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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반 일리치의 죽음> (톨스토이, 창비, 2025)

손 필사

by 하늘진주

세계 3대 악처로 소크라테스의 아내 "크산티페", 모차르트의 아내 "콘스탄트", 대문호 톨스토이의 아내 "소피아"가 꼽힌다. 크산티페는 남편에게 잔소리를 많이 하는 기 센 아내였기에, 콘스탄트는 낭비벽이 심하고 허영이 심했기에, 소피아는 남편이 82세의 고령으로 가출해 객사하게 만들었기에 악처로 등극했다. 뭐, 개인의 은밀한 결혼생활은 당사자만 알기에 타인이 가타부타 말하기는 쉽지 않다. 그럼에도 한 발짝 물러나 생각해 보면 ‘기 세고 낭비벽이 심하고 가출’까지 하게 만든 ‘아내’가 성별이 다른 유명 명사인 ‘남편’이었다면, ‘호방하고 통 크고 자유’를 누리게 한 이로 기록되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역사는 아무래도 ‘승자’와 ‘권력’을 지닌 사람들만의 잔치니까 말이다.


이번에 읽은 <이반 일리치의 죽음>에서 톨스토이의 결혼생활을 살짝 상상해 볼 수 있는 구문을 찾았다.


“이반 일리치가 보기에 아내는 아무런 이유도 없이 삶의 유쾌함과 품격을 ‘제멋대로’ 파괴하기 시작했다. 이렇다 할 아무런 근거도 없이 질투하는가 하면, 자기에게만 신경을 써달라고 매달리고 사사건건 트집을 잡으면서 거칠고 불유쾌한 장면을 연출하곤 했다. (중략)


아내는 첫아이의 출산 때부터 아이가 젖을 물지 않은 일이라든지, 정말인지 거짓말인지 아이와 산모가 조금 아픈 일에 이르기까지 온갖 일에 남편을 끌어들였다. (중략)


아내가 신경질적으로 더 집요하게 매달릴수록 이반 일리치는 점점 더 생활의 무게중심을 자신의 직무로 옮겨갔다. 그는 더욱더 일에 빠져들었고 명예욕도 예전보다 훨씬 강해졌다.”(p.32-p.33)


이반 일리치는 지금의 아내를 ‘사랑해서’ 결혼하지 않았다. 그녀가 품위 있게 살 수 있는 ‘꽤 괜찮은 결혼 상대’였기에 인연을 맺었다. 하지만 실질적인 결혼은 그의 예상과는 달리 우아하고 품위 있지 않았다. 아내가 아이들을 출산하면서 이반이 그렸던 이상적인 결혼생활은 산산이 부서졌다. 혼란스럽고 소음이 감도는 시궁창 같은 현실이 그에게 갑자기 찾아왔다.


항상 고고한 백조와 같은 결혼을 꿈꾸었던 이반은 이내 바닥으로 치달은 지옥 같은 현실을 외면하기 시작한다. 그는 무거운 의무를 지지 않기 위해 카드 게임에 전념할 가벼운 친구들과 어울리고 더 높은 명예를 갖기 위해 일에 집중한다. 그동안 치열한 육아의 현장은 오로지 아내의 몫이었다. 그녀가 온종일 아이들에게 시달리든 말든 이반은 사회로 뻗어나가 사람 좋은 가식의 가면을 쓴 채 다른 이들을 만나기에 집중했다.


물론, 작가가 창조한 소설 속 삶은 허구의 세상일 뿐이다. 그렇기에 묘사된 이반의 생각과 톨스토이의 관점이 완전히 같다고 장담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이 부분만 읽으면, 톨스토이가 이반과 같은 생각으로 아내를 대했다면, 소피아가 악처로 등극할 만한 전제조건이 충분히 될 듯싶다. 게다가 이 작품은 작가가 크림전쟁 이후 수많은 죽음을 접하고 새로운 시각으로 삶과 세계를 바라보며 쓴 소설이다. 톨스토이가 이반의 죽음을 그다지 슬퍼하지 않는 아내의 모습을 통해 현실 속 아내 소피아를 투영하며 ‘나 이렇게 불행한 남편이었소’라고 하소연하려 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도저히 작가의 편을 들 수 없다.


소설 읽기가 더해갈수록 죽음으로 향해 가는 가여운 이반 일리치에게 측은지심을 느껴야 할 시점이다. 그런데 오히려 분노가 강해지니 큰일이다. 작가는 작품이 전개하며 이반의 입을 통해 아내의 허영심과 매정함을 계속 부각한다. 그러거나 말거나 결혼 초 이반이 했던 행동만 떠올리면 ‘그가 당해도 싸다’라는 생각뿐이다. 그러니까 초반에 잘했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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