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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김치미러

죽지 않는 주안씨의 끔찍한 사랑 #1

김치미러

by X세기소년



어차피 마음에 드는 여자가 나올 때까지 구독을 끊을 생각은 없었다. 지난 수십 년간 ‘러버스’를 깔고 지우고를 백 번은 넘게 했다. 웃긴 건, 수십 년을 그렇게 버텼지만 정작 내 마음에 드는 여자와는 단 한 번도 매칭된 적이 없다는 것이다. 주변에서는 나를 (주제도 모르는) 까다로운 놈이라고 보았다.


“주안이 같은 애들 때문에 러버스가 먹고사는 거지. 얘 앞으로 백 년은 더 할 거야” 무탁은 여느 때처럼 나에게 비꼬듯 말했다. 같은 사회부 기자 생활을 했던 무탁은 사람의 껍데기를 벗겨보는 데는 천부적인 감각이 있었다. 그가 나를 까다로운 놈이라고 하는 데는 이유가 있었다. 나와는 달리 기자가 천직인 놈이었다.

“아예 없던 건 아니야. 정확히는 서로 마음에 든 적이 없던 거지.”

“그럼 눈을 낮춰. 데이팅 앱에서 완벽한 사람을 찾으니까 그러지.” 무탁은 정신없이 양꼬치를 뒤집어 가며 나를 슬슬 긁어대기 시작했다.

“저번에 매칭된 사람은? 어땠어. “ 무탁의 여자친구 세아가 자연스럽게 화제를 돌렸다.

“너무 오래 살았어.” 평소 같았으면 나도 에둘러 핑계를 댔겠지만 일부러 무탁이 세게 반응할 만한 대답을 했다. 괜히 더 심술이 났다.

“야-씨. 너 정신 차려. 어린 사람이 어딨어. 너 뭐 에버셀(Evercell)도 안 맞은 영퓨어(Young-Pure) 라도 만나게?”

“못 만날 이유라도 있나?”

“이유는 없지. 근데 걔네가 굳이 널 안 만나지. 야, 그리고 허구한 날 나랏돈으로 어플에다 돈 쓰면서 어? 수십 년 동안 여자 프로필이나 넘기면서 어린 여자나 나오기를 기다리는 노인네를 누가 좋아하냐? 너 그리고 십 년 동안 그걸로 진지하게 만나본 적이라도 있어? 없잖아. 그러니까 영퓨어들이 리싸이클 워킹제도 혐오하고 셀러(Celler)들이랑 선 긋고 갈라서는 거야. 말나온 김에 솔직히, 사회부 기자 출신이라는 놈이 리싸이클 워크나 신청한 것 자체가...”

"그만해." 세아가 내 표정을 읽고 무탁의 말을 가로막았다.


나는 그 순간 참지 못하고 벌겋게 달궈진 쇠꼬치를 테이블에 내려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무탁 역시 기가 찬 듯 벙찐 표정으로 나를 응시했고, 세아는 지긋지긋하다며 고개를 저었다. 문득 내 머릿속에 든 생각은 앞으로 이 좆같은 놈과 다시 마주하지 말아야 지였다.


세아에게는 짧게 사과의 말을 전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토요일 저녁인데 괜히 기분만 잡쳤다는 생각이 들었다. 집에 가는 지하철에서 다시 곱씹어보니 무탁이 한 말이 무조건 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우리는 함께 취재를 나가고 기사를 쓰던 그 시절부터 사회 현상에(특히 에버셀에 관해서는) 대해 깊게 고민하고 토론하곤 했다. 우리는 누구보다 에버셀에서 파생되는 각종 윤리 의식 문제나 세대 갈등에 큰 관심이 있었다. 그렇다고 우리는 에버셀을 강경하게 배척하는 극단주의자는 아니었지만 적어도 생명 연장에 대한 사회적 개인구성원의 작은 책임들이 수반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쉽게 말하자면 늘어진 수명이라고 해서 결코 잉여롭게 보내지 말자는 셀러들의 캠페인 같은 것이었다. 오히려 수명이 연장된 사회에서의 해결해야 할 문제가 너무 많기 때문이었다.


집으로 향하는 버스 안에서 여전히 억울하고 답답한 마음은 가시지 않았다. 이내 휴대폰에 짧은 진동이 울렸고 알람을 확인했다.


‘러버스들이 매칭을 위해 몰리는 피크타임입니다.’


나도 내가 좋아할 수 있는 사람을 만나고 싶었고 그게 설령 오랜 시간이 걸리더라도 참고 기다릴 준비가 되어 있었다. 하지만 나는 도무지 내 나이 또래의 여성이나 혹은 곱절이나 산 여성들과는 잘 맞지 않았다. 단순히 겉모습이나 성격이 중요한 게 아니었다. 누구나 주름하나 없는 팽팽한 얼굴을 유지하고 있으니 보통 대화나 반응을 통해 상대의 특성을 알아가곤 했다. 나는 통제가 안될 만큼 극단적이고 원색적이던가, 아니면 반대로 모든 신경이 다 죽은 듯한 무미건조한 상대들에게 질려있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입을 모아 시간이 지나 결국 이런 성향을 갖게 되었다고 말했다.


버스 안에서도 계속 러버스에 가입된 여자들을 엄선했다. 나는 마치 기업에서 까다로운 서류를 심사하듯 빠르게 수많은 프로필들을 훑어댔다. 이러한 일상이 지루하기는 했지만 필수적인 내 루틴이었다. 그나마 여자를 만날 수 있는 용이한 루트였기 때문이다. 그렇게 어쩌다 한 번씩 매칭이 되면 그나마 내가 선택한 사람과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대화가 잘 흘러가지 않거나 외모가 마음에 안 들면 다시는 안 보면 그만이었다. 물론 상대가 그런 적도 많았다. 한동안은 누구도 나를 설레게 하거나 흥미를 자극하지 않았다. 그건 내가 너무 오래 살아서 생긴 오류인지, 아니면 그들이 단지 사고하지 않는 젊은 껍데기만 남은 인간들이어서인지(사실 이건 선민의식이지만 쉽게 바뀌진 않을 것이다.) 구분을 할 수 없었다. 이따금씩 기억이란 게 지나치게 많아 괴롭다는 생각을 했다. 모든 대화는 이미 내 인생 어딘가에 저장된 문장의 반복 같았다. 사라지고 나타나고, 지고 피고, 지겹다가 조금은 다시 생각나는 각 계절마냥, 모든 것들이 오랜 시간에 걸쳐 뻔하게 흘렀고 앞으로도 계속 그럴 것 같았다.


배아.


“오래 산사람이랑 얘기해 보고 싶어요.”


그 소개글을 본 누구나가 속으로 그렇게 외쳤겠지만 나 역시 내가 적임자일 거라는 생각을 했다. 프로필을 자세히 들어가 보았다. 스무 살. YP(Young-Pure)다. 나이가 세 자리만 넘어도 같은 인간으로도 취급 안 한다는 그놈들이지만. 나는 더욱이 호기심이 생겼다.


곧장 유료 다이렉트 메시지를 결제해 그녀에게 쪽지를 보냈다.


“안녕하세요! “


쪽지가 전달되지 못했습니다: 죄송해요!


거절은 익숙하지만 설렘은 늘 낯설다. 얼굴이 잠깐 화끈 달아올랐지만 금방 괜찮아졌다. 어차피 아직 넘길 이성이 많다. 아니면 아닌 거고, 누군가는 나를 기다리고 있을 거라는 미지의 상상에 계속해서 탐색을 한다. 이 행위는 단순한 놀이를 너머 이제 내게 안정감까지 주는 것 같다. 불멸은 지독한 외로움을 품는다. 풋내기 사랑이나 지독한 사랑도 다 해보지 않았는가, 사실 이제는 누구를 만나야 할지도 몰랐다. 그렇다고 연애를 하고 있는 무탁이 부럽지는 않았다. 저들도 한때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심지어 이제 누군가에게 사랑한다고 애걸하는 내 얼굴과 감정의 톤에 너무 질려있었고 또 혐오했다. 그것들은 진정성을 잃었고 가증스러움만이 남아 있었다. 인간으로서 사랑하기에 너무나 많은 세월을 살아야 하지 않는가. 수많은 인연들은 지금 곁에 남지 않았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이런 무기력한 푸념이라도 누군가와 나누고 싶었다. 나는 세월의 흐름만큼 깊은 유대를 원했다.


휴대폰이 한번 더 울렸다.


전 훨씬 어린데 괜찮아요? 상관없으면 대화해요.


버스에서 내릴 때쯤 눈이 휘둥그레져 황급히 대화창을 열었다. 나는 곧장 회신을 했고 우리는 대화를 시작했다. 배아. 이름이 배아라고 했다. 이름 때문인지 그녀의 나이가 사뭇 더 실감이 났다. 대화를 시작한 지 몇 시간도 안 됐는데 나는 빨리 그녀를 만나보고 싶었다. 배아는 메시지에서부터 에너지가 통통 튀어 다녔다. 그래, 통통 튄다라는 말이 정확했다. 궁금한 게 무척이나 많아졌다. 다행인 건 그녀 역시 나에게 궁금한 게 많다는 것이었다. 흥미로운 질문이 오갔다. 이를 테면 가장 최근에 울음이 터진 게 언제냐는 질문이었다. 난 그게 언제인지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솔직히 대답하자 배아는 다른 비슷한 질문을 이어갔다. 그럼 가장 슬픈 기억이 있냐고 물었고 나는 일반적으로 우울한 감정을 갖고 산다고 대답했다. 왜 이렇게 대답한 지는 모르겠지만 거짓말하기는 싫었다. 나는 도리어 똑같은 질문을 되물었고 배아의 가장 슬픈 기억은 최근 부모님이 이혼했을 때라고 했다. 나 역시 한때 그랬다. 내가 성인이 되었을 때 부모는 서로 다른 사랑을 찾아 나섰다. 아마 지금은 그 이후로도 몇 번이고 서로의 파트너가 바뀌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도 그 감정을 알 수 있었다. 처음에는 우리 가족도 영원하길 바랐지만 세월을 견딜 수 있는 사랑은 그리 흔치 않았다. 특히나 젊은 신체를 유지하는 인간의 감정은 변화무쌍했다. 이 모든 걸 배아에게 알려주고 그녀의 고민을 들어주고 싶었다. 배아는 분명 긴 세월을 살아가기에 여러 시행착오가 필요해 보였다.


우리는 일요일 쨍쨍한 대낮에 양재천 인근 카페에서 만났다. 어색함에 취약한 나와 달리 배아는 모든 부분에서 나보다 더 자연스러워 보였다. 특히 내 나이를 듣고 무척이나 흥미로워했다. 배아의 관심사도 자연스럽게 에버셀(Evercell)로 이어졌다. 성인이 된 배아는 곧 에버셀을 주입할 시기가 다가왔기에 더욱이 궁금한 게 많아 보였다. 나 역시 궁금증이 생겼다.


“이름이 특이해서 한번 알게 되면 잘 안 까먹을 것 같아요”

“맞아요. 그 소리 많이 들어요. 아빠가 지어줬어요. 자연 착상으로 들어선 게 축복이라고 생각했대요”

“아-자연착상이었어요? 그럴 만하네요”

“주안님은 무슨 일 하세요?”

"리싸이클 워크 중이에요. 이십 년 정도 되었어요."

"부럽다-"

"죄송해요. 젊은 분들이 벌어놓은 나라 지원금 빼먹었으니 다시 열심히 갚을게요."

"그게 왜 죄송해요? 괜찮아요."

“영퓨어분들은 저희 같은 셀러들을 썩 좋아하지 않는다고 들었어요. 배아씨는 그런 거 없나요? 사실 나이가 적은 분들이랑 마주할 기회가 없어요. 대화를 해보고 싶다는 생각은 하는데, 저처럼 이백 년 가까이 묵은 셀러들은 거들떠도 안 볼 것 같고... 어쨌든 이렇게 영퓨어분과 매칭 될 줄은 상상도 못 했네요. “ 나도 모르게 주저리주저리 없어 보이는 말을 뱉어 내고 있었다.

“상관없어요. 그들 중 일부가 에버셀을 맞은 셀러들을 혐오하는 건 사실이에요. 하지만 사람은 누구나 나이를 먹어요. 어떻게든 말이죠. 그게 싫으면 죽어야죠. 나이 드는 것을 혐오하는 건 멍청한 생각이에요. 아직 오래 살아보지 못한 인간들의 오만 아닐까요? “

“그렇게 생각한다면 제 입장에서는 조금 안심이 되네요. “ 나는 조금 자신감이 들기 시작했다.

“에버셀이 주입되면 하루 이틀 정도는 오한이나 발열감으로 고생 좀 할 거예요. 며칠간은 물 많이 먹고 최대한 땀 흘리지 않는 것이 좋다는 낭설이 있기는 하지만 사실 그건 거짓말이에요. 그냥 잘 푹 쉬시면 됩니다. 아, 그런데 술은 먹으면 안 될 거예요. 돈 아깝잖아요.”

“오늘은 먹어도 되죠? “ 배아가 씩 웃었다.


우리는 술이 들어가자 서로에 대해 좀 더 쉽게 알아갔다. 배아는 자신이 비건이며, 동물 애호가라고 말했다.


"저는 동물 애호가지만 육식파에요."

"이해해요. 강요할 생각 없어요."

"아, 근데 엄밀히 말하면 10년 정도 비건이었던 적이 있어요"


나는 내 이야기를 꺼냈다. 아흔이 되던 해 재수없게 교통사고로 혼수상태에 빠져 식물인간이 되었던 이야기였다. 사실 큰 사고여서 전후 상황이 기억나지는 않지만 그 후의 이야기들이 나름 재미있었다.


"아흔살에 교통사고를 당했는데 거의 10년을 누워 있었어요. 의식도 없었죠. 어찌저찌해서 결국 깨어 나기는 했는데 백살이 조금 넘어 있었어요. 요즘 누구나 한다는 한세기 파티를 못한 인간이 바로 저에요. 어쨌든 사고가 나기 전에 샀던 주식이 있었는데 깨서보니 백배가 뛰어 있더라고요? 쓴 돈도 없었고, 보험사에서 꼬박 꼬박 돈도줘서 단숨에 부자가 될 처지?에 놓였었죠. 하지만 오른 주식을 팔려고 보니 제 친아버지가 다 팔고 돈을 갖고 도망갔어요. 행방불명이 된 거죠." 역시 예상한대로 말이 끝나기 무섭게 배아의 눈이 걱정과 흥미로 가득 차 있었다. 나는 그 표정이 참 순수해보여서 좋았다.


"뭐 사실 나도 그렇게 따지면 저도 약 십년 동안은 비건이었어요-그때(식물인간 시절) 만큼은 비건을 넘어서 육식은 물론이고 채식도 안했죠, 수액만 먹고 산 셈이죠." 배아는 심각하게 경청하다 그만 웃음을 터뜨렸다. 배아의 반응에 잔뜩 흥이 오른 나는 덩달아 식물인간에서 깨어난 뒤 겪었던 소개팅 에피소드도 들려주었다.


“어딘가 낯이 익네 했는데 내돈 갖고 튄 우리 아빠의 새엄마가 나왔어요. 그새 이혼하고 자유계약 신분으로 나오셨던거죠"


그렇게 두어시간 정도 더 소주를 들이 부었고 우리는 모두 거하게 취해 있었다.


“늙은 사람이 저랑 잘 맞나 봐요. 영퓨어 놈들은 이런 농담 절대 못할걸요? 그놈들은 그저 어떻게든 제 엉덩이를 세게 움켜쥐고 섹스할 생각 밖에 없거든요.” 배아는 거침 없이 자기만의 방식으로 나에 대한 호감을 쏟아냈다.

“그거 칭찬 맞죠?”

“방금 주안씨 이마에 잔뜩 주름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게 어울려요. 여유에 비해 당신은 너무 팽팽해요. 그래서 아직 순수한 걸까요? 어떻게 이게 백칠십 살이죠? 어떤 인생을 살았을까-” 배아는 자신의 불거진 귓불을 어루만지며 나에게 속삭이듯 읇조렸다.

“그건 무슨 소리예요?” 나는 최대한 아닌 척했지만 배아의 화법에 어느새 매료되어 있었다. 어린 장미? 그래 배아는 이제 막 가시가 막 돋기 시작한 여리고 진한 장미 같다는 남사스러운 내적 은유가 들었다. 여린 줄기와 꽃잎 때문에 마치 꺾이지도, 부러지지도 않을 것 같았다. 아마 몇 백 년을 더 살아가더라도 이런 여자는 절대 만날 수 없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들더니 강한 소유욕이 일어났다. 내 안에서 계속해서 배아를 향한 각종 비유와 음산한 잡념이 계속해서 요동쳤고 자신이 부끄럽고 또 혐오스러워졌다. 그녀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일희일비하는 나 자신이 한심해 보였다. 그 순간 하필 무탁이 새끼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놈 말마따나 영퓨어를 탐닉하는 내 모습이 정확히 일치하지 않는가. 나도 모르게 볼이 더 벌게졌다.


눈치를 보거나 따로 어색하게 말을 꺼낼 것도 없었다. 우리는 자연스럽게 집으로 이동했다. 아마 처음에는 분명 대화가 너무 재미있어서, 더 오래 편하게 말하고 싶어서 그랬을 거다. 하지만 집에 도착하자마자 배아는 내 몸에 새겨진 에버마크를 보고 싶다고 했다. 샐러들은 아랫배에 표식이 생긴다. 배꼽아래 옅은 형광빛 고리 하나, 흔히 셀러들 사이에서 ‘라이프 서클’이라 불리는 이것은 피부의 멜라닌 세포를 재설정하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신체의 반응이었다. 또한 나같이 오래된 자만이 가진 증표이자 동시에 오남용을 막기 위한 정부의 인증마크였다.


라이프 서클을 기점으로 배아는 내 신체 곳곳에 흥미를 가지며 어루만지기 시작했다. 나는 배아의 얼굴을 감싸 들어 올리고 입맞춤했다. 우리는 계속해서 서로의 몸을 어루만졌다. 나는 배아의 모든 것이 사랑스러웠고 믿을 수 없을 만큼 그날 밤이 황홀했다. 배아의 말처럼 ‘영원’이라는 단어가 머릿속을 스쳤다. 모르겠고, 이 순간이 영원했으면 했다. 다음 날 아침이 되자, 이미 배아는 내 곁을 떠난 뒤였다. 불안했다. 나는 순간 어제 일이 꿈인가 싶을 정도였다. 황급히 바지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확인했다. 배아가 남겨놓은 메시지가 있었다.


영감! 아침에 수업 있어서 바로 학교 왔어요. 오늘 수업 네시에 끝나는데 같이 저녁 먹을래요?


메시지를 보자마자 아침부터 잠이 확 깼다. 오랜만에 정신이 맑아지는 기분이 들었다. 아직 우리의 관계가 유효하다는 안도감과 함께 오히려 더 발전할 수도 있겠다는 설렘이 가슴 안에서 요동쳤다. 단언컨대 근 수십 년 중 제일 짜릿하고 행복한 감정이었다.


그날 오후, 캠퍼스 교정을 걸으며, 무수히 많은 학생들을 구경했다. 거진 백 년 만이었다. 나에게도 대학 시절이 있었고 그 기간은 분명 꽤 소중하고 특별했을 테지만 딱히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을 하지는 않았었다. 아마 그러기엔 너무나 많은 기억들이 존재했고 계속 시절의 젊음을 유지하기 때문이 아닐까. 하지만 배아 때문인지 그날은 꽤 많은 상상에 사로잡혔다. 문득 배아와 내가 같은 또래였다면, 그래서 이곳을 함께 활보했다면 우리는 어땠을까 싶었다. 약간은 치열하고 또 무언가에 쫓기듯 그리고 동시에 지엽적인 것들에 어리석을 정도로 몰두해보고 싶다는 충동이 들었다. 그건 아마 젊음의 본질일 것이다. 그래, 우리의 겉모습은 차이가 없지만 속은 본질적으로 달라졌다. 그 간극은 어느새 등골이 서늘할 정도로 크게 다가왔다. 내 신경은 지나치게 여유롭고 느슨하다. 중성화가 된 노견처럼 나는 젊음을 잃어갔다. 지루함과 무기력은 일상이 되었는데 이를 극복하고 싶지 않았다. 문득 배아가 더 미치도록 보고 싶어졌다.


배아는 나를 보자마자 와락 안겼다. 나는 양팔로 천천히 배아의 고개를 감았고 머리를 포갰다. 꽃이 활짝 핀 살 냄새가 천천히 퍼졌다. 향기가 나고 생기가 돌았다. 함께 걸으며 배아의 보폭을 보고 발소리를 들었고, 보폭마다 옷깃이 닿았다. 대학생들의 웃음소리가 주위에서 끊이질 않았고 교정의 바람은 가볍고 경쾌했다. 모든 젊은은 아름다웠다. 내가 이곳에 있다는 것이 문득 이질적이었다. 배아가 웃을 때마다 나는 한참 동안이나 어색했다. 눈을 깜빡이는 것, 숨을 쉬는 것조차 부자연스럽게 느껴졌다. 그녀의 웃음에 껴맞춰 웃고 말하는 내 얼굴이, 갑자기 지독하게 낯설고 서러웠다. 나를 제외하고 모두 완벽한 젊음을 갖고 있었다.


나는 그녀와 데이트를 하면서도 내내 그 낯선 젊음을 받아 들이지 못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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