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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이 내려앉는 날

by 하늘진주

“수능 날이 왜 이렇게 추운지 알아?”

“왜?”

“세상의 모든 신들이 한국으로 몰려와서 그렇대. 부처님, 예수님, 천지신명까지 다 불러대니까. 나라가 좁잖아. 그래서 추운 거래.”


그 말에 웃었지만, 창문 밖의 공기는 하얀 입김이 보일 것처럼 한결 서늘해져 있었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가을이 왜 이렇게 덥냐”던 날씨였는데, 수능이 다가오자 거짓말처럼 기온이 떨어졌다. 정말 수험생 엄마들의 염원이 하늘을 흔드는 걸까. 아니면 겨울이 예정된 자리를 찾아온 걸까. 이상하게도, 아이가 고3인 해의 11월은 유난히 더 춥게 느껴진다.


큰애의 수능일도 그랬다. 2023년 11월 16일, 하루 종일 흐렸고 시험이 끝날 무렵엔 빗방울이 묵직하게 떨어졌다. 누군가에겐 그저 평범한 가을비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날의 나에겐, 회색빛 하늘 끝에서 차가운 비가 내리던 하루였다. 거실 소파에 앉아, 하염없이 둥근 시계를 바라보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어느새 나는 우산을 든 채, 학교 교문 앞을 서성이고 있었다. 그날의 시계는 유난히 느리게 흘렀고, 빗물의 냉기가 어깨부터 발끝까지 스며들었다. 피곤한 아이의 얼굴이 교문 틈에 보이는 순간, 온몸에 환한 온기가 돌았다. 온종일 멈춰 있던 마음의 시계가 비로소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2018년 11월, 영국 BBC는 수능일을 “침묵이 내려앉는 날”이라 불렀다. 그날, 도시는 수능을 위해 조용히 멈췄다. 지각한 수험생을 실은 경찰 오토바이의 사이렌 소리만이 그 정적을 잠시 흔들었다. 그 기사를 읽으며 고개가 절로 끄덕여졌다. 정말 수능 날의 공기는 세상이 아이들의 간절한 마음에 맞춰 조용히 숨을 고르는 것 같았다. 그래서일까. 우리 사회에서 ‘고3’이라는 말은 유난히 애틋하고 조금은 아픈 시절로 되돌아가게 하는 시간의 단어다.


아이의 고3이 끝나면 수험생 엄마의 시간도 제 속도를 되찾는다. 그리고 그 고통스러웠던 시간은 놀랍도록 쉽게 잊힌다. 나 역시 그랬다. 다시는 떠올리고 싶지 않았던 기억들, 잊고 싶던 밤들이 아이의 졸업과 함께 희미해진다. 남은 건 막연한 안타까움과 조금의 안쓰러움뿐. 그 시절의 모든 감정은 저 멀리 바람에 날려 보냈다.


둘째가 고3이 되면서 큰 애때 겪었던 수험생 엄마로서의 예전 기억이 천천히 되살아난다. 하지만 이미 한 번 스쳐간 탓일까. 이제는 그다지 큰 떨림은 없다. 처음 패였던 긴장의 상처가 잘 아문 탓인지, 아니면 조바심 낸들 달라질 게 없다는 걸 이제야 알게 된 탓인지 모르겠다. 그러면서도 길가에 돌탑이 보이면 나는 꼭 돌 하나를 올린다. 겉으로는 덤덤한 척하지만, 속으로는 누군가에게 빌고 싶은 마음이 손끝을 움직인다. 엄마의 백일기도보다 아이의 백일 공부가 더 중요하다는 걸 알면서도, 수능이 다가오면 이상하게 모든 것에 기도하고 싶어진다. 어쩌면 그래서일지도 모른다. 올해 수능 날도 또다시 추운 이유가. 세상 곳곳에서 불려 온 신들이 엄마들의 염원을 이고 대한민국의 하늘을 천천히 떠돌고 있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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