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 나의 음악취향 연대기
기본적으로 음악은 장르를 가리지 않고 듣는 편이지만, 성장과정에 있어 각 시기별로 심취해 들었던 음악 장르들이 있었다.
1. 유아기 때부터 한국가요는 (당시에는 KPOP이라는 명칭이 나오기도 전이었기에) 항상 가까이 있었고, 르네상스기라고 할 수 있는 90년대의 한국가요 수십 곡은 아직도 내 플레이리스트에 자리 잡고 있다. (5살 때 나의 애창곡은 김건모의 핑계였고, 8살 때 클럽 HOT를 자처하고 강타가 최애였던 아이였다.)
2. 다만 청소년기에 접어든 2000년대 초중반, 소몰이 알앤비와 근본 없는 댄스곡들로 한국가요의 수준은 갑자기 낮아졌으며, 그 대체수단으로 나는 JPOP과 팝송에 눈을 돌리게 된다. (당시에 오타쿠 수준으로 일본드라마와, 아메리칸 아이돌(AI)이라는 오디션 프로그램에 심취해 있었다.)
90~00년대 JPOP은 보물창고와 같아서 새로운 아티스트를 발굴하며 듣는 맛이 있었고, AI를 통해 접하는 올드팝들은, 팝역사를 공부하는 하나의 교양수업과도 같이 느껴졌기에 세계 대중가요에 대한 식견을 넓혀가는 재미가 있었다.
무엇보다, 주변과는 다른 음악을 듣는, 독특한 취향을 가지고 있다며 중2병의 허세를 채워준다는 면에서, INFP 중고생인 내가 필연적으로 KPOP 외의 장르에 빠져들 수밖에 없었던 거 같다. (심지어는 중국가요, 러시아가요까지 찾아 듣는 행태를 보였다..)
3. 미스터 칠드런이라는 일본밴드는 내 세계관의 일부가 될 정도로 성장기에 큰 영향을 미쳤고, 일본어를 독학하며, 고등학교 졸업 직후 일본대학에 진학하게 되었는데, 도일 이후, JPOP과는 자연스럽게 멀어지게 되었다. JPOP이 주류인 환경에서, JPOP을 듣는다는 건 더 이상 비주류 향유층이 아니게 된다는 점에서 흥미가 떨어진 측면도 있을 수 있지만, 2000년대 중후반부터 JPOP은 발전 없는 과거의 답습, 심지어 음악성조차 퇴행하며 지금에 이르고 있다는 게 개인적인 견해이다. (나는 케이팝, 제이팝, 팝송을 선택함에 있어, 거의 철저하다시피 각 시장의 메이저한 대중가요를 선택해 듣는 라이트 리스너이다. 인디솔로, 인디밴드 등은 내 선택지에 없었기에 JROCK이나 일본밴드의 관해서는 문외한에 가까워 그 수준을 논할 수 없다.)
그리고 가창을 좋아하여 보컬리스트를 동경하는 동시에 평가하는 것도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AI의 영향을 받은듯 하다), 일본 아티스트들은 아무리 일본 한정 대단한 가창력의 보컬로 평가받는다고 해도, 발성 호흡 등 기본기가 부족한 경우가 많아, 정석적인 보컬 (+ 상품가치가 있는 음색과 개성)을 높게 평가하는 리스너가 된 이후로 JPOP을 즐겨 듣지 않게 되었다.
4.2000년대 후반, 빅뱅, 카라, 소녀시대를 필두로 일본에도 케이팝의 붐이 불어왔지만 여전히 내 귀에 차지 않았고, 대학시절엔 빌보드 위주로 영혼 없이 음악을 소비하고 있었던 거 같다.
하지만 군입대 이후 KPOP의 매력에 눈을 뜨게 되었고, 누구보다 적극적으로 소비하게 되었다. KPOP 붐이 일어난 이후, 해외 작곡가들의 손을 빌린 곡들이 늘어나며, 확실히 그 수준이 올라간 걸 체감했던 것 같다. 하지만 어떤 그룹이나 솔로가수를 적극적으로 응원하며 팬을 자처하는 경우는 없었다. 다만 어렸을 때부터 접해온 스엠 아티스트들의 곡들은, 90년대부터 이어진 소속사의 색이 남아있는 경향이 있어 자연스럽게 손이 갔던 것 같다.
특별할 건 없지만 이게 30대 초반까지의 나의 리스너 연대기, 였다. 사실 이렇게 정리하고 기록하게 된 배경에는, 내가 엔시티라는 보이그룹에 심취하게 된 이유를 고찰해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나의 KPOP 소비성향은 대부분의 한국 대중들이 그렇듯이 걸그룹 위주였고, 보이그룹은 방탄, 엑소, 샤이니의 전곡을 꿰고 있는 정도였다. 어렸을 때부터 누나의 영향으로 자연스럽게 스엠의 음악을 접했던 터라 (누나 따라 신화 콘서트에 몇 번 간 적이 있다), 스엠 아티스트들은 기본적으로 애정을 가지고 팔로우하고 있었고, 2016년 데뷔한 엔시티도 관심 있게 지켜보고 있던 터였다. 하지만 그들의 노래는, 데뷔곡 포함 그 후에 발매된 곡들을 아무리 들어보아도 소음으로 밖에 들리지 않았고, 스엠의 기획력을 개탄하며 이 그룹은 쓰레기라는 극단적인 평을 했고 이제 스엠도 내리막이구나 했던 기억이 난다. 2021년 발매된 127의 3집 타이틀곡 "Sticker"는 그 정점에 있었다. 곡 도입부부터 시작되는 피리소리는 너무나 귀에 거슬렸고, 곡 전체를 통틀어 소음으로 도배되었다는 생각을 하며, 스엠과의 의리를 생각하며 5번 정도 참고 듣다가 끝내 플리에서 지워버렸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사람은 결국 익숙한 것에 끌리게 되어있나 보다. 입덕의 시작을 알린, 3집의 후속곡 Favorite (Vampire) 가 발매되었다. 그 사운드와 가사는 내가 과거 스엠 보이그룹 신화에서 접했던 그것이었다. 그 당시 내가 처해있는 상황과 맞물리며 이 곡을 듣는 횟수가 늘어났고, 어쩌면 엔시티의 곡들이 생각보다 들을만할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과거 발표된 엔시티 127, 엔시티 드림, 엔시티 U의 곡들을 하나씩 섭렵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일순간, 눈이 떠지는 듯이 소음 같았던 곡들의 바이브가 한순간 이해되기 시작했다. 한마디로 "공명". 그리고 전곡이 명곡으로 들리기 시작하기에 이르렀다.
아마 엔시티의 곡들이 사랑 위주의 가사였다면 내가 입덕까지 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내가 덕질을 하는 유닛은 엔시티 안에서도 127인데, 그들이 발표한 곡들의 테마는 대부분 "상승하는 이미지"를 그리고 있다. 어제보다 한발 나아간 나를 그릴 수 있게 도와준다. (물론 다른 케이팝 아이돌들이 많이 쓰는 테마지만, 엔시티 곡들의 특별함이 있다. 이는 별도로 고찰해보고 싶다.)
지난 2년의 시간을 보내는 동안, 10년 가까이 근속하던 회사에 휴직계를 내야 할 정도로 체력과 멘탈이 바닥을 쳤던 시기가 있었고, 목소리가 나오지 않아 누구와 대화조차 하고 싶지 않았던 시기에 나를 구해준 것이 그들의 음악이었다. 그렇게 나는 난생처음으로 아이돌의 팬클럽이라는 것에 가입하고 응원봉이라는 것도 사봤으며, 콘서트는 도쿄는 물론, 스케줄이 맞지 않으면 오사카까지 원정 가는 지경에 이르렀다.
사실 엄밀히 말하면 나는 스엠 A&R팀의 팬이다. 아이돌은 철저하게 상품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으로서, 물론 프로젝트를 매번 성공적으로 실현해 내는 각 멤버들에게 고맙게 생각하고 있지만, 내 취향에 맞는 곡, 가사를 세계 아티스트들과 협업하며 완성도 높은 아웃풋을 뽑아내는 제작진이 없다면 애초에 난 엔시티에 관심조차 가지지 않았을 것이다. (난 엔시티의 전곡을 다 들을 때까지 태용, 마크 외에는 멤버들 이름도 외우지 못했다. 아니 오히려 외면했다. 남자가 보이그룹을 좋아한다는 게 왠지 부끄러워서 철저하게 음악 위주로 소비하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이제는 뭐.. 모든 멤버들이 사랑스럽게 보인다.) 그래서 멤버들의 스캔들이 터진다고 해도 사실 큰 관심은 없다. (물론 걱정은 된다..) 다만 투자규모가 축소돼서 다음 프로젝트의 퀄리티가 떨어지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