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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론을 시대별, 지역별로 구분하는 것이 의미가 있을까? 고대건 현대건 간에 인간의 갈등이 존재하고 이익이 첨예하게 대립하는 사건마다 토론은 항상 존재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에게 토론하면 떠오르는 도시를 묻는다면 단언컨대 고대 그리스의 도시국가 '아테네'를 떠올릴 것이다. 토론은 가장 민주적인 의사결정방법이라고 생각하는 우리가 토론의 시초를 민주주의의 발상지인 아테네로 보는 것은 합리적인 발상이다.
고대 그리스 문명은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전통을 바탕으로 새로운 문명을 만들어내야 했다. 이질적인 것을 하나의 것으로 만드는 과정에는 분명히 토론이 필요했을 것이다. 아테네는 민주주의를 정치체제로 채택하여 운영하던 도시국가로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서 시민(여성, 노예, 외국인 제외)들은 동일한 의결권을 가졌을테고 의사결정을 위해 수많은 토론이 벌어졌을 것이다.
아테네의 시민은 누구나 소송을 제기할 권리가 있었다. 그와 동시에 소송의 배심원으로 선택되면 재판에 참석해야 할 의무도 있었다. 아테네에서 벌여진 소송에서의 원고와 피고 측의 변론의 모습은 오늘날 법정에서도 살펴볼 수 있다.
아테네 시의 고지대에는 도시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광장 '아크로폴리스가'있었다. 이곳에서 시민들은 정치, 종교, 군사, 납세 등과 같은 시민들의 생활과 관련된 토론이 주를 이뤘고 이것에 대해 투표했다.
아크로 폴리스 아래에는 '아고라'가 있었는데 당시의 상인, 광대, 음유시인, 무용수 등이 주를 이루며 즐거운 분위기의 시장의 모습이었다. 시장에는 시민들이 모이고 시민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서는 '아고라'에 와서 그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야 했다. 가끔씩 아테네의 정사를 책임지는 관리들이 시민들의 의견을 수렴하기 위해 '아고라'로 내려오곤 했지만 아고라가 시민들 간에 자유롭게 토론하며 여론이 형성되는 역할을 할 뿐 최종적인 의사결정은 '아크로폴리스'에서 진행되었다.
로마에도 아테네의 아고라와 비슷한 포럼(Forum)이 있었다. 연설을 위한 포럼의 연단을 로스트럼(Rostrum)이라고 불렀는데 고대 그리스의 '아고라'와는 달리 조금 더 격식을 차리고, 정치적 견해나, 공공의 주제에 대해 토론이 이루어졌다.
그리스와 로마는 자유롭게 토론할 수 있는 분위기와 함께 다수결로 의사결정이 이루어진다. 하지만 이것이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디베이트(debate) 형식의 토론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당대 토론으로 유명했던 철학자 중 고대 그리스의 소크라테스나, 로마의 키케로만 보더라도 '산파술(maieutike)', '레토릭(rhetoric)'으로 유명했던 달변가이지 체계적인 논리나 비판적 사고에 근거한 논증이라고 볼 순 없다. 따라서 일부 학계에서는 디베이트의 기원을 다른 곳에서 찾아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그렇다면 우리가 알고 있는 토론은 어디서 왔을까? 형식을 갖춘 토론의 역사를 따라 올라가다 보면 '아카데미 토론(Academic debate)' 한글로는 '학술적 토론' 또는 '교육목적의 토론'에서 그 뿌리를 찾을 수 있겠다. 특히 이 아카데미 토론은 지금까지 링컨-더글라스 디베이트(Lincoln&Douglass debate), 팔라시 디베이트(Policy debate), CEDA 디베이트(Cross examination debate), 칼 포퍼 디베이트(Karl Popper debate), 퍼블릭 포럼 디베이트(Public forum debate) 등 여러 가지 형식으로 진행되고 있다.
아카데미의 어원은 본래 아리스토텔레스가 수학하고 플라톤이 운영했던 일종의 토론 학원이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토론능력을 민주시민의 중요한 자질이자 기본적인 소양으로 보았고, 이를 가르치기 위한 학원이 성행했다. 아카데미에서는 관념적인 주제부터, 정치적인 주제까지 두루 다루며 토론능력을 길렀다.
이런 토론에 대한 관심은 고대, 중세를 거쳐 여러 혁명의 영향을 통해 당시 고등교육을 담당하던 교육기관으로 넘어오게 되었다. 학자들은 엄격한 규칙, 시간제한 그리고 일정한 혁신을 갖춘 당시의 토론이 오늘날 교육토론의 초기 모델이 되었을 것이라 추측한다. 그 증거로 아카데미 토론이 활발히 진행되었던 19세기 영국에서는 1815년 캠브리지 유니온, 1823년 옥스퍼드 유니온을 통해 양 대학 간 토론 교류전이 활발했던 것을 들 수 있다. 20세기 초 아카데미 토론은 미국으로 건너오게 되는데 하버드 유니온과 같은 토론 동아리가 만들어졌고 미국의 많은 혁명에 영향을 주었다.
캠브리지 유니온과 옥스퍼드 유니온이 생기면서 두 가지 디베이트 방식이 만들어졌다. 하나는 '챔버 디베이트'로 챔버(Chamber, 좁은 방)라는 공간에 유명인사를 초청하여 그들의 강연을 듣고 난 뒤 질의응답 식으로 진행되는 토론이다. 지금까지도 수많은 정치인과 유명인이 참여했는데 우리나라 사람으로는 2012년 싸이가 옥스퍼드 유니온에서 '챔버 디베이트'를 통해 강연 후 질의응답을 진행한 적이 있다. 다른 하나는 '경쟁식 디베이트'로 엄격한 규칙과 시간제한을 정해놓고 논리적인 경쟁을 하는 방법으로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아카데미 디베이트가 바로 이 방법이다.
한국도 수준 높은 문명을 자랑하기에 그 과정 중에는 분명히 토론이 있었을 것이라 확신하지만 학문으로 인정하고 표면적으로 드러날 만큼 토론을 익히고 널리 알리려는 시도는 드물었다.
조선시대 경연(經筵) 제도를 통해 신하들끼리의 문답식의 논쟁 속에서 논제에 대한 해결책을 모색하곤 했는데 확실히 오늘날의 교육적 디베이트와는 체계나 작동방식이 확연히 다르다. 조금 더 비슷한 기원을 찾는다면 1895년 망명했던 서재필이 귀국해 독립협회를 세우기 시작할 무렵 배재학당에서 벌어졌던 토론에서 그 모습을 찾을 수 있다.
어느 날 서재필은 배재학당에서의 강연과 같은 수동적 교육은 더 이상 무의미함을 깨닫고, 학제 간의 질문을 통해 스스로 문제에 대해 고민하는 방법을 찾기 시작했다. 이런 고민은 미국에서 수학했던 시절 어린이들과 함께 '해리-힐맨 학교'를 다닌 적이 있었는데 미국과 세계의 정치, 경제에 대해 뚜렷한 주관을 가지고 말하는 어린이들의 모습을 보며 감탄했다고 한다. 명색이 과거까지 급제했던 서재필이지만, 토론클럽을 만들어 15살 정도 되는 어린이들이 매주 사회 쟁점을 찾아 문제를 분석하고 스스로 사전을 찾아 대안을 모색하며, 훌륭한 수사적 기법으로 연설하는 것을 보고 부끄러움을 느꼈다고 전한다. 서재필이 미국에서 본 것은 주장, 반박, 재반박으로 이루어진 아카데미 토론이었다.
훗날 서재필이 독립협회를 창설하기 직전에 「독립신문」에 쓴 논설은 다음과 같이 토론의 필요성을 말하고 있다.
"무슨 일이든지 공·사간에 문을 열어 놓고 서로 의논하여 만사를 작정하고 실상과 이치와 도리를 가지고 햇빛 있는 데서 말도 하고 일도 하는 것이 나라가 중흥하는 근본이다."
토론1인분 5화 - https://brunch.co.kr/@herman-heo-se/51
토론1인분 4화 - https://brunch.co.kr/@herman-heo-se/49
토론1인분 3화 - https://brunch.co.kr/@herman-heo-se/48
토론1인분 2화 - https://brunch.co.kr/@herman-heo-se/46
토론1인분 1화 - https://brunch.co.kr/@herman-heo-se/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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