으로 왔다는 것이다. (으악...!) 런던은 집에서 가까우니까 ‘다음에, 다음에’ 하고 미루다 보니, 어느 날 한국으로 돌아올 날짜가 코 앞이라 눈물을 머금고 비행기에 오를 수밖에 없었다(는 슬픈 사연...연...연....).
뒤늦게 세인트 아이브스 여행기를 정리하며 세인트 아이브스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고 나니 세인트 아이브스에게 유명세를 안겨준 기록들을 보지 못하고 온 것이 조금 아쉽다. 하지만 내가 담아온 세인트 아이브스도 충분히 아름다워 여행을 하는 내내 나는 벅차게 행복했다.
하얀 파도가 쉼없이 부서지는, ‘세인트 아이브스 만(St. Ives Bay)’
세인트 아이브스에는 해변이 많다. 세인트 아이브스 도시 안에도 Porthminster Beach, Harbour Beach, Porthmeor Beach(테이트 세인트아이브스 안에서 보이는 해변이 이곳이다!) 등등 도심의 주요 명소와 연결되어 접근이 쉬운 해변들이 여러 곳이고, 주변의 콘월 북쪽 해안, 세인트 아이브스 만(St. Ives Bay)을 따라 해변 옆에 해변, 그 해변 옆에 또 해변이 있다.
이 중 우리가 콘월의 바다색으로 물들기 위해 찾은 해변은 세인트 아이브스 만 동쪽에 넓게 펼쳐진 모래 해변, 토완스(Upton Towans) 해변이었다.
토완스(Towans)는 콘월어로 ‘모래 언덕’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토완스 해변은 정확하게는 세인트 아이브스 만에 있어 세인트 아이브스 해변은 아니지만, 세인트 아이브스도 어차피 세인트 아이브스 만에 속한 도시이니 다 같은 세인트 아이브스 해변이라고 하자. (찡긋)
세인트 아이브스 안에도 몇 군데 있는 해변을 두고, 우리가 이 세인트 아이브스 만의 동쪽 토완스 해변으로 간 이유는 일단 도시를 끼고 형성된 짧은 해변들에 비해 세인트 아이브스 만의 동쪽 해변은 모래 해변이 길게 형성되어 더 넓고 탁 트인 바다를 볼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더 큰 이유는 이 세인트 아이브스 만 동쪽의 해변이 끝나는 지점부터 오른쪽으로 형성되어 있는 해안절벽 언덕인 가드레비 곶(Godrevy Head)을 둘러보기 위해서였다.
긴 세월의 침식작용으로 형성된 가드레비 곶에는 해안선을 따라 걷기 좋은 산책로가 있다. 그 산책로를 걷다 보면 멋진 콘월의 바다 풍경과 시원한 바다 바람을 경험하는 것은 물론이요, 세인트 아이브스 만의 바다를 안전하게 지키며 세인트 아이브스의 대표 풍경이 된 하얀 등대, 가드레비 등대와 가드레비 섬을 볼 수 있다. 청록색 바다, 어두운 바위 섬 위에 오도카니 서 있는 하얀 등대의 풍경이 상반된 색채의 대조로 인상적이기도 하지만, 이 등대는 영국 작가 버지니아 울프(Virginia Woolf)의 소설 <등대로(To the Lighthouse)>에 영감을 준 등대로 알려져 또 한 차례 주목을 받는다.
실제로 어린 시절 여름이면 세인트 아이브스에 머물며 이 등대를 바라보았다는 버지니아 울프 언니처럼 가드레비 등대를 감상하며 해안절벽 산책로를 따라 더 걸어가면, 이번엔 머튼 코브(Mutton Cove)라는 작은 만을 만난다. 가까이 내려갈 수는 없고 위에서만 내려다볼 수 있어 더 깎아지른 느낌으로 남아있는 이 머튼 코브는 야생 회색 물개의 서식지이다. 운이 좋으면 물개들이 코브의 뭍으로 나와 쉬는 모습을 볼 수도 있는데, 아쉽게도 우리는 운이 좋은 편은 아니었다.
머튼 코브 위에서 목이 빠져라 아래를 내려다보며 이게 물개인가? 아님 저게 물개인가? 요리조리 바다와 바위 해변을 살펴보았지만 물개를 만나지 못하고 돌아섰다.
혹시나 물개의 시간표를 잘못 맞추었나 하여 물놀이를 한 뒤에 다시 찾아 갔지만 여전히 물개는 없는 쓸쓸한 머튼 코브. 물개를 볼 수 있다는 소리에 뜨거운 볕도 참으며 씩씩하게 두 번이나 걸음한 아이들의 실망은 아이스크림으로 달래 주었다.
이제 대망의 해수욕 타임!
직접 모래 해변으로 내려가 발을 담근 세인트 아이브스만의 바다는 어땠을까?
세인트 아이브스 만의 토완스 해변은 넓고 완만했다. 멀리까지 뻗은 모래 사장 위로 파도가 하얗게 밀려왔다. 부드러운 듯 거칠게 부서지는 파도였다. 그 파도 위로 사람들이 작은 보드에 몸을 지탱하고 파도를 탔다. 부서지는 파도에 넘어지고도 또 파도를 향해 나아갔다.
서핑을 해 본 적은 단 한번도 없지만 세인트 아이브스만의 해변에서만큼은 지치지 않고 파도를 좇는 서퍼들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내리쬐는 태양아래 저 멀리서부터 밀려오는 파도와 하얀 포말의 바다가 눈부셔서 눈이 멀 것 같았다. 태어나 처음으로 서핑을 배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 저들처럼 자유롭게 이 하얀 파도의 천국을 더욱 뜨겁고 시원하게 즐길 수 있을 것 같았다. 세인트 아이브스 만의 바다는 이름처럼 아름답고 아름다웠다.
나의 이상은 저 멀리 서퍼들과 함께 바다를 넘실거렸지만, 실제 우리 가족의 해수욕은 아주 현실적인 모습이었다. 물놀이용 옷을 입고 아이들과 바닷물 바로 앞에 섰다. 물이 많이 차지는 않을까 뭉그적거리며 모래 위에 고인 물을 찰박거렸다. 그때 깊게 밀려온 파도에 발목까지 바닷물이 닿았다. 너무 놀라 새된 소리를 질렀다.
“아악~~~~~~~~, 차가워!!!!!!!!!!”
물이 정말, 너무, 진짜, 엄청 차가웠다. (확언컨대 지금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차갑다!) 한 여름이고, 영국 내에서는 가장 위도가 낮은 지역인데도, 영국의 바닷물은 한국의 바다에 비해 너무나 차가웠다. 발목을 한번 스치고 나자 본격적으로 물에 들어갈 용기가 나지 않았다.
추위를 덜 타는지, 눈 앞에 바다에 정신이 혼미해진 것인지 아이들은 큰 걸음으로 성큼성큼 뛰어 바다안으로 들어섰다. 아름다운 모습에 비해 꽤 거친 파도에 아이들만 물에 둘 수는 없어 남편과 나도 다시 한번 용기를 냈다. 크게 심호흡을 하고, 처음만 차가운 것이라고 마인트 컨트롤을 하고, 할 수 있다고 결심도 하고, 또 다시 심호흡을 하고 물에 들어갔다. 무릎, 허벅지, 허리.... 그러나 끝내 너무 차가워서 가슴까지는 넣지 못하고 뛰쳐나왔다.
물가에 서서 파도를 따라 뛰는 아이들에게 조심하라고 소리를 지르며 해수욕 대신 일광욕을 했다.
부서지는 물보라를 맞으며 재밌다고 깔깔 웃던 아이들도 곧 입술이 새파랗게 질려 밖으로 나왔다. 몸이 마음을 따라가지 못하는 것은 아이들도 마찬가지.
우리에겐 이렇게 차가운 바다를 영국 사람들은 신기할 만큼 잘 견뎠다. 아니 견디는 것이 아니라 즐겼다. 어른이고 아이고 너무 잘 놀아서, 이들은 추위를 타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생각해보면 꼭 바다가 아니라도 대체로 우리보다는 추위를 덜 타는 것 같긴 했다. 2월의 어느 볕이 좋던 날 반팔을 입고 다니는 몇몇의 동네 사람들을 보고 꽤 충격을 받았던 기억이 있다. 그때 나의 옷은 안감에 두꺼운 털이 가득한 한겨울용 후드집업. 우리나라의 혹한의 겨울 추위에서는 어떨지 모르겠으나(해양성 기후인 영국의 대부분의 지역에서는 우리나라 같은 한파는 없다), 영국의 기온이 전반적으로 서늘해서인지 이 서늘한 기온대에서는 추위를 별로 타지 않는 영국인들이었다.
얼마나 벼르고 온 콘월의 해변인데, 이렇게 쉽게 물러서기는 아쉬워 모래사장 위에 앉아 모래놀이를 했다. 바닷물에 차가워진 몸을 모래의 뜨거운 열기가 데워주었다.
모래사장 끝에는 해안 절벽이 있었다. 세인트 아이브스 만에 밀물이 들어오면 이 절벽까지 와 닿는다. 모래 위에 앉아 올려다보는 해안 절벽은 자연이 빚은 조각 작품이라 할만큼 절경이었다. 절벽의 노란 빛 옆으로 하늘이 진한 파랑을 칠했다. 강렬함이 한층 뜨거워졌다.
그러다 태양 볕에 몸이 꽤 뜨거워지면 이번엔 바다에 들어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용기가 생겼다. 그러나 번번이 실패. 그나마 아이들은 몇 번씩 물장구라도 쳤으나, 나는 바다의 차가움을 자꾸 잊는 스스로를 원망하며 모래사장으로 돌아왔다.
나와는 다른 체온을 가진 해변의 사람들은 여전히 파도를 즐기고 있었다. 세인트 아이브스 만에도 서핑하는 사람들이 많고 충분히 파도가 좋았지만, 이곳에서 조금 더 북동쪽으로 가면 진짜 서퍼들의 세상이 펼쳐지는 해변이 있다고 했다.
대서양의 너울이 다른 지형에 막히지 않고 바로 밀려와 더욱 거센 포말이 부서지는 뉴키(Newquay). 세계적인 서핑 대회가 열리기도 하는 뉴키에 비하면 세인트 아이브스는 초보 단계의 서핑을 하는 수준이라고 했다. 세인트 아이브스의 파도도 이렇게 멋진데 뉴키의 파도는 얼마나 더 근사할까.
대자연의 거친 본성을 직접 눈으로 보고 싶어서 세인트 아이브스를 떠나는 길에 뉴키에도 잠시 들렀었다. 그러나 너무 여름의 한가운데, 서핑의 계절이었던지라 해변 인근을 몇 바퀴나 돌아도 도저히 주차를 할 수가 없어 뉴키 땅을 밟아 보지도 못하고 뉴키를 떠났다. 뉴키의 파도 대신 그곳의 인파만 확인하고 떠나온 뉴키의 대표 해변, Fistral Beach 사진으로 그 거친 파도의 느낌을 대신해본다.
잠시 옆길로 샜다. 그 사이 세인트 아이브스만에는 밀물이 차올랐다. 저만치 있던 바다가 어느새 우리의 본진 근처까지 밀려와, 서둘러 짐을 챙겼음에도 모래사장을 걸어 해변 위쪽길로 오르는 바위 계단을 밟을 때쯤엔 바닷물이 발 밑에서 철썩거렸다. 밀물이 들어오는 마지막 순간이 그렇게 찰나일 줄이야.
바닷물을 피해 간신히 해변 위쪽으로 오른 남편과 나는 애들까지 데리고 하마터면 큰일 날 뻔 했다고 가슴을 쓸어 내렸다.
세인트 아이브스 만에서의 해수욕을 마무리하고, 가드레비 등대를 바라보며 차를 주차해둔 주차장으로 걸었다. 해안선 너머로 넘실대는 밀물이 가득 찬 바다는 더욱 짙은 청록색을 띄었고, 멀리 보이는 하얀 등대 또한 더욱 짙게 고독해졌다.
여행지의 유쾌한 설렘이 있는 도시, 세인트 아이브스
앞서 말했듯 비록 세인트 아이브스의 예술적인 면모는 제대로 보지 못했지만, 세인트 아이브스의 발랄하고 유쾌한 매력은 도심 어디서나 흘러 넘쳤다.
세인트 아이브스의 중심 거리는 세인트 아이브스 항구 앞길과 뒤편 골목 등 항구 주변으로 형성되어 있다. 항구 옆으로 음식점과 기념품 샵, 그리고 예술의 도시답게 예술작품들을 파는 가게들이 있었다(여행 당시에는 왜 이렇게 예술 작품을 파는 가게들이 많은지 잘 몰랐다. 예쁜 도시라서 예쁜 것들을 파는 것 인줄만 알았다. 하하.).
원래도 어여쁜 모습의 가게에 어여쁜 물건들이 진열되어 있으니 거리가 한층 다정하고 예쁘게 보였다. 그 거리를 거니는 소란하고 북적이는 사람들. 여름 휴가를 떠나온 사람들의 얼굴에는 웃음과 즐거움이 가득했다. 사람들의 밝은 에너지로 세인트 아이브스는 또 한층 설레고 유쾌해졌다.
또 한 가지 세인트 아이브스의 항구 주변 중심 거리를 유쾌하게 만드는 이색적인 요소가 있었다. 보통 항구 주변에는 음식점과 상가들이 형성되는 경우는 흔하다. 자연스럽게 항구 주변 거리에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것도 당연한 일.
그런데 그 중심 거리 바로 옆, 그러니까 사람들이 북적거리며 음식을 먹거나 쇼핑을 하는 공간 바로 옆에서, 그것도 배가 둥둥 떠 있는 바다에서 사람들이 물놀이는 하는 풍경은 흔치 않을 것이다. 여기 세인트 아이브스에는 항구 바로 앞에 작은 해변 ‘하버 비치(Harbour Beach)’가 있고, 밀물이 차오르면 이곳에서 사람들이 물놀이를 한다. 우리가 세인트 아이브스 중심 거리로 갔을 때가 마침 밀물이 들어온 때라 상점 거리 바로 옆 항구의 바다에서 사람들이 물놀이를 하는 모습을 보았다.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한반도 출신인 우리에게(심지어 고향이 부산!) 사실 항구란 그리 낯설지 않은 풍경인데, 이렇게 항구와 해변과 휴양지의 중심거리가 한 장면 안에서 화합된 경우는 처음이라 퍽 이질적이고도 재밌게 다가왔다.
저녁을 먹기 위해 들어간 해산물 가게의 2층 창가 자리에서는 열린 창문을 통해 세인트 아이브스 항구와 하버 비치가 더욱 근사하게 내려다보였다. 가게 앞에 세워진 메뉴판을 보다가 손질된 크랩 메뉴가 있어서 들어간 가게였는데, 게 딱지 안에 곱게 바른 게살이 담겨 있어 먹기는 편했으나 차갑게 식은 상태로 제공되었다. 마트 냉장 칸의 식은 크랩 살이 아니라 음식점에서 바로 조리해주는 따뜻한 크랩을 기대했기에 조금 실망했으나 이것이 콘월의 크랩 먹는 방식이려니 여기며 맥주와 함께 싹싹 맛나게 먹었다.
식사를 마치고 나온 거리에는 조금씩 어둠이 깔리고 있었다. 낮에는 사람이 많아 접근하기도 쉽지 않았던 항구 가까이 다가가 바다도 내려다보고 기념 사진도 촬영했다.
날씨가 맑은 날의 저물 녘이라면 세인트 아이브스에서 기념 사진을 남겨야 하는 장면이 또 하나 있다. 바로 일몰.
세인트 아이브스만의 해변과 중심가를 누비며 보낸 유쾌하고 알찬 하루를 마무리하고 숙소로 돌아가는 길, 세인트 아이브스의 하늘이 짙은 주홍 빛으로 붉게 물들고 있었다. 잉글랜드의 서쪽에 있는 세인트 아이브스는 일몰을 감상하기에 좋은 곳으로 손에 꼽힌다. 특히 대서양을 정서쪽으로 바라보는 ‘포스미어 비치(Porthmeor Beach, 테이트 미술관이 있는 그곳이다.)’는 대서양으로 떨어지는 해를 볼 수 있어서 가장 많은 사람들이 모이는 곳.
너무나 운이 좋게도 우리는 우연히 이 일몰의 순간에 포스미어 비치가 내려다보이는 도로를 지나고 있었다. (아마도 낮에 야생 회색 물개를 보지 못한 운이 일몰의 순간에 와 준 것 같다.) 일몰을 좇아 일부러 장소와 때를 맞춰 찾아간 것이 아니었기에 우리 차가 서 있는 도로가 포스미어 비치 근처인지도 모르고 있었는데, 도로에 있는 사람들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차에서 내려 어딘가를 향해 사진을 찍고 있는 사람들. 자연스럽게 사람들을 따라 돌린 우리의 시선에 들어온 것은 주홍빛으로 붉게 물든 황홀한 하늘이었다. 온 가족의 입에서 감탄이 터져나왔다. 마침 경차 한 대를 세울 수 있는 공간이 보여 서둘러 갓길에 차를 세우고(이 또한 얼마나 행운인지!), 우리도 차에서 내려 세인트 아이브스의 일몰을 감상했다.
바다에 걸린 해는 어디서 봐도 아름답지만, 또 이국의 바다에서 맞이하는, 특히나 세인트 아이브스는 우리의 이국 생활 중에서도 또 먼 여행을 떠나와서 만난 도시이자, 지금까지 여행을 다닌 영국의 다른 도시들, 오래된 역사의 흔적이 남은 고풍스럽고 웅장한 도시들과는 또 다른 느낌의 정겹고 생동감 넘치는 모습이라 그 순간이 더욱 달뜬 설렘으로 다가왔다.
영국에서 보내는 두 번째이자 마지막 여름, 콘월에서 마신 자유롭고 청량한 그 여름의 공기를 나는 오래오래 잊지 못할 것을 알았다.
[런던 빼고 영국 여행] 잉글랜드 콘월 세인트아이브스
자유로운 존재들의 낙원, 세인트 아이브스 _ 마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