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소은성 Sep 15. 2018

매일매일 내 강아지의 죽음을
연습했던 때가 있었다

무언가를 사랑하는 모든 마음은 푸르딩딩한 멍이다. 

그러려니 하여 주시라. 산책을 하다, 마을버스 뒷자리에서, 카페에서 찻잔을 내려놓으며 불현듯 두 눈을 꼭 감고 5분간 가만히 머무는 수상한 여자를 보게 된다면. 그 여자의 머릿 속엔 이러한 문장이 차례차례 일어서고 있다. 

‘우선 반짝이던 새까만 눈동자는 탁한 검정이 된다. 다음엔 보들보들한 조그만 몸이 차고 단단하게 굳어버린다. 다시는, 불러도 달려오지 않는다. 그러니 실수로라도 그 이름 부르면 안 돼. 그래선 안 돼.’ 


중얼중얼 열심히. 이미지 트레이닝은 이내 어려워진다. 겪어보지 않은 것을 상상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니까. 공 없이 하는 스윙 연습이란 매번 헛스윙이 고작이다. 


두려움 때문이다. 하여간에 무지막지하게 겁이 나서, 나는 매일매일 나의 개의 죽음을 연습한다. 이 엉뚱한 <상실대비 5분 트레이닝>에 대해 어머니께 전하면 “아이고, 쓸데없는 짓은 네가 일등이다”하며 혀를 쯧쯧 차실지 모르지만. 주인의 스무 살과 함께 첫 생을 시작해 이제는 나를 앞질러 저 먼저 할머니가 된 개의 몸 앞에서, 하루하루가 귀하고 두렵다. 


개는 밀레니엄으로 온 지구가 떠들썩하던 그 해 부활절에 우리에게 왔다. 

“얘 오빠는 똥꼬가 막혀 죽고, 얘 언니는 태어난 날 젖을 못 빨고 죽었어요. 

혼자 살아남다니 대단한 아이죠?” 

셋 중 가장 작게 났다는 꼬맹이의 질긴 생명력이 기특했다. (이제는 뭘 던져도 시큰둥하게 콧방귀나 풍풍 뀌지만) 흰둥이가 한때 가장 좋아한 건 아버지가 동그랗게 말아 던지는 흰 양말이었다. 백번을 던져도 백번 다 최선을 다했다. 개는 크고 용맹해야지 여리하고 작은 개는 낯설다던 아버지가 자신의 퇴근을 축제처럼 환호하는 이 놈을 아들딸보다 예뻐하게 된 건 당연지사. 


살코기가 고스란히 붙은 갈빗대를 싸다 줘서, 개 버릇 다 버린다며 어머니께 늘 야단맞던 아버지는 개가 두 살 되던 해 주무시다 고요히 가셨다. 아버지를 묻고 와 마루에 불도 켜지 않고 우두커니 앉아 있던 밤, 녀석이 용기를 내 다가와 슬며시 제 몸을 붙여 오던 감촉을 기억한다. 세상에서 가장 중대한 임무를 수행하는 것처럼 어머니와 나와 동생을 돌아가며 눈물을 핥아줬다. 조심조심, 살살살, 정성껏, 아주 오래오래.






기운내라며 친구가 보여 준 연극에 하필이면 관을 내리는 장면이 나와, 황급히 돌아와 따스한 개를 끌어안았을 때의 안도감을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 사람이 죽으면 모든 게 無가 된다는 명제를 말하고 쓰고 읽고 알아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데에는 긴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다는 것. 그 동안은 그저 울다가 밥먹고 울다가 일하고 울다가 씻고 울다가 잘 수밖에 없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동안 늘 곁에는 말없이 녀석이 앉아 있었다. 오래 지켜보고 오래 핥아 주었다. 왜 이제는 아무도 양말을 던져 주지 않을까 어리둥절해하면서도, 모든 것을 다 안다는 듯한 표정으로. 


그러니 난생 처음 친구가 된 동물의 죽음을 두고, 삼십 몇 해나 살아 본 여자와 세살박이는 별 다를 게 없다. 그날이 오면, 뭐 그저 앙앙 울겠지, 밥도 안 먹고 160Cm의 술독이 돼 버리겠지. 실은, 너무도 잘 알고 있다. 애써 연습한 바보같은 5분 트레이닝 따위 꺼내 볼 정신도 없을 것이다. (‘도둑처럼’ 찾아올 그 날을 대비해 원고도 쟁여놨다. 오, 세상에나. 하나의 생명의 불꽃이 꺼지는데, 고작 A4 서너 장 정도의 활자나 염려하는 이 철저함이 가장 바보같다!)     


한 가지를 깊이 사랑하게 되면 눈물이 많아진다. 누가 사랑이 꽃분홍이라고 했나, 모든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은 푸르딩딩한 멍이다. 그 대상 때문에 웃는 시간과 우는 시간이 비례하며 나아가는 게 ‘진짜 사랑’이 아닐까,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다. 첫 연애를 시작하고 일찍이 알기야 알았지만 개를 키우며 여러 번 깨우친다. 


아기를 낳은 엄마들이 먼 나라 검은 피부의 아기들이 바싹 말라 우는 것만 봐도 눈물 홍수를 터뜨리듯, 나도 일요일마다 잠옷바람으로 <동물농장>을 보며 잉잉 운다. 유일한 말 나눔 친구를 잃은 홀로 사시는 할머니들은 남은 생을 또 어떻게 지탱하실까. 엄마를 잃은 채 꼬물거리는 어린 고양이 새끼들은 또 어떻게. 도시를 헤매다가 끈적이는 화학양품을 온몸에 뒤집어 쓰고 다리 하나를 잃은 늙은 개는 또 어떻게. 


외로운 생들이 어떻게 살아갈지 염려된 나는 브라운관 안으로 들어갈 듯 하다. 도울 수 없는 먼 곳에 있는 것들을 염려하고, 염려하는 만큼 할 수 있는 것은 없어서 그저 휴지뭉치만 잔뜩 생산할 뿐이지만. 뚱뚱하다고 놀림받는 여자 개그맨이 불쌍하다며 코미디 프로그램을 보고도 코가 맹맹하도록 울던 엄마는 무미건조한 딸을 향해 “눈물이 없어. 메마른 년” 늘 눈을 흘겼다. 그런 나를 천하 울보로 만든 나의 첫 개. 


이제 상상과 연습은 관두려 한다. 그 날이 오면 “저 여자, 고작 개 때문에 저렇게 정신을 잃고 우는 거야?” 란 말을 열 번도 더 듣겠다. 그게 스물 한 살, 그 여름에 개가 내게 준 위로에 답하는 거라고 생각한다. 하긴, 뭐 이미 매일 한 두번씩 코가 빨갛도록 훌쩍대고 있으니 며칠 우는 거야 뭐. 


내 개가 가엾기 시작하니 이제는 돼지도 불쌍하고 소도 가여워 채식 동호회를 두리번댄다. 지하철 계단에 두 손 모으고 엎드린 할머니도, 소주병을 들고 주문을 외우는 아저씨도 애달프다. 춥고 작고 힘없는 것들은 무조건 애달파하는 울보 어른이 됐다. 내 눈물샘 터뜨리기 시작한 얄미운 네 이놈, 내가 너 죽는 날 아주 기념비적으로 울어주마!      


*2013년 빅이슈 '일상다반사'에 연재 

 


사랑하는 것이 생기면 자꾸 말하고 싶어진다

모든 이야기의 시작은 결국 사랑.          



매거진의 이전글 가장 중요한 건, 너의 인디펜던트를 잃지 않는 것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