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국지사 그 너머의 안중근
좀처럼 타인에게 관심을 잘 두지 않는 나이지만, ‘더 알고 싶다’라는 흥미를 불러일으키는 사람이 있다. 그런 존재들은 나에게 흙 속에서 진주를 캐내는 듯한 강한 몰입감을 주기도 한다. 그런 존재들은 내 일상 속에 있기도 하지만, 현재의 시간 너머에 존재하기도 한다.
영화 <하얼빈>을 보고 나서, ‘안중근’이라는 인물은 나에게 그런 존재가 되었다. 애초에 하얼빈을 본 것은 자의적인 선택이 아니었다. 누구나 알고 있는 안중근이라는 인물이 하얼빈에서 어떤 일을 했는지, 별로 궁금할 것도 없었다. 결말까지 이미 알고 있는 영화가 과연 매혹적일 수 있을까 싶었고, 그저 어쩌다 보게 된 영화 중 하나였다. 영화 하얼빈의 내용은 역시 알려진 역사적 사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나의 이목을 끈 부분이 몇 가지 있었다.
첫째, 안중근이 일본군 포로를 풀어주었다는 사실이 영화 초반에 나온다. 이로 인해 동지들에게 반발을 사기도 했고, 결과적으로 그때 살아난 일본 포로 장수가 영화 끝까지 안중근을 쫓으며 긴장감을 유발하는 존재로 작용한다. 동지들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그런 결단을 내린 안중근을 보며, 그는 평범한 리더가 아님을 직관적으로 알 수 있었다. 그는 분명 자신만의 철학에 따라 행동하는 사람이었다.
둘째, 영화에서 동지 중 한 명이 밀정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안중근은 그 동지마저 품어주는 태도를 보인다. 그는 동지가 잠시 방황하는 시기를 겪고 있을 뿐, 결국 다시 우리 곁으로 돌아올 것이라고 믿었다. 영화 말미에서는 밀정 역할을 했던 동지가 다시 돌아오게 된다. 이는 약간의 영화적 각색이지만, 안중근의 인격적 면모를 강조하는 장면으로 느껴졌다.
영화 말미의 “꼬레아우라”라는 외침은 내게 선명히 남았다. 집에 돌아와서는 안중근에 대해 홀린 듯 이것저것 찾아보기 시작했다. 그가 일본인 순사를 감화시켰다는 일화나 그의 저서 제목이 단순히 조선평화론이나 한국평화론이 아닌 <동양평화론>이라는 사실이 흥미로웠다. 내가 느끼기에 그는 평범한 애국지사가 아니었다. 민족주의를 넘어선, 무언가 특별한 것이 그에게 있었다는 느낌을 받았다. 애국지사라는 단어 하나만으로 다 담을 수 없는 그만의 독특한 정체성이 있었다.
나는 그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