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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반 일리치의 죽음> (톨스토이, 창비, 2025)

손 필사 1일 차

by 하늘진주

중편 <이반 일리치의 죽음>은 러시아의 대문호 톨스토이가 형제와 친지 등 사람들의 연이은 죽음을 목격한 후 완성한 작품이다. 작가는 일찍이 <전쟁과 평화>, <안나 까레니나>를 발표하며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지만, 힘든 위기를 겪으며 새로운 시각으로 작품 세계를 형성한다. 어쩌면 이 소설은 삶과 죽음에 대한 거장의 통찰이 담긴 작품이 아닐까 싶다.


소설은 ‘이반 일리치의 부고’를 접한 인물들의 반응으로 시작된다. 죽은 이와 가까운 관계를 유지한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은 갑작스러운 사망에 대해 놀라고 슬퍼하기보다는 이 죽음으로 인해 얻을 이익들을 먼저 생각한다. 또한 이반 일리치를 위한 추모에 온전히 젖어들기보다는 빨리 장례식장에 다녀와서 살아있는 이들과 카드놀이를 할 생각에 가득하다.


“사무실에 모여 있던 이 고위급 인사들이 이반 일리치의 사망 소식을 듣고 가장 먼저 머리에 떠올린 생각은 이 죽음으로 인해 발생할 자신과 동료들의 자리 이동이나 승진에 대한 것이었다.”(p.8-p.9)


“아주 가까운 사람의 사망 소식을 들은 사람들이 누구나 그러듯이 그들도 죽음 게 자신이 아니라 바로 그라는 사실에 안도감을 느꼈다.

‘어쩌겠어, 죽었는데. 하지만 난 이렇게 살아 있잖아.”(p.10)


아직 ‘이반 일리치’라는 인물이 어떤 인물인지는 알 수 없지만, 누구 하나 그리워하지도 슬퍼하지 않는 사람들의 반응들만 살펴보면, ‘이 사람은 참 인생 헛살았구나.’라는 마음이 먼저 든다. 그런 안타까운 기분과 동시에 이런 모습들이 바로 현실 속 죽음을 대하는 사람들의 속내를 있는 그대로 솔직하게 표현한 게 아닌가 싶다. 사실 현실 속 장례식장은 이 소설 속에 묘사된 것처럼 현실적이고 세속적인 아우성이 가득하다. ‘어쩌겠어, 죽었는데 하지만 난 이렇게 살아 있잖아.’라는 작품 속 인물의 속내조차 가까운 이의 죽음을 겪은 이들이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을 치는 말, ‘산 사람은 살아야지.’의 중얼거림과 비슷하다.

죽음을 온전히 슬퍼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존재할까? 우리의 인생에 있어서 사람들의 관계를 영원히 갈라놓는 것은 바로 죽음이지만, 이 차가운 작별 이후의 세상은 미지의 세계이다. 그렇기에 사람들은 종교, 문학 작품의 입을 빌어 죽음은 아주 고귀하고 성스러운 의식으로 치부한 게 아닐까? 이반 일리치의 부고를 둘러싼 사람들의 모습이 마냥 낯설지 않아 슬픔의 깊이를 시험하는 것 같아 껄끄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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