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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를정 Mar 14. 2024

기록 강박과 꾸며진 이미지들

일기와 영상으로는 성에 차지 않는다

일찍이 없는 돈타령보다는 시간을 잘 쓰고 싶었다.

시간을 의미 있게 썼다는 훈장을 부여하기 위해, 수시로 삶에 분기점을 지정하며 성과를 내려 했다.

학창 시절의 중간·기말고사의 연장선인 셈이다.

성적표와 학위증, 소득 증명서 등으로 내 시간이 무용하지 않았음을 설명해왔다.

공식적인 기록이 남지 않는 일들은 SNS에 박제된 게시글이 대신했다.

가치의 평가는 늘어나는 팔로워와 구독자, 좋아요와 댓글 수로 추산됐다.

20대 초반, 여행에미치다에 다니며 막 인스타그램을 시작했을 때만 하더라도

1일 1업로드를 일삼았다. 내가 마주한 특별한 순간들을 하나라도 더 묶어두려 했다.

벌어먹고 살기 위해 들었던 카메라는 어느새 가장 좋아하는 취미가 되었다.

두 눈으로 본 기억은 시간이 지나면 사라지지만 카메라에 담긴 이미지는 영구 보존되니

과거 나의 존재에 가치를 부여하는 데 이만한 게 없었던 샘.

게다가 사진과 영상은 대게 실제 두 눈에 담겼던 현상을 상회한다.

같은 현상을 두고도 (1)어떤 장비로 (2)어떻게 찍고 (3)어떻게 보정하느냐에 따라서

인상의 정도는 확연히 달라진다.


그 재미를 일찍이 알았던 까닭에 앞이든 카메라 근처에 섰다. 앞이든 뒤든 좋았다.

결과적으로는 카메라 앞에 서는 일을 직업으로 삼게 됐지만, 여전히 혼자만의 시간을 보낼 때는

카메라를 석대나 트렁크에 싣고 다닌다. 사진의 효용을 떠나서 찰나를 소유하는듯한 그 느낌이 좋다.


달라진 점이 있다면, 좀처럼 그 장면들을 남들에게 보여주지 않게 됐다는 것.

하나라도 더 남기고 드러내고 싶었지만, 이제는 괜히 눈치가 보인다.

숨기고 싶은 건 또 아니다. 게시글은 잘 안 올려도, 스토리는 수시로 올리는 아이러니.

다만, 박제당하고 훗날 평가될 게 좀 두렵기 때문일까. 


인스타 스토리도 캡처를 하면 박제당하기는 매한가지지만, 24시간 안에 휘발될 걸 알면서도 올렸다는 게 조금 담백한 느낌이기 때문일지도.


물론, 보관함에 들어가면 그 흔적들은 남아있지만, 영 아쉽다. 무엇보다 다시 들춰보지를 않게 된다.

그래서 좀 더 새기고자 마음을 먹었다. 근래에 가장 큰 자극이 된 건 

드라마 <오늘은 좀 매울지도 몰라>와 이경준 님의 사진전 <ONE STEP AWAY>

드라마 <오늘은 좀 매울지도 몰라>와  이경준-ONE STEP AWAY(그라운드 시소 센트럴) 


훨씬 더 많은 사람들에게 도달할 수 있는 방송이나 유튜브가 아닌, 블로그와 오프라인 전시가 날 사로잡았다.

뭐랄까. 애당초 그 결에 맞는 사람들만 찾아오니 듣기 싫은 사람들의 평가 잣대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았다.


일단 뭐라도 알려야 한다는 마음으로 뉴스에서 춤을 추던 시절과는 확연히 다르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나를 아느냐보다, 어떤 사람들이 나를 찾느냐가 중요해졌다.

대단한 성숙을 이룬 생각의 전환이라기보다는 단지 유명해지는 게 어려워서 생각을 바꿔 먹은 걸지도. 

(워낙 나라는 사람 자체가 합리화에 능한 터라. 정확히 생각을 바꾼 계기는 잘 모르겠다.)

개인적인 이야기. 책도 한 권 냈고, 이미 유튜브까지 하고 있지만, 여기는 또 느낌이 다르다.

좀 더 직관적이고 적나라하고 내 멋대로이고 싶은 공간에 대한 갈증.

그나마 이를 잘 해소해 주는 게 강연인데, 직업적인 여건 때문에 무작정 회차를 늘리기도 부담이 된다.


이를 대신했던 게 수기로 작성하는 일기였다. 거기에 시각자료를 더하고 싶고, 소수일지라도 결을 같이 하는 사람들의 의견이 궁금했다. 애당초 드러냄을 피할 수는 없는 숙명이다. 겁이 많을 뿐.

아나운서 치고는 사적인 모습을 일찍이 많이 꺼내놓는다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다.

방송을 업으로 삼은 지 만 2년이 되어가는 지금. 세간에는 꾸며지지 않은 일상이 대세라지만, 정도라는 게 있다.솔직함 마저 연출과 걸러짐의 산물이 되었고, 홀로 보는 일기장에도 거짓말을 쓰는 지경에 이르렀다.


온라인 상에 박제하는 글을 통해 잃어버리기 아까운 장면들과 솔직한 감상을 남기고 싶다. 

일기장에도 날짜를 바꾸거나 내용을 덧붙이며 장난질을 할 수 있지만, 여기 남아있는 글을 수정하게 되면 꼬리표가 따를 테니. 


2024년, 올해가 가기 전에 나의 확실한 취향과 저물어가는 20대를 정리할 수 있기를.

스스로 의미를 부여하는 것의 중요성을 주창하는 나지만, 에리히 프롬에 따르면 이 또한 소유적 실존 방법에 불과하다.


 <소유냐 존재냐>

흐르는 시간을 어떻게든 시각화하려는 욕망의 산물.

찰나를 누리며 존재적인 삶으로 향하기에 나는 아직 갈 길이 먼 듯하다.

애석한 점은, 이러한 기록 강박이 나의 환경을 보다 풍요롭게 만들어주고 있다는 점이다.

그래도 돈을 안겨주지 않고, 남들이 요구하지 않는 사담.

'덜 유용한 행위'를 통해 좀 더 '나를 위한' 고찰에 다다를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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