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더 퍼지(The purge)로 본 이상의 세계
인간의 무한한 상상력을 통해 만들어지는 환상적이고 어쩌면 허구적일 수 있는 세계는 다양하게 표현이 된다. 그리고 인간은 예로부터 자신이 속한 사회보다 완벽한 이상의 세계를 꿈꿔오고 잇다. 사소한 일상에서도 누군가의 상상력을 통하여 머릿속에 잠재된 환상 세계가 구현되고 그려진다. 또, 상상력을 통해 열리는 또 다른 세계는 각자의 욕구가 충족되는 이상향 적 세계를 표현하기도 하며, 그 가능성에 대해 끊임없이 모색하고 그곳으로의 가능성에 대해 달려가는 모습이 우리 삶에서 비치고 있다. 어릴 적부터 사람들은 허구의 실체 속에서 자신의 욕구를 대신 표현하고 외로움을 덜 어내며 심리적 위안을 삼아내려 한다. 물론 간혹 현실과 상상의 경계를 혼동하기도 하지만, 성장 과정에서 점차 그 경계를 정확히 구분하게 한다. 그러나 성인이 되고 나서도 인간은 자신의 욕구와 불만을 충족시켜줄 무언가를 계속해서 찾아내려 하고 현실도피적인 삶을 살아가려 한다. 이처럼 우리가 추구하는 “유토피아“ 적인 삶. 즉, 균형을 이루고 치열한 일상에서 벗어날 수 있는 자신만의 치유의 공간을 말한다. 유토피아는 고도로 발전하는 사회나 미미하게나마 발전한 사회는 우리의 삶을 안정적이고도 풍요롭게 만들 수 있다. 그러나 이상의 사회는 항상 유토피아 적인 모습만을 보여 줄 수는 없다. 모든 것에는 양면성이 있기 마련이다. 그것은 바로 “디스토피아“이다. 유토피아와는 반대 개념인 인간성이 파괴되는 사회이다. 영화 더 퍼지에서는 유토피아 삶 속에서 디스토피아라는 반대의 개념들을 보여주고 있다.
영화적 배경은 사상 최저 실업률과 범죄율 단 1%의 미국,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모습과는 달리 거의 완벽한 모습을 배경으로 하고 있고 흡사 유토피아 같은 나라가 된다. 이러한 배경은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모습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하지만, 범죄율과 실업률이 줄어든 이상적인 모습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그러나 매년 단 하루, 12시간 동안 살인은 물론 어떠한 범죄도 허용되는 ‘퍼지 데이’는 폭력과 잔혹함을 보여주는 것은 유토피아적인 삶에서 벗어나 디스토피아적인 삶을 그대로 표현해 내고 있다. 어쩌면 유토피아적인 삶은 모두가 잘 사는 모습도 있겠지만, 부유한 사람이 있으면 가난한 사람도 있듯이 양면성을 보여준다.
돈이 많은 사람은 자신을 보호할 목적을 위해 아낌없이 보안장치에 투자를 해 목숨을 부지할 수 있다. 하지만 반대의 경우에는 무분별하게 쏟아지는 분노의 희생자가 될 공산이 크다. 이것은 굉장히 살벌한 사회인 동시에 지극히 현실적인 감각의 반영이라고 할 수 있다. 퍼지가 인간의 악한 본성을 표출하여 범죄율을 낮춘다는 목적으로 표현하려 하지만, 대부분의 소시민은 상류층의 일그러진 욕망을 채워 주는 먹잇감이 될 수밖에 없다.
영화에서는 이러한 두 가지의 모습을 보여주지만 그 안에는 인간의 억압된 욕망들을 말하지 않을 수가 없다. 욕망이란 즉, 인간이 가지고 있는 고유한 특성들이다. 특성들이란 폭력성을 표현하고 있다. 인간은 금기를 어기고 싶어 하는 심리가 있다. 정확히 말하면 억제된 욕망을 풀고 싶어 한다는 것으로도 말할 수 있다. 사람들 내면에 감춰진 폭력성은 범죄가 허용되는 그 순간만큼 양심에 아무런 가책 없이 무자비하게 표출을 하고 있다. 낮에는 웃으며 인사하고 밤에는 위선적인 가면을 벗고 마는 잔혹한 현실이 어쩌면 우리의 삶과도 똑같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해본다. 영화 속 대사 중에는 “Stay Safe"라는 말이 나온다. 이 말은 법이 없는 날은 조심하라는 의미이기도 하지만 형식적인 말일뿐만 아니라 경계를 늦추지 말라고도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영화 속 디스토피아적인 사회구조는 대략 빈곤/부의 독점, 폭력/범죄로 나누어 보게 된다. 이러한 삶은 예전부터 그래 왔고 미래에도 이렇게 되지 않을 것이라는 보장은 없다 생각한다. 우리는 희망에 부풀거나 단적인 부분만 바라고 원하기에 이러한 양면성을 쉽게 놓치고 간과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유토피아적 이상 사회는 도덕성, 정치적, 경제적, 사회 문화적으로도 완벽한 세계일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이상적인 세계는 현실적으로 볼 때 허구적인 존재일 수밖에 없다 생각한다. 어디에도 없는 장소인 유토피아 같은 사회는 상상으로는 완벽하게 그릴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우리의 사회가 유토피아적 삶을 개척해 나간다 해도 디스토피아적인 삶이 나타나기 마련이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는 부유하거나 완벽하게 다 잘 살아갈 수는 없기 때문이다. 영화에서의 모습이 바로 그것이다. 자유롭고 완벽에 가까운 유토피아적 삶이지만 1년 중 단 하루 인간의 욕망들이 보여주는 그러한 모습을 보면 말이다.
유토피아가 말 그대로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허구적인 것인 분명하다면 지금까지의 인류의 역사는 디스토피아 속에서 나온 것이라 해도 무방할 것이다. 그렇지만 디스토피아적인 삶으로만 지금 우리가 존재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도 해본다. 우리는 유토피아적 삶을 추구하기에 위험요소들을 인식하고 개선해 왔다. 그리고 지금도 그러한 사회를 향해 달려 나가고 있고 다가올 수도 있는 미래이기에 허구적이지만 희망을 주는 요소라고도 생각을 한다. 영화 속에서 보여주는 폭력성들은 이상의 세계와 동떨어진 모습을 보여준다. 그러나 인간이 가지고 있는 욕망과 특성들은 항상 품고 살아나갈 수밖에 없기 때문에 그 부분도 이해하고 안고 살아 나아가야 한다 생각을 한다. 오늘날 우리는 많은 매체들 중에서 특히 영화를 통해 이상적인 두 가지의 모습을 볼 수가 있다. 미래사회가 단지 유토피아인가, 디스토피아인가를 예측하는 것에 집착하고 꿈꾸는 것보다 우리를 둘러싼 현시대의 무수한 상징과 갈등들을 좀 더 원만하게 해결하고 개척을 할 필요가 있다. 개인과 집단이 어떠한 의지를 선택하고 실현하느냐에 따라 미래가 달라질 것이라는 것을 주체적으로 인식하는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그래야만 우리가 원하는 유토피아적인 삶에 비슷하게라도 다가설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