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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만히, 몸이 말을 걸어올 때

by 하늘진주

때때로 몸이 마음보다 먼저 지혜를 담아 말을 걸어올 때가 있다. 한 달 전, 지하철에서 노트북을 짊어지고 내리다 내 몸에서 삐걱대는 소리를 들었다. 그 이후 허리와 다리에서 아릿하게 전해오는 통증들. 나는 그 작은 신호들을 들었지만, 적극적으로 응답하는 순간 강제로 멈춰야 할 일상이 드러날 것 같아 애써 외면했다.


견디다 못해 병원을 찾았다가 당분간 필라테스를 쉬어야 한다는 진단을 받았다. 예상은 했지만, 막상 의사의 단호한 말이 닿는 순간 마음속 어딘가에서 봉합해 두었던 감정들이 파르르 날개를 펴며 튀어나왔다. 깊게 눌러두었던 판도라의 상자 속 온갖 걱정과 불안들이 활개를 치며 파닥거렸다.


나이가 들수록 좋아하는 운동을 오래 이어가는 일은 쉽지 않다. 운동을 좋아하지 않는 나에게는 더욱 그랬다. 헬스도, 순환 운동도, 걷기도 오래 붙잡지 못했다. 그런데 필라테스만은 달랐다. 3년 넘게 주 3~4일, 정해진 요일마다 센터로 향했고 그 시간은 어느새 내 일상 가까이에 단단히 자리 잡았다.


천천히 스며들던 움직임은 하루 50분씩 쌓이며 어느 순간 내 삶을 지탱하는 리듬이 되었다. 센터의 기구 앞 초록색 매트에 누우면 몸이 먼저 숨을 고르며 기뻐하는 듯했다. 선생님의 차분한 목소리에 맞춰 들숨과 날숨을 고르고 척추를 천천히 말아 올리면, 잠들어 있던 작은 근육들이 저마다 주장을 하며 깨어났다. 어떤 날은 다리가, 어떤 날은 허리가 삐걱이며 평소의 나쁜 습관과 바쁜 일상에 관해 항의했다. 필라테스는 단순한 운동이 아니라, 내가 내버려 두었던 내 몸을 돌보고 혼자만의 고독을 채우는 방식이었다.


글을 쓰겠다고 마음먹은 이후 홀로 쓰는 일은 외로웠다. 그래서일까. 작가 중에는 몸을 움직이며 생각을 정리하고 마음의 자리를 채우는 사람들이 많다. 달리기를 사랑해 책까지 낸 일본의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는 매일 달리며 자신의 질서를 세우고 글쓰기의 지혜를 배웠다고 한다. 나 역시 필라테스를 하며 호흡과 하루의 무게를 정리했고, 글 쓰는 마음을 키웠다. 글쓰기는 생각을 정제하는 일이고, 몸이 건강할 때 그 의지가 더 타오른다. 그래서였을까. 의사가 “당장 필라테스를 그만둬야 합니다.”라고 말했을 때, 내게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병원의 천장도, 의사의 표정도 아니었다. 익숙한 조명 아래 놓인 초록색 매트를 떠나 글 쓰지 않는 내 모습이 흐트러질까 봐 더 두려웠다.


선천적인 척추 결함이 이번 통증의 원인이라는 말을 들으며 마음 한편이 서늘해졌다. 건강을 위해 멈춰야 한다는 사실은 이해했지만, 내가 아끼던 시간과 즐거움을 잃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오래 남았다. 나이가 들수록 왜 좋아하는 것들이 먼저 멀어지려 하는 걸까. 그날 이후로 마음은 계속 흔들린다. 조금 무리해서라도 계속하고 싶은 마음과, 더는 아프지 않기 위해 멈춰야 한다는 마음이 하루에도 여러 번 엇갈리고 부딪힌다. 아파서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건강을 위해 잠시 멈춘다고 믿고 싶지만, 그조차 쉽지 않다. 이대로 그만두면 필라테스에서도 ‘허약한 포기자’가 되는 건 아닐까 하는 마음도 든다.


돌이켜보면, 살을 빼기 위해 시작했던 필라테스는 그보다 훨씬 많은 것을 내게 남겼다. 게으르던 나에게 부지런함을, 불규칙한 하루 속에서 반복의 힘을, 그리고 몸을 대하는 새로운 시선을. 그 시간들은 조용하지만 꾸준히 나를 단단하게 만들었다. 아직 결론을 내리기 어렵다. 가능하다면 다시 매트 위에 누워 깊은숨을 들이쉴 수 있으리라는 믿음을 놓고 싶지 않다. 단번의 끊어냄보다, 천천히 거리를 조절하며 마음을 정리할 시간이 나에게는 더 필요하다. 좋아하는 기쁨과 지켜야 하는 조심 사이에서 마음이 계속 흔들린다.


하나만 선택해야 하는 나이 듦이 서늘하고, 끝내 놓지 못하는 내 마음도 서글프다. 시간이 더 흐르고 나면 무엇이 남을까. 안정을 지키려는 마음일까, 기쁨을 붙들려는 마음일까. 나는 아직 알지 못한다. 다만 어느 방향으로 걷게 되더라도 그 길 어딘가에 잠시 쉬어갈 작은 매트 한 장, 다시 숨을 고를 수 있는 조용한 자리 하나는 언젠가 내 앞에 펼쳐지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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