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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드르륵, 그러나 이상 무!

필사하며 나누며

by Eli


* 이 매거진은 fragancia 작가님의 필사 모임에서 제공된 자료를 토대로 했음을 알려드립니다.

* 이 매거진은 fragancia 작가님과 공동으로 하는 글쓰기입니다.

* 이 글쓰기의 목적은 필사 문장을 다시 음미하고 확장하려는 데 있습니다.




수도꼭지의 아이러니는 누군가가 씻는 데 도움이 되고자 만들어졌지만 결코 스스로 씻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죽은 자의 집이라면 그가 누구든 그곳이 어디든 가서 군말 없이 치우는 것이 제 일입니다만 정작 제가 죽었을 때 스스로 그 자리를 치울 도리가 없다는 점이 수도꼭지를 닮았습니다.

언젠가 죽은 이가 숨을 거두고 한참 뒤에 발견된 화장실에서 수도꼭지에 낀 얼룩을 닦으며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우리는 누군가의 도움 없이 살아갈 수 없다고.
- 죽은 자의 집 청소, (김완) -


질문 : 어떤 물건이 당신과 닮았다고 생각하나요? 당신과 닮은 사물을 찾아주세요.





"수꼭지의 아이러니는 누군가 씻는 데 도움이 되고자 만들어졌지만 결코 스스로 씻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집 냉장고는 19년 된 양문형 냉장고다. 당시 막 유행하기 시작하던 냉장고였다. 왼쪽의 냉동칸과 오른쪽의 냉장실이 따로 있는, 손잡이를 잡고 양쪽으로 열 수 있는 그런 냉장고. 냉장고를 만든 제조사(D)가 지금은 사라져 버린 냉장고. 그래서 A/S 받기가 어려워진 냉장고.


신혼살림을 장만할 때 냉장고를 살 돈이 없었다. 시어머니께 큰 냉장고가 생기는 바람에 당신이 쓰시던 작은 냉장고를 주셨는데 내 키보다 작았다. 크게 불편하진 않았고 10여 년 넘게 썼다. 결혼 13년 차 되던 해, 서울살이를 접고 소위 전원주택살이로 터전을 옮기면서 그 냉장고를 처분하고 새 냉장고를 샀는데 그게 지금 가진 냉장고다.


대형마트에 진열된 진열품을 정가의 65%에 해당되는 현금 78만 원을 주고 샀다. 총 579L로 냉장면적은 330L. 기존에 쓰던 것과는 아주 달랐다. 이사를 하며 새 냉장고를 들여놓고 나는 무척 기뻤다. 얼음칸 따로 있어서 오른쪽으로 얼음틀을 비틀면 얼음이 주르륵 떨어진다. 나는 이게 제일 좋았다. 기존의 냉장고는 냉동실이 손바닥만 해서 냉동 만두 몇 개가 들어가면 더 집어넣을 수 없었고 얼음도 따로 넣어야 했다. 냉장고에 넣을 밀폐용기도 유리로 된 것으로 바꾸고 양쪽으로 열어 안을 들여다보며 나는 아주 흡족했다. 부자가 된 기분이었다.


김장철이 되어 김치가 많이 생겼다. 김치통이 들어갈 자리가 없었다. 김치를 넣으려면 나머지 것들은 모두 꺼내야 했다. 결혼할 때 혼수를 해 주지 못해 미안해하던 엄마가 아담한 김치 냉장고를 보내왔다. 그 냉장고에 김치를 넣으니 또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집에 놀러 온 손님이 "모여라 꿈동산"의 인형 머리통만 한 커다란 수박을 들고 왔다. 수박은 물론이고 끓여 놓은 사골국도 냉장고에 들어가지 않았다. 먹다 남은 반찬들과 된장에 고추장, 고춧가루와 마늘, 각종 채소와 고기류까지 보관하느라 냉장고는 빈틈이 없었다. 슬슬 냉장고 용량에 불만이 생겼다. 장마가 한창이던 어느 날 우리 집 냉장고 나이 7년에 작동을 멈췄다. 부도나 없어진 제조사의 A/S를 찾아 하루 종일 전화통을 붙잡고 우여곡절을 겪은 후, 전기 제어판을 통째로 교체했다. 12만 원이 들었다. 그러다 집을 지었는데 나중 일은 생각 못 하고 지금의 냉장고가 들어갈 만큼의 공간을 만들어 집어넣었다. 어느 날 냉장고가 "드르르륵" 요란한 소리를 내더니 또 작동을 멈췄다. 드디어 수명이 다 했나? 냉장고를 만져보니 뜨거웠다. '스스로 씻지 못하는 수도꼭지'처럼 보관하는 음식은 차갑게 해 주면서 냉장고 스스로는 차갑지 않았다.


다시 복잡한 과정을 거쳐 A/S를 불렀고 냉매를 공급하는 컴프레서를 청소했다. 냉장고는 다시 살아났다. A/S기사는 냉장고가 작고 오래되었다며 새것으로 바꾸는 것이 어떠냐고 했다. 요즘 제품들은 하나같이 커서 우리 집 냉장고 자리에 들어갈 수 없다는 사정을 설명하며 이 냉장고를 계속 달래서 잘 써야 한다고 하니 기사님은 참 안 됐다는 표정을 짓고 돌아갔다. 그 후 나는 주기적으로 컴프레서를 청소했다. 멈추면 큰일이었다. 새것을 사려면 과거에 지불한 가격의 서너 배는 더 주어야 하고 무엇보다 싱크대를 잘라내지 않는 한 놓을 자리가 없다. 차선책으로 김치 냉장고를 큰 것으로 바꿨다. 그 후 부엌의 불을 끄고 자러 들어갈 때마다 냉장고 소리에 귀를 기울이면서 불필요한 것들이 자리만 차지하고 있진 않은지 살피는 것이 습관이 되었다.


때때로 나 또한 내 용량의 한계를 넘어서지 못한다. 누군가 나의 고유한 영역-원칙이나 가치관-을 건드리거나 침범하면 그만 뾰족해져서 고장이 난다. 내가 품을 수 있는 용량을 넘는 그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숨겨놓은 발톱을 꺼내고 만다. 음식은 차갑게 하면서 냉장고 스스로는 그렇지 못하는 것처럼 남의 일엔 쿨하게 조언을 하면서도 내 일엔 옹졸하다. 자신의 용량은 모르면서 좋은 사람으로 불리고 싶은 욕심 때문에 더러 탈이 난다. 그러면서 알았다. 더 큰 것이었으면 하고 바라는 우리 집 냉장고가 지금 우리 형편에 맞듯이 내 용량도 330L라는 걸. 330L로도 충분하다는 것을. 그 이상이 되려는 것은 주제 파악을 못 하는 욕심이며 무리다. 사람들에게 과대평가를 받으며 괜한 오해만 산다.


겉으로 멀쩡해 보이지만 가끔씩 고장이 나는 냉장고. 나 또한 겉은 멀쩡해 보이나 남 모르게 "드르륵" 거리며 고장이 난다. 때로는 몸이, 때로는 마음이. 남들은 내가 "드르륵" 소리를 내면 고장 난 줄도 모르고 웃는다. 고장이 났다고 하면 화를 낸다. 왜 고장이 나냐고. 너는 고장 나면 안 된다고 한다. 그런 말 앞에선 참 외로워진다. 고장 난 냉장고야 버리고 다시 장만하면 되지만 나 자신은 그럴 방법이 없으니 나를 잘 돌보며 지내야 한다. 무조건 참지 않기, 주변 평가에 휘둘리지 않기, 자신을 지키는 일-글쓰기 등-에 집중하며 물질에 대한 소비도 마음의 욕망도 관계도 내 용량의 한계를 넘지 않도록 덜어내야 한다. 미련 없이 버리고 "드르륵"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자주 청소를 해 줘야 한다. 그래야 나를 지킬 수 있다. 그러려면 부지런해야 하겠지. 내게 없는 커다란 냉장고와 비교하지 말아야겠지.


다시 부른 A/S기사가 말했다.

"깨끗하게 잘 쓰고 계시네요. 작긴 하지만 식구도 적은데 큰 거 뭐 필요 있나요? 괜히 채워 넣느라 돈만 써요."


19년 된 우리 집 냉장고 아직은 이상 무.

62년 된 나 또한 자주 드르륵 거리지만 어쨌든 이상 무.

다행히 오늘은 둘 다 이상 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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