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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포그니 May 25. 2022

로망에 대하여

카페에서 바라본 일몰 광경. 황금빛으로 물든 하늘을 참 오랜만에 바라봤다. 손님이 아닌 알바로 일하면서 이런 멋진 풍경을 바라보는 것은 어쩌다 한 번 뿐이다. 

‘1. 전설이나 기사도적 사랑과 모험 또는 초자연적인 것에 바탕을 둔 중세 이야기. 영웅적이고 모험적이며 신비로운 사건과 관계된 상상 속 인물을 다루는 산문적 서술 또는 소설 형식의 사랑이야기, 

2. 사실적인 근거가 부족한 이야기.

3. 영웅시대, 모험 또는 활동에 대한 정서적 끌림….’

200년 역사를 자랑하는 ‘매리엄웹스터 사전’이 정의한 '로망(Roman 또는 Romance)'의 의미다. 원래 18세기까지 로망은 ‘로마와 같은’ 또는 ‘로마와 관련 있는 것 또는 사람들’이라는 뜻으로 쓰였다고 전해진다. 우리가 알고 있는 의미와는 사뭇 다르다. ‘낭만’ 또는 ‘희망사항’ 정도로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다. 오히려 ‘근거가 부족한’ 또는 ‘상상 속의 서술’이라는 표현 같이 부정적인 의미가 더 강한 듯 보인다. 달리 생각하면 그럴 수도 있겠다 싶다. 머릿속에 펼쳐지는 로망의 세계와 현실의 세계는 전혀 다르니까. 

한 가족이 카페에 들어섰다. 창밖을 바라보며 이것저것 얘기하다 카페를 어떻게 하게 됐냐며 슬며시 물어왔다. 있는 그대로 가감 없이 얘기했다. 처가가 가지고 있던 땅에 건물을 지은 것이라고. 그러자 남자 손님이 기다렸다는 듯이 한마디 했다. “내 로망인데….” 갑자기 옆에 있던 나이 지긋하신 분이 쓴 미소를 지었다. “이보게 미안하네. 내가 그런 능력이 없어서.” 입은 웃고 있지만 갑자기 분위기가 싸 해지는 것은 혼자만의 생각일까. 

사실 카페를 하면서 가장 많이 들은 단어가 바로 이 로망이다. “사장님(사장은 따로 있고 실제 나는 노예지만 설명하기 귀찮아 그냥 그렇게 부르게 놔둔다)은 좋겠어요. 돈도 벌면서 그림 같은 풍광도 즐길 수 있으니” “제 로망이 카페인데….” 가끔이기는 하지만 말을 건네는 손님 열 중 여덟은 이렇게 얘기한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애써 웃음을 지으며 '네~~' 하고 넘어가는 일뿐이다. 속으론 '당신이 한번 카페를 해 봐라. 그런 말이 나올 수 있는지'라고 말하며. 

아내와 함께 갔던 안동 병산서원. 솔솔 부는 바람, 창틀 밖 꽃과 나무가 마치 한 폭의 액자 속 그림을 보는 듯한 착각을 일으킨다.

물론 그럴 수 있다. 아무 생각 없이 손님이 들어오면 주문받고 없으면 시원한 창밖을 바라보며 혼자만의 시간을 가질 수도 있다. 처음 카페를 시작할 때 그런 낭만을 꿈꾸지 않은 것은 아니다. '커피 한 모금 마시며 석양을 바라보고, 차 한 잔 마시며 쏟아지는 햇살을 온몸으로 즐기고, 멍 때리며 밀려오는 파도 소리를 듣는다. 생각만 해도 멋지지 않은가. 장년을 앞둔 중년에 누리는 호사라니. 내가 복이 많아.' 

반만 맞는 생각이었다. 카페를 그야말로 취미 정도로만 생각한다면 이럴 수 있다. 불행히도 대부분의 카페 주인들은 그렇지 않다. 모두 사장이고 종업원이고 노예다. 손님이야 삶을 즐기기 위해 카페를 찾지만 주인은 생존을 위해 카페를 운영한다. 특히 요즘처럼 어려운 시기에 살아남기 위해서는 더더욱 몰두해야 한다. 하나라도 더 새로운 메뉴를 만들고, 어떻게 하면 손님이 찾아오게 만들까 고민하면서 시간을 보낸다. 모든 시간을 이렇게 써도 될까 말까 한 게 현실이다. 

카페에 가면 노예와 사장이 앉는 고정석이 있다. 카운터 바로 옆이다. 부부가 함께 앉으면 꽉 차는 넓이다. 한 명이라도 움직이려면 다른 사람이 자리를 비켜주거나 지나갈 수 있도록 다리를 최대한 의자 쪽으로 붙여야 한다. 게다가 정면은 도로 앞 주차장이다. 보이는 것이라고는 지나가는 자동차와 주차장을 가득 메운 자갈, 그리고 카페를 들리는 손님들의 애마들 뿐이다. 고개를 오른쪽으로 돌리면 출입문이고 왼쪽으로 돌리면 차를 마시는 손님들과 테이블이 눈에 들어온다. 바다를 바라보려면 몸을 180도 비틀어 뒤쪽 창문으로 향해야 한다. 자세가 불편하니 당연히 허리와 목이 아플 수밖에 없다. 아마도 건물을 설계한 사람이 카페 주인은 감상하지 말고 일을 하라는 깊은 뜻을 담아놓은 듯하다.

뿐만 아니다. 손님이 뜸 한 날에는 창 밖을 바라보며 차 한잔을 즐기는 대신 왜 손님이 없지를 고민한다. 찾는 이가 많을 때는 일몰을 감상하기는커녕 커피를 타고 설거지 하기에 바쁘다. 낭만을 생각하고 감상에 취하는 일은 언감생심 상상도 못 한다. 낭만이고 로망이고 생각할 겨를이 없다. 누구를 탓하랴. 이게 자영업자의 숙명인 것을. 

그래도 카페를 접을 생각은 추호도 없다. 생텍쥐베리의 '어린 왕자'는 말한다. "별은 아름다워. 그것은 보이지 않는 꽃 한 송이를 감추고 있기 때문이야… 사막이 아름다운 거 어딘가에 샘을 감추고 있기 때문이야." 이 노예도 카페 어딘가에 숨어 있을지 모를 나만의 로망을 찾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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