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문이 자라는 교실에서
학생들의 교육에 진심인 선생님들에게는 저마다 특별한 기운이 있다. 무거운 노트북을 메고 전국의 초중고를 다니는 ‘보부상 강사’인 나는 그 기운을 누구보다 잘 느낀다. 숨 쉴 틈 없는 일정 속에서도 아이들의 내일을 이야기할 때면, 선생님들의 눈빛이 반짝인다. 교사는 세상의 누구보다 학생들의 미래를 걱정하고 아이들을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믿는다. 하지만 지금의 교육 현실 속에서 그 마음을 온전히 드러내기란 쉽지 않다. 학교마다 스며 있는 공기의 결은 다르다. 그 공기를 바꾸는 건 언제나 사람이다. 변화를 바라는 교사의 한 끗 신념, 그리고 실낱같은 용기. 그것이 오늘의 교실을 밝히는 작은 불빛이 된다.
얼마 전, 서울의 한 중학교를 올해 두 번째로 찾았다. 1학기에는 아이들이 이미 만든 질문을 함께 다듬으며 대화를 나누는 수업을 진행했다. 이번에는 다른 1학년 학생들과 함께 도덕 과목 프로젝트의 한 과정으로 들어갔다. 주제는 ‘정체성과 미래 사회’. 이번 수업은 아이들이 직접 키워드를 뽑고, 스스로 질문을 만들어 ‘나’를 성찰하는 시간이었다.
1학기와 2학기 수업 교재로 사용한 요시타케 신스케의 『이게 정말 나일까?』는 다양한 각도로 수업 변주가 가능한 그림책이다. 작가는 만화처럼 익숙한 그림체 속에 ‘나의 정체성’이라는 철학적 질문을 쉽고 유쾌하게 담아냈다. 이야기는 숙제도, 심부름도, 방 청소도 하기 싫은 아이 지후가 자신을 대신할 로봇을 사면서 시작된다. 주인공과 로봇이 나누는 대화 속에 ‘나는 누구인가’라는 묵직한 물음이 숨어 있어, 중학생부터 성인까지 토론하기에 좋은 작품이다. 이 책을 읽은 사람들은 나이와 상황에 따라 다른 감상과 의미를 마음 속에 품는다. 하지만 짧은 시간 안에 한 번 읽고 이 책의 주제를 깊이 나누기란, 여전히 쉽지 않은 일이다.
학교 선생님은 미리 책을 준비해 아이들이 내용을 충분히 읽고 생각할 시간을 충분히 주었다. 덕분에 수업 중에는 줄거리를 복습하는 대신, 책을 바탕으로 한 확장 활동에 집중할 수 있었다. 1학기 수업이 아이들이 직접 만든 질문을 중심으로 ‘나’를 알아보는 과정이었다면, 2학기 수업은 조금 다른 방향으로 나아갔다. 수업 전 인터뷰에서 선생님은 이번 프로젝트의 제목이 ‘디지털 자아를 위한 새로운 약속 만들기’라고 설명해 주셨다. 1학기처럼 아이들이 편하게 친구들과 이야기할 기회만 줘도 좋다고 하셨지만, 대화를 나누다 보니 빠르게 변하는 디지털 사회에서 학생들이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으로 중심을 잡길 바라는 마음이 읽혔다. 아이들의 내일을 걱정하면서도, 그들이 스스로 성장하길 믿는 선생님의 마음이었다. 나 역시 그 뜻에 공감하며, 아이들이 스스로를 더 깊이 탐색하고 ‘나’를 정의할 수 있는 새로운 활동을 더해 보기로 했다.
그 활동 중 하나가 ‘이미지로 나다움을 표현하기’였다. 학생들은 자신이 생각하는 ‘나답다’의 뜻을 떠올린 뒤, 그 느낌과 가장 가까운 이미지 카드를 골랐다. 그리고 그 이유를 한 문장으로 적었다. 어떤 아이는 좋아하는 일을 할 때의 들뜸을, 또 다른 아이는 누군가를 돕는 순간의 기쁨을 이야기했다. 어떤 아이는 혼자 있는 시간의 고마움을, 또 다른 아이는 타인의 시선 속에서의 자신을 떠올렸다. 이미지는 말보다 먼저 마음을 보여 주는 언어였다. 그렇게 ‘나다움’은 학생들이 일상에서 품고 있던 생각과 마음결로 다양하게 변주되었다.
이어 조별로 하나의 중심 키워드를 정하고, 각자 자신만의 질문을 만들었다. ‘나에 관한 궁금증’, ‘나다움을 형성한 사람이나 경험’, ‘아무도 대신할 수 없는 나’, ‘나다움’— 네 가지 키워드는 아이들의 질문 속에서 다시 태어났다. 어떤 아이는 “나다움을 누가 정하는 걸까?”라고 물었고, 또 어떤 아이는 “인공지능과 함께 일하는 시대에 인간의 나다움은 어디서 시작될까?”라고 물었다. 스삭거리는 네임펜 소리와 간간이 터져 나오는 웃음 속에서, 질문들과 답변들이 교실을 천천히 채워 갔다. 하얀 전지 위에는 서로의 생각이 겹치며 작은 꽃잎처럼 번져 나갔다.
수업을 마친 뒤, 선생님은 아이들의 흔적을 천천히 살피며 미소 지었다.
“우리 학생들이 이렇게 깊이 있는 질문을 던질 줄 몰랐어요. 더 열심히 준비해야겠네요.”
늘 학생들을 위해 애쓰는 분이지만, 아이들의 열정이 선생님에게 또 하나의 숙제를 안긴 듯했다. 그날의 교실에는 오랫동안 잊히지 않을 선생님의 표정 하나가 남았다.
지난 11월 4일, 국회의 시정연설에서 이재명 대통령은 “농경 사회에서 산업 사회로, 산업 사회에서 정보 사회로 전환해 왔던 것처럼 AI 사회로의 전환은 필연”이라고 말했다. 이제는 인공지능을 받아들일지 말지를 선택하는 단계가 아니라, 빠르게 발전하는 기술과 함께 살아갈 방식을 준비해야 할 때다. 다른 나라들은 이미 AI 개발에 뛰어들어, 새로운 미래를 향해 달리고 있다. 뒤늦게 출발한 우리는 ‘불안’이 아니라 ‘희망’으로 협업의 시대를 준비해야 한다. 그 희망을 지탱하는 힘은 아이들이 스스로 묻고 답하는 능력에서 나온다. 온라인과 오프라인의 경계가 사라질 미래, 그래서 ‘나다움’을 고민하고 성찰하는 교육이 더욱 필요하다.
아직은 디지털 교과서와 학과 과정을 둘러싼 혼란이 가득한 시기다. 그럼에도 교실은 멈출 수 없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대통령 넬슨 만델라는 “교육은 세상을 바꿀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무기”라고 말했다. 이 학교 선생님들의 다양한 시도는 분명 아이들의 미래에 큰 힘이 될 것이다. 물론 위기와 혼란 속에서 잠시 멈추고 싶을 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지나온 경험이 지금의 교실을 만들었듯, 중심을 잃지 않고 나아간다면 어떤 상황에서도 다시 길을 찾을 수 있으리라 믿는다. 결국 우리는, 그 길 위에서 서로의 걸음을 배워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