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젊은 것들은 버릇이 없다.’는 말이 문자 발생 이후로 꾸준히 기록되어왔다는 이야기를 좋아한다. 그것은 때때로 우리 세대를 이해하지 못하는 어른들로부터 변명이 되기도 했고 이해되지 않는 다음세대를 이해할 수 있는 명분이 되기도 한다.
나 역시 별반 다르지 않다. 나보다 어린 친구들에게는 젊은 꼰대로 존재하고 부정할 생각도 없지만, 그래도 내가 염두에 두고 살아가고 싶은 것은 초행자에게는 조금 더 관대한 사회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건 마치 산행을 할 때, 오르는 사람들을 향해 ‘이제 거의 다 왔어요.’하고 따봉 한 번 날려주는 응원과 같은 종류의 것이라서 ‘나도 했으니 당신도.’정도의 가벼운 호의로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인생은 산행과도 같다고들 하면서 보다 엄격한 잣대로 사람들을 바라보고 있다는 생각을 거둘 수 없다. 내가 밟은 돌을 밟지 않았다고 해서, 내가 잡은 나뭇가지를 잡지 않았다는 이유로 ‘틀린 길을 가는 것이니 정상에 도달하지 못할 것.’이라고 하는 것만 같다.
물론 나 역시 내가 이해할 수 있는 일들만 이해하며 살아갈 뿐이지만 날카로운 말이 해법이 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나그네의 옷을 벗긴 것이 햇볕이었듯 쌩쌩 부는 바람으로 누군가를 굴복시킬 수도 있겠지만 나에게 그러지 않기를 바라는 것처럼 타인에게도 내가 바라는 사람이고싶다.
어디선가 노인이 손주를 대하는 태도로 다음 세대를 바라보면 세대 갈등을 해결할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생각해보면 태어나기도 전에 돌아가신 할아버지는 아버지와 고모, 삼촌들에게는 엄격한 아버지였지만 며느리와 손주들에게는 그럴 수 없게 다정했다고 하고, 할머니는 오빠가 주방에 들어가면 큰일나는 줄 알았지만 나에게는 무엇도 강요하지 않았다.
밥도 할 줄 모르는 상태로 결혼한 엄마는 그런 것으로는 단 한 번도 주눅들어 본 적 없을 정도로 할머니는 엄마를 손주처럼 다독였다고 한다.
결국은 긴긴 산행의 어떤 길을 선택하든, 어떤 모습으로 오르든 그의 고유성을 인정하지 않으면 나와 다른 모든 것이 틀리게 보이는 오류를 범할 수 밖에 없다. 나는 타인의 고유성을 얼마나 인정하며 살아갈 수 있을까. 산의 중턱에 걸터앉아 올라오는 누군가를 보며 혀를 차고 있진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