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던 빼고 영국 여행] 영국 웨일즈 남부 펨브룩셔 ②
우리가 ‘텐비(Tenby)’로 들어간 것은 우연이었다.
웨일즈 남부 해안의 천연 아치 ‘처치 도어 코브(Church Doors Cove)’에서 가까운 도시, 마침 점심을 해결해야 할 시간, 우리는 도로 표지판에서 ‘텐비’라는 글씨를 보고 빨려들 듯 텐비로 들어갔다. 바다와 해안 언덕에서 웨일즈의 자연 풍경을 잘 감상했으니 도시 풍경도 한 번 경험하는 게 좋겠다는 정도의 소망이 있었던 것 같기도 하다. 우리나라 신발 브랜드 ‘텐디(Tendy)’랑 이름이 비슷해서 헷갈린다는 시답잖은 말이나 하며 우연히 들어간 곳이 ‘텐비’였다는 점에서 우리는 무척 촉이 좋았거나, 운이 좋았다.
텐비는 웨일즈에서 가장 유명하고 방문객이 많은 해안 휴양 도시 중 하나다. 웨일즈뿐 아니라 영국 전체를 기준으로 놓고 볼 때도 여러 여행 가이드북이나 웹사이트, 관광 블로그에서 ‘영국 내 최고의 해변 휴양지 Top 어쩌고’나 ‘웨일즈에서 꼭 가봐야 할 장소’ 등으로 자주 소개되는 곳이 텐비다. 이것은 텐비 주차장을 여러 곳 배회하면서 도시 분위기를 본 뒤, 보통 도시가 아님을 깨닫고서 배우고 익힌 정보다. 하하하....;;;
텐비는 일단 구도심을 둘러싼 성벽(Tenby Town Walls)이 시선을 압도했다. 해안 휴양 도시라더니 이렇게 견고한 성벽이 지키고 있을 줄이야. 바로 보여주기 너무나 아까운 엄청난 것들을 이 성벽 뒤에 숨기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기대감이 솟았다.
실제로 이 성벽 뒤에 텐비 구도심과 해변이 있는 것도 맞고, 각각 무척 근사한 뷰를 가진 것도 맞지만, 텐비 성벽은 한편으론 처절한 웨일즈 역사의 흔적이었다. 이 성벽은 11세기 프랑스 노르망디에서 올라온 노르만족이 잉글랜드를 차지한 뒤 웨일즈로 세력을 넓혀가는 중에 웨일즈 남부 지역을 정복하고 지은 것이었다. 성벽 안쪽 해변으로 가면 성벽과 함께 지은 텐비 성(Tenby Castle)도 있다.
웨일즈 민족의 역사 측면에서는 비통한 유적이지만, 이런 정복의 역사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웨일즈어를 지키며 웨일즈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이어가고 있다는 자부심을 가진 웨일즈인들은 이것 또한 자신들의 역사로 수용하고 소중한 유적으로 여긴다고 한다. 특히, 이 높고 무거운 성벽과 성벽을 지나면 펼쳐지는 화사하고 밝은 해변 풍경이 서로 대비되어 텐비의 매력을 훨씬 드라마틱하게 만들어 주기 때문에, 과거의 역사는 역사고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또 다른 의미로 소중하게 여길 수밖에 없을 것 같기도 하다.
이쯤 되면 성벽 안쪽에 뭐가 있는지 무척 궁금할 것이다.
성벽 안쪽은 중세시대 때 형성된 텐비의 구도심으로, 그때부터 지금까지 시대에 따라 지속적으로 모습을 바꾸어 가며 텐비의 중심 상점 거리 역할을 하고 있는 곳이다.
단조롭고 무거운 분위기의 성벽 너머의 구도심 거리는 텐비를 찾은 많은 여행객들로 생동감 있고, 경쾌한 느낌이었다. 앞서 방문했던 화이트샌드 해변 주변이 너무 한산하여 나도 모르게 텐비도 소박한 느낌일 것이라 생각했는지 예상했던 것보다 여러 갈래로 뻗은 번화한 상점 거리에 꽤 놀랐다.
성벽이 축조된 후 중세시대 내내 도시의 중심지 역할을 했기에 긴 역사가 쌓여 있지만, 텐비의 현재 구도심의 모습은 19세기 빅토리아 시대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
교통 기술의 발달과 여러 가지 문화적 요인으로 인해 빅토리아 시대에 영국 곳곳의 많은 해안 도시가 휴양지로 개발되었는데 텐비 또한 그 시기에 웨일즈의 대표 해변 휴양지로 급부상했다. 이 시대 흐름에 맞춰 텐비 구도심도 본격적으로 여행객들을 대상으로 하는 관광, 상업 거리로 전화되었고, 지금까지도 그 기능을 유지하며 많은 여행객들에게 편의 시설과 맛있는 음식들을 제공하고 있다.
텐비에는 구도심 거리 곳곳에 녹아 있는 빅토리아 시대의 영향 중에서도 가장 인상적인 모습으로 여행객들을 반기는 파스텔색 풍경이 있다. 나 또한 텐비 해변에서 이 풍경을 보고 반해서, 아이들 손에 아이스크림을 쥐어주고 파스텔빛 풍경을 사진으로 담기 위해 홀연히 길을 떠나기도 했는데, 일단 이 파스텔색 풍경을 보려면 해변으로 가야 한다.
텐비에는 대표 해변이 세 군데 있는데 그중 가장 대표적이며 가장 많은 사람들이 찾는 곳이 ‘노스비치(North Beach)’다.
웨일즈 대표 휴양 도시의 대표 해변에는 전날 우리가 찾았던 화이트샌드 해변에 비해 사람이 많았다. 화이트샌드 해변에 사람이 별로 없었던 이유가 이곳에 다 몰렸기 때문인가 보다. 우리에게 웨일즈에서 해수욕하기 좋은 곳으로 인기 휴양지 텐비가 아닌 화이트샌드를 추천해준 영국인은 정말 자연을 사랑하거나, 사람들이 많은 곳을 싫어하거나, 사람이 비교적 적어 해수욕하기에 진짜 좋은 곳을 추천했음이 분명할 듯하다. 하하하.
콘월 지역도 그렇지만 웨일즈 역시 조수간만의 차가 큰 것이 특징인데, 텐비의 노스비치도 밀물과 썰물 때 완전히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특히 노스비치에는 사람들이 해수욕을 즐기는 해변과 나란히 ‘텐비 항구(Tenby Harbour)’가 있다. 소형 항구에 속하는 텐비 항구에는 주로 낚싯배나 요트 등 소형선박이 정박하는데, 썰물 시간이 되어도 다른 곳으로 피항하지 않고 그 자리에 그대로 머문다.
마침내 썰물이 빠져나가면 항구의 바닥이 드러나고, 항구에 정박하고 있던 작은 배들은 서서히 진흙 바닥으로 내려 앉는다. 소형 항구 중에서는 비교적 큰 규모의 텐비 항구에는 한두 척이 아니라, 수십 척의 배가 썰물 때마다 바다 위에서 끊임없이 흔들릴 자신의 운명을 거스르고 바닥에 내려앉아 오도카니 생각에 잠긴다. 바닥이 드러난 텐비 해변의 이 낯설고 고요한 선박들의 정적인 시간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텐비로 모여들어 사진과 그림 등에 담는다고 한다.
<참고 사진>
우리가 텐비의 해변을 방문했던 시간이 운이 좋게도 마침 썰물 때. 텐비 해변 모래사장으로 내려가지는 않고, 해변 끝 도로 가에 서서 바라보는 텐비 노스비치 해변은 바닷물이 멀리 빠져나간 뒤의 ‘빈 시간’을 보여주었다. 우연히 들러 이렇게 텐비의 매력이 절정인 순간을 보다니 텐비와의 인연이 각별한 듯했다.
물론 7월 한여름의 텐비 해변은 많은 사람들로 붐벼서 고요하고 정적인 항구의 시간을 온전히 느끼기는 어려웠지만, 소란한 텐비 해변 또한 충분히 아름다웠고, 해변 끝 길가에 서서 멀리 바라보는 항구와 나 사이의 거리에는 무궁한 상상력이 들어올 공간도 충분했다.
여기서 잠깐, 혹시 이 <런던 빼고 영국 여행> 매거진을 쭉 보고 있는 사람이라면, ‘아니, 항구에 조수간만 차가 크고, 그래서 썰물 때 항구 바닥이 보이고, 배가 땅바닥에 내려앉아 있는데 그 모습이 인상적이라서 예술적 영감을 준다라면, ‘포트 아이작’이랑 너무 비슷한 거 아니야?’ 라고 생각할지 모르겠다. 물론 비슷한 점이 많지만, 두 항구 도시가 주는 인상은 참 많이 달랐다. 일단 도시와 항구의 규모가 달라 썰물 때 빈 해변과 항구가 보여주는 적막함의 깊이가 다르고, 그 결과로 포트 아이작은 항구가 바닷물로 가득 찰 때 아름답고, 텐비 항구는 비워낼 때 더 충만해지는 것 같다.
< 텐비처럼 조수간만의 차가 큰 콘월 포트 아이작 항구와의 비교 >
이어서 감상할 텐비의 여행지로써의 정체성이자, 이 텐비 노스비치 해변을 매력적으로 만드는 독특한 풍경이 남아 있다. 앞서 말한 파스텔색 풍경!
텐비의 대표 해변인 노스비치의 오른편 해안 절벽에서부터 시작되어 해변을 감싸듯 해안가 도로를 따라 파스텔색 건물들이 쭉 늘어서 있는 풍경은 ‘크랙웰 스트리트(Crackwell Street)’로 불리는, 텐비를 대표하는 이미지이다.
‘크랙웰 스트리트’는 정확히는 노스비치 옆 거리의 이름이지만, 이 거리 위에 쭉 이어진 사랑스러운 색감의 건물 행렬 전체를 지칭할 때 사용하는 말하기도 한다.
크랙웰 스트리트의 건물들은 빅토리아 시대에 텐비가 해변 휴양지로 개발될 때 지어진 건물들로, 텐비 해변을 잘 바라볼 수 있는 해변가와 절벽 위에 세워졌으며 대부분 중·상류층 휴양객들을 위한 고급 주택과 호텔, 상점 등으로 이용되었다.
그러나 빅토리아 시대에는 현재의 파스텔색 외벽은 없었다고 한다. 당시에는 바닷가 마을 건축물들의 특징인 석회 도료를 바른 흰색 계열의 단색 외벽이 대부분이었다. 지금의 파스텔색 외벽은 20세기 말경 해안 휴양지로써의 텐비 이미지를 다시 한번 부흥시킨다는 계획 하에 감성적이고 사랑스러운 파스텔 색감의 페인트를 칠해, 현재 텐비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크랙웰 스트리트의 이미지를 완성했다.
다른 색감의 외투를 입었지만 현재도 여전히 빅토리아 시대와 유사한 기능으로 사용되고 있는 크랙웰 스트리트는 감성적인 파스텔색 거리 풍경과 정적인 해변 뷰가 서로 대비되어 훨씬 드라마틱한 인상을 주는 텐비의 매력 포인트가 되어주고 있다.
크랙웰 스트리트가 시작되는 노스비치의 오른편 해안 절벽에는 파스텔색 건물들 외에도 중세시대에 지어진 텐비 성(Tenby Castle)이 있고, 그 너머에는 '캐슬비치(Castle Beach)'라는 또 다른 해변이 있다.
해안 절벽 옆 아치형 돌문을 통과해서 들어가는 캐슬비치에는 텐비 항구나 크랙웰 스트리트만큼 텐비의 명물로 인식되는 작은 섬이 있으니, 바로 세인트 캐서린스 아일랜드(St Catherine’s Island)이다.
캐슬비치 바로 앞 바다에 위치하는 이 섬은 천연의 바위섬 정상에 19세기 요새를 품고 있어 역사적인 유적으로써의 의미도 있지만, 그보다는 썰물일 때는 모래사장과 연결되어 걸어서 닿을 수 있고, 밀물 때는 바다에 고립된 섬의 모습을 하기 때문에 더욱 특별하게 여겨진다. 그리고 밀물과 썰물일 때 각각 나름의 멋이 있으나, 걸어서 섬까지 갈 수 있다는 점 때문에 썰물에 더 많은 사람들이 찾는다.
썰물 시기에 텐비에 머문 나도 당연히 캐슬비치의 모래사장과 이어진 천연 바위섬을 볼 수 있었다.
해변 저 멀리 당당한 듯 고고하게 서 있는 바위섬은 파도에 의해 사방이 깎인 절벽의 섬이었다. 황토빛의 거친 표면은 척박함과 고립감을 고조시켰다.
이 특유의 삭막한 분위기 때문에 종종 영화나 드라마의 촬영지(BBC 시리즈 <셜록(Sherlock)>도 여기서 촬영했다고. '베네딕트 컴버비치~ 못 잃어~~')가 되기도 한다는 섬까지 닿지는 못하고, 멀리서만 바라보고 돌아서는 마음이 조금 서운했다.
그러나 발길을 돌려야만 했다. 잠깐 들러 점심을 해결하려고 했던 텐비에 우리는 이미 예상보다 긴 시간 동안 머물렀다. 일요일 오후가 더 깊어지기 전에 집이 있는 바스(Bath)로 출발해야만 주말 짧은 여행의 리프레쉬 뒤, 다시 월요일의 일상을 시작할 수 있었다.
텐비의 다양한 매력을 너무 짧은 시간에 와락 껴안은 우리는 텐비를 떠날 때 조금 멍했다.
“이런 근사한 도시를 이렇게 후딱 보고 가도 되나 몰라...”
미리 계획한 준비된 여행이든, 갑자기 떠난 여행이든 여행의 마지막 순간은 늘 아쉽고 미련이 남지만, 우리가 투자한 시간에 비해 훨씬 근사했던 텐비는 더욱 큰 미련을 남겼다. 그러나 모르고 지나칠지도 몰랐던 텐비의 매력들을 직접 볼 수 있었으니 얼마나 행운이고 다행인지를 떠올리며 미련보다는 감사하는 마음을 갖기로 했다. 두 달 전 어느 주말, 각자 가방 하나씩 매고 훌쩍 떠났던 아일랜드 여행이 그랬듯, 갑자기 떠난 즉흥여행은 늘 더 큰 기쁨과 감사로 남는다.
[런던 빼고 영국 여행] 영국 웨일즈 남부 펨브룩셔 ②
텐비(Tenby), 파스텔 빛에 물들다 _ 마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