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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글랜드의 ‘끝’을 향해, LAND’s END

[런던 빼고 영국 여행] 영국 잉글랜드 콘월

by 노현지



한창 바쁘게 돌아가던 이 광산 작업장이 꿈꾸었을 미래와는 다른 모습이겠지만, 용도가 소멸한 해안도로의 유산은 누군가에겐 역사로 남고, 누군가에겐 추억으로 남았다.

잉글랜드의 남서쪽 끝에 자리한 콘월은 영국 지도 전체를 펴 놓고 보면 대서양을 향해 발을 쭉 뻗고 있는 형상이다. 대양을 제일 먼저 만나기 위해 쭉 뻗은 잉글랜드의 발끝, 아일랜드에 붙어있는 북아일랜드를 제외하면 영국 전체에서 가장 먼저 대서양과 닿는 곳, 콘월에서도 가장 서쪽 끝에, ‘Land’s End’가 있다. (물론 동쪽과 남쪽 끝도 있다. 그렇지만 그쪽으로는 좁은 바다를 두고 유럽 대륙이 이어지기 때문에, 대서양과 맞닿는 최서단 ‘Land’s End’가 주는 ‘땅 끝’의 상징성만큼 특별하게 여겨지지는 않는다.)


< 영국 잉글랜드 최서단, 'Land's End' 위치 (출처 : 구글 지도) >
< 세인트 아이브스에서 해안도로를 타고 서쪽으로 달리면 나오는 Land's End (출처 : 구글 지도) >


콘월의 북쪽 해안에 있는 세인트 아이브스(St. Ives)에서 해안도로를 타고 서쪽으로, 잉글랜드의 끝을 향해 달렸다. 말할 수 없이 짙게 청명한 파란 하늘과 하늘색만큼 푸른 바다가 해안도로 너머에서 우리와 함께 달렸다.


< Land's End를 향해 해안 도로를 달리는 중 >


도로와 바다 사이는 초록의 영역이었다. 해안가 언덕이라고 불러야 할 테지만, 도로에서 해안선을 향해 아래로 떨어지는 지형이라 전혀 해안 풍경을 가리지 않았다. 오히려 바닷바람에 키가 아주 작은 풀이 덮인 언덕이 파랗고, 또 파란 ‘청청패션’ 같은 자칫 단조로울 수 있는 풍경을 초록빛으로 변주하며 생동감을 주었다.

(스코틀랜드 여행 편에서 설명했듯) 영국에서 구입한 중고차의 에어컨 성능이 변변치 않아 창문을 열고 달려야 했는데, 덕분에 해안 풍경에 눈이, 바람소리에 귀가, 머리카락을 흐트리며 밀려드는 바람에 가슴까지 시원해졌다.


< 내리막 도로에서는 바다가 더 잘 보인다 >
< 에어컨 대신 열어 둔 창문으로 부는 바람이 시원했다 >


뜬금없이 들리겠지만, 이 콘월의 해안도로 풍경을 다시 보고 있자니 ‘오마이걸(OH MY GIRL)’이 떠오른다. ‘갑자기 오마이걸? 우리나라 걸그룹 오마이걸?’ 이라고 묻고 싶을 것이다. 맞다, 그 오마이걸.

바다 풍경이라는 것이 봐도 봐도 좋고, 모퉁이를 돌면 또 감탄이 나오지만, 한편으론 단순하기도 하다. 또 차를 타고 이동하는 시간이 꽤 길었던 지라 이때 차 안에서 음악을 정말 쉼없이 들었는데, 풍경이 단조롭다보니 주의를 끄는 것이 별로 없어 귀로 모든 신경이 집중되었나 보다. 가끔 꺼내보는 우리의 콘월 여행 추억에서 이때 들은 음악이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는 걸 알았다.

그때가 마침 아이들이 K-Pop에 눈을 뜨던 시기(그전까진 대중가요를 잘 듣지 않았다), 특히 당시 한 예능에서 두각을 보이던 ‘미미’ 덕분에 오마이걸의 노래를 찾아 들어보게 되었고, 상큼한 노래가 여름과 잘 어울려서 우리는 여행 내내 ‘Dolphin’, ‘Dun Dun Dance’, ‘살짝 설렜어’ 등을 엄청나게 돌려 들으며 따라 불렀다. (땡스 투 오마이걸! 샤라웃 투 미미!!)

그 영향으로 아직도 오마이걸의 노래가 들리면 우리 가족은 콘월의 추억을 꺼내보고, 콘월을 떠올리면 미지근한 콘월의 공기 사이로 상큼하게 울려퍼지던 ‘Dolphin’이 생각난다.

‘닷닷닷닷 닷닷닷닷닷닷 닷닷닷닷 또 물보라를 일으켜~’


< 콘월 해안도로 위 상큼발랄한 친구가 되어준 '오마이걸'의 노래 >


창밖의 풍경과 음악을 감상하며 한참을 달리는 중이었다. 도로 오른편에 석조로 된 폐구조물이 보였다. 구조물 앞 주차장에 주차된 몇 대의 차들도 보였다.

“저게 뭐지? 구경하고 가자.”


< 호기심을 자극하는 해안도로가 폐구조물 >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주차장이 마련되어 있고, 다른 차들이 있는 것으로 미루어 특별한 의미가 있는 곳이리라 짐작한 남편이 차를 세웠다. 잠시 쉬어 갈 타임이기도 했고, 빠르게 지나치기만 한 해안선을 차에서 내려 찬찬히 감상할 수 있을 것 같아 나도 흔쾌히 동의했다. 안전벨트에서 풀려난 아이들도 신이 나서 잔디 위로 돌격했다. 자동차로 하는 여유있는 자유여행은 이런 즉흥성이 좋다.


< 차에서 내려 가까이에서 본 폐구조물 >


폐허 같은 모습의 구조물을 요리조리 살펴보았지만 무슨 용도의 건물이었는지 끝내 알 수 없었다. ‘성’이라 치기엔 너무 규모가 작았고, 해안선을 지키는 경비초서인가 했지만 그러기에도 뭔가 썩 맞아떨어지지 않아 보였다. 막상 멈추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엄청나게 궁금한 것도 아니어서 검색을 할 생각은 하지 못했다. 석조 구조물 사이로 보이는 바다와 하늘, 또 구조물 위에 서서 바라보는 해안선이 무척 아름다워 다른 생각을 할 겨를이 없었기 때문이다.


< 폐구조물 너머로 보이는 바다뷰가 무척 시원하고 근사했다 >


건물 주변 깊숙한 곳까지 둘러보러 간 남편이 안내판을 발견했다. 이 곳은 ‘Carn Galver Engine House’로, 19세기 후반 광산과 관련하여 배수와 수송 등에 필요한 기계 장비를 가동했던 작업장이었다.



손상된 안내판(과 빽빽한 영어설명)을 대신해 검색 찬스로 조금 더 찾아본 바, 18~19세기 콘월 북서부 해안 지역은 어업 외에 광업 또한 주요한 산업이었는데, 특히 콘월은 전세계적으로 구리와 주석의 주요 채굴지로써 산업혁명 시대에 큰 역할을 했고, 발달된 광업 기술을 활용한 지역이었다. 우리가 호기심에 잠시 멈춰 둘러보고 있는 이곳 ‘Carn Galver Engine House’를 포함해, 다양한 광산과 광업 관련 구조물들이 곳곳에 남아 있는 콘월 북서부 해안지대는 ‘St Just Mining District’로 지정되어, 콘월의 광업 역사와 기술 발전을 보여주는 중요한 유산으로써 내셔널 트러스트에 의해 관리‧보존되고 있다고 한다. 잠깐의 호기심 덕분에 콘월의 중요한 역사 한 부분을 배웠다.


< 콘월의 광업 역사가 남아 있는 'St Just Mining District' 지도 (출처 : cornishmining.org.uk >



다시 건물을 바라보았다. 이젠 굴뚝이 보인다. 검회색 석조 구조물이 더욱 까맣게 느껴졌다. 폐광 구조물과 파란 해안 풍경이 극명한 채도로 서로를 돋운다. 세월에 무너져가는 건물이 처연하면서도 어쩐지 아름답게 느껴지기도 하여 이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었다. 꽤 근사한 사진이 나왔다. 실제로 해안 풍경을 배경으로 폐광 건축물을 찍기 위해 출사를 오는 이들도 많다고 한다.

한창 바쁘게 돌아가던 시절의 이 광산 작업장이 꿈꾸었을 미래와는 다른 모습이겠으나, 용도가 소멸한 해안도로의 유산은 누군가에겐 역사로, 누군가에겐 예술로, 또 누군가에겐 추억으로 남을 것이다.


< 한 장의 작품이자 추억으로 남은 콘월의 역사 한 조각, 폐광 작업장 >






다시 서쪽으로 달렸다. ‘Land’s End’ 방향을 가리키는 안내판이 보였다. 잉글랜드의 서쪽 땅 끝에 가까워지고 있다.



도로 끝과 맞닿아 이어지는 바다와 반듯하게 깎인 비석이 반겨주는 ‘Land’s End’에 도착!


< Welcome to Land's End >


영국의 가장 서쪽 끝이라는 상징적 의미를 가진 ‘Land’s End’는 단순히 바다, 혹은 해안선만 있는 것이 아니라, 주변이 감성 가득한 예쁜 지붕의 건물들로 꾸며진 테마 파크 혹은 유원지 분위기의 특별한 공간 같았다. 마치 한국의 대도시 외곽에 지어진 이국적인 아울렛 같은 느낌이 나기도 했는데, 파란 하늘과 그 아래 펄럭이는 알록달록 가랜드 덕분에 ‘Land’s End’의 문을 지나 발을 딛는 순간부터 마음이 물방울처럼 동글동글 즐겁고 설렜다.

테마 파크나 외곽 아울렛에 비유했지만 느낌이 그렇다는 것일 뿐, 그리 넓지 않고 아담한 규모의 ‘서쪽 땅 끝 테마 파크’에는 기념품 샵, 카페, 음식점, 옷가게 등이 있었고, 아이들이 체험을 할 수 있는 몇 개의 오락공간과 놀이터 등도 마련되어 있었다.


< 알록달록한 가랜드 덕분에 더욱 설레는 Land's End >


< 기념품 샵에서 만날 수 있는 콘월적인 소품들. 폐광 작업장이 있는 그림이 반갑다. >


예쁜 건물들 사이를 지나 뒤편으로 나오면 바다까지 이어지는 긴 산책로가 나온다. 그 길을 걸어 끝까지 가면, 진짜 ‘Land’s End’가 있다.

알록달록 예쁜 별천지 같은 공간도 좋았지만, 이 해안선 산책로가 참 좋았다. 특히, 멀리 해안가 언덕 위에 세워진 하얀 건물이 인상적이었는데, 짙은 청록색 바다의 선명함, 바위와 키 작은 풀들이 엉켜 만들어내는 황량함, 그 위에 단아하게 놓인 하얀 집, 이 세 가지가 빚어내는 아득한 풍경이 ‘Land’s End’라는 단어 그 자체인 듯 눈을 가득 채웠다.

< 'Land's End'라는 말과 꼭 닮은 해안선 산책로 풍경 >


어쩐지 자꾸만 ‘세상의 끝’으로 번역되는 풍경을 밟으며 해안선 끝까지 닿았다.


< 여기가 'Land's End'임을 알리는 기둥 >


위도와 경도라는 것으로 지구의 모든 영역을 수치화하는 지리체계에 따르면 잉글랜드의 가장 서쪽 끝이 되는 정확한 지점이 있게 마련이다. 바로 그 지점이 아래 사진에 있는, 바다로 뾰족하게 뻗은 바위다.

하지만 안전을 위해 보통의 여행객들은 바닷물이 찰랑이는 끝 지점까지 내려가지는 못하고, 해안선 언덕 위에 쳐진 경계 로프 안쪽에서 ‘Land’s End’ 지점을 바라봐야 한다.


< 진짜 'Land's End' 지점 >


바닷바람을 맞으며 푸른 바다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아무것도 가릴 것 없는 바다에 가슴이 시원했다. 이 바다에서 쭉 앞으로 나아가면 대서양. 대양을 바라본다는 것은, 어차피 바닷물이란 것이 돌고 도는 것임에도, 웅장하게 느껴졌다.


< 탁 트인 대양에 가슴까지 시원해졌다 >


그때, 바다 중간에서 작고 하얀 물보라와 함께 검은 무엇인가가 순간적으로 솟았다 사라졌다.

“어? 돌고래?”

연이어 또 다른 물보라가 일었다. 또 한 번, 또 한 번.

“와~~ 돌고래다!!”

돌고래 무리가 (그들 입장에서) ‘바다 끝 지점’에 모인 사람들 구경을 나왔나 보다.

돌고래의 등장에 사람들이 부산해졌다. 다들 손가락을 바다를 향해 내밀며 함께 온 사람들에게 알리거나 사진을 찍었다. 멀어서 자세히 보이지도 않는 돌고래였지만, 바다 위로 등지느러미를 내밀고 헤엄치는 돌고래는 언제 봐도 반가움이고, 설렘이고, 좋은 운(Lucky)이 되어준다. 그리고 우리 가족은 돌고래가 물보라를 일으키며 노는 바다를 향해 노래를 흥얼거렸다.

“닷닷닷닷 닷닷닷닷닷닷 닷닷닷닷 또 물보라를 일으켜~”


< 돌고래를 만나는 행운까지 얻은 잉글랜드의 끝 >


돌고래의 짧은 나들이가 끝나고, 바다는 곧 다시 잠잠해졌다. 우리도 발길을 돌려 돌고래 이전에 나의 눈을 사로잡은 해안선 끝의 ‘하얀 집’으로 향했다.



가까이 다가가자 하얀 외벽에 붉은 간판으로 적힌 집의 이름이 눈에 들어왔다.

‘First and Last Refreshment House In England’


< 잉글랜드의 첫, 그리고 마지막 쉼터 >


잉글랜드의 첫, 그리고 마지막 쉼터. 이름을 보는 순간, 작은 깨달음으로 뭉클해졌다.

아침부터 잉글랜드의 서쪽 끝을 향해 열심히 달려온 이곳은 반대편에서 바라보면 시작이기도 했다. 끝은 시작과 맞닿아 있다. ‘마지막 순간’은 보통 완성, 결실의 이미지로 이어지지만 때로 포기, 혹은 체념의 감정에 가까울 때도 있다. 어떤 상황에서는 이별, 단절의 슬픔일 수도 있고. 그러나 그것들의 반대편에는 ‘시작’이 있다. 희망이 있고, 재도전이 있고, (기다림이 동반되겠지만) 다시 만날 기약이 있다. 잉글랜드의 ‘Land’s End’에서 마지막 쉼터이자, 가장 첫 쉼터로 스스로를 소개하는 이 하얀 집처럼.

이미 너무 잘 알고, 많이 들어온 격언 같은 말이지만, 또 쉽게 잊고마는 삶의 지혜가 여기 잉글랜드의 끝에서, 장소가 주는 상징과 숨막히는 풍경, 여행이 주는 포용력과 뒤섞여 내안에서 긴 여울을 돌며 맴돌았다.


< '마지막'의 반대편에서 희망을 품고 기다리는 '시작' >


나는 이렇게 이 ‘하얀 집’을 간직해도 충분하지만, 작은 것에도 쉽게 감동하는 나의 성격 탓에 ‘First and Last Refreshment House In England’에 너무 큰 의미를 부여한 것 같아 조금 부연설명을 남긴다. 이곳은 아이스크림이나 간단한 먹을 것을 파는 휴게 공간이다.

이곳에서 잉글랜드의 서쪽 끝 지점과 대서양을 바라보며 아이스크림을 먹는 것도 운치 있는 경험일 것 같지만, 아까 ‘작은 테마 파크’에서 봐둔 아이스크림 가게의 아이스크림이 더욱 맛있어 보인다는 아이들의 반대의견이 있었기에 이 하얀 집에서는 지혜의 울림만 받는 것으로 마무리하기로 했다. 더 맛있는 아이스크림의 첫 입을 향하여, 그리고 앞으로 남은 콘월 여행을 계속 이어가기 위하여 ‘Land’s End’를 뒤로하고 출발했다. 역시, 마지막은 시작과 맞닿아 있다.


< 'Land's End' 여행을 뒤로하고 새로운 여행을 향해 >



[런던 빼고 영국 여행] 영국 잉글랜드 콘월

잉글랜드의 ‘끝’을 향해, LAND’s END _ 마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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