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치미러
집에 돌아와서 깊은 생각에 빠졌다. 아마도 내가 느낀 감정은 더 이상 나는 젊지 않다는 것에 대한 소외감이었을 것이다. 괜히 부끄러운 마음이 들었다. 적적해서 맥주 한 캔을 꺼내 쥐고는 거실 소파에 털썩 기대어 몸을 맡겼다. 한숨을 내쉬는 동안 테이블 한구석에 끼워진 사진 속 어린 시절의 내 얼굴이 눈이 들어왔다. 나는 사진 속 내 모습을 한참 동안 쳐다봤다. 셀러가 아니었던 그 시절, 우리도 모두 한때는 영퓨어였다. 내 머리는 묵혀있던 옛 기억들을 끌어내려 부단히 애를 쓰고 있었다. 하지만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슬슬 본격적으로 호기심이 들었고 서랍에서 이어폰과 AI렌즈를 꺼내고 클라우드에 접속했다. 10년, 20년 전의 이미지, 오감, 당시 하던 생각들, 그리고 심리 상태 등 여러 메모리들이 역순으로 나열되기 시작했다.
나는 홀로그램을 연결해 본격적으로 내 과거들을 거실 스크린에 재생시켰다. 한참을 보았는데도 역부족이었다. 그 긴 세월을 요약하기에는 그날의 밤은 너무 짧았다. 나는 에버셀을 맞기 전 내 어린 시절도 궁금해졌다. 과감하게 설정을 150년 전으로 돌려보았고 동기화를 기다렸다. 백 년도 더 중첩된 메모리여서 그런지 생각보다 동기화하는데 시간이 오래 소요됐다. 살면서 뭐 대단한 것을 하지는 않았는데 용량은 어마무시했다. 압축파일은 대략 500TB를 가뿐히 넘는 수치였다. 묘하게 긴장이 됐다. 동기화가 98% 정도 진행 되었을 때는 이미 두 손바닥이 미세하게 저려오고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여러 메모리의 필름이 나열됐다. 정확히 150년 전 오늘은 무척 맑았고, 나는 평범한 대학생이었다. 과거에 나열된 메모리를 여러 감각으로 느낄 수가 있는데 가장 먼저 느껴졌던 건 내가 생각보다 많은 표정을 지을 줄 아는 사람이라는 것이었다. 나는 역동적이고 흥이 넘쳐 보였다.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늘 무리 지어 다녔고 항상 누군가가 옆에 있었다. 대부분 내가 스스로 기억하지 못하는 동기나 선배 후배들의 이름이기는 했지만 클라우드에 남은 메모리 덕분에 모두 이름을 매칭시킬 수 있었다. 낯선 얼굴들에 이름이 붙자 신기하게도 대부분 기억이 났다. 좀 더 면밀히 보고 싶었다. 그때 그 시절 캠퍼스, 계절과 바람, 공기의 냄새까지 전부 끌어 모아 동기화시켰다. 잠시 타임라인의 속도를 최대한 늦춰 그때의 시공간과 공기 그리고 그 안의 나를 감상했다. 그때 어쩜 그리 기분이 좋았는지, 왜 그렇게 늘 깔깔 웃어댔는지, 그토록 목적 없이 많은 사람들에게 호의적이었는지 알 수 없지만 생동감 있는 나의 젊음은 아름다웠다. 내 영혼이 저렇게나 시퍼렇게 젊었고 유연했다. 중간에 무탁이 녀석도 보였다. 무탁은 백 년 전에도 똑같았다. 예쁜 여자만 보면 SNS 계정이나 연락처를 물어보고 다녔다. 한심하지만 지금 보니 녀석도 젊었다. 적어도 지금처럼 악에 받쳐 사람의 약점을 물고 늘어지거나 헐뜯는 광기가 있지는 않았다. 나는 우리 집도, 예전의 부모님도, 그리고 키우던 강아지도 다 궁금해졌다. 몇 시간을 빨리 감아 집으로 향했고 가족을 마주했다. 오랜 기억 속에 파묻혔던 부모님, 내가 병원에 있던 시절 서로 새 삶을 찾아 떠난 엄마 아빠의 얼굴도 보았다. 애착 인형을 물고 나를 따라다니던 베리를 한참이나 쓰다 듬었고 이내 내 방에 들고 들어가 침대에 같이 누워 빤히 응시했다.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진작에 이렇게 해볼 걸 그랬다. 먼 과거를 마주하는 게 이렇게 시리도록 행복할 줄 몰랐다. 내 안에서 조용히 죽어가던 감각들이 깨어나고 있는 듯했다.
한때 몇백 년을 지나오면 인간관계가 풍부해질 거라고 생각했다. 물론 그런 기회도 분명히 있었겠지만, 나는 자발적인 고립을 선택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결국 나 혼자 남으니까 혼자가 더 편했다. 가족들은 뿔뿔이 흩어졌고 친구들, 여자친구나 심지어 아내도 몇 번이나 바뀌었다. 물론 애는 갖지 않았다. 유대를 쌓고 살아갈 것도 아니었기에 갖고 있을 이유도 없었다. 모든 인연 끝에는 나 혼자 남았다. 많은 세월을 지내오면서 자연스럽게 이 사실을 깨달았고 나는 계속 나 자신과의 깊은 유대만을 증폭시켰다. 어떠한 기대도 없어졌고 감정의 낙차는 점점 잔잔한 파도처럼 고요해져 갔다. 외로움은 영혼을 계속해서 뜨겁게 쪼아댔고 마지막 한 방울까지 증발시켜 쩍쩍 갈라놓고 있었다.
오늘 이 경험을 공유할 놈은 결국 무탁이 녀석밖에 없었다. 나는 무탁에게 전화를 걸었고 그들과 한잔 곁들일 저녁식사 자리를 잡았다. 나의 단발적인 외로움과 공허함에 도파민을 채워줄 놈. 나는 무탁과 세아에게 그간 겪은 일을 설명해 줬다. 무탁은 세아의 눈치를 보느라 대놓고 말을 하지는 못하는 듯했지만 무척이나 부러워하는 눈치였다.
"이름이 배아라고? 이름부터 대놓고 생애기네 애기."
"말장난 그만하고, 이제 너 얘기 좀 해봐. 업데이트 없어?"
"연애하는 백수보다 재미있는 일이 있겠어?"
식당 티브이에는 뉴스가 방영되고 있었고 덥수룩한 수염에 이마에 잔뜩 주름이 진 중년의 남성이 인터뷰를 진행하고 있었다. 오랜만에 에이징이 진행된 인간을 봐서 그런지 그런지 참 이질적이었다. 남자는 호소하듯 말했다.
인류의 가장 큰 실수는 에버셀입니다. 인류는 자가 번식 할 수 없게 됨은 물론이고 인간성의 말살까지...
"저 양반은 에버셀을 안 맞았나 보네."
"네이처본 몰라?"
"잘 모르지.”
“무슨 소리하는거야? 노화라도 진행되는 거야? 자네도 잘 알잖아. 다 떠나서 나는 그냥 인류의 발전 자체를 거부하는 인간들이 너무 싫다. 에버셀 맞지 마라, 인공 출산 하지 마라 뭐 하지 말라는 게 한 두 개가 아니야. 나도 요즘 저쪽 취재…“
“여기로 한번 불러보면 안 돼? “ 세아가 무탁의 말을 끊고 끼어들었다. 무탁은 퉁명스럽게 세아를 응시했다
"누굴 불러?"
"같이 놀게. 배아씨 한번 불러봐. 자기도 궁금하잖아. 그렇지?"
"그러긴 하지"
솔직히 나는 그들에게 배아를 보여주기 싫었다. 하지만 이 둘이 내 말을 믿지 않을 것 같은 눈치였다.
갑작스러운 요청이기는 했지만 나 조차도 배아가 오는 것이 부담되어 굳이 오지 않아도 되는 자리라고 말해주었다. 하지만 배아는 흔쾌히 나를 보러 오겠다고 했다. 고마움보다는 걱정이 앞섰다. 이백 살에 가까운 인간이 셋이나 있는데 이제 갓 스무 살이 된 배아가 서로의 깊은 세대 간극을 느낄까 봐, 그로 인해 우리 둘 사이가 멀어질까 싶었다. 더 솔직히 말하자면 조금 창피한 것도 있었다. 구체적으로 뭐가 창피한지는 정확히 알 수 없겠지만. 아마 우리 자체였을 것이다. 그렇게 배아가 오는 동안 무탁과 나는 서로의 근황을 주고받았고 지난날 다투었던 것들에 대하여 심심한 위로와 화해도 나누었다. 배아에게 전화한 지 한 시간 정도 지났을 때, 마침내 식당 문을 열고 배아가 들어왔다.
“안녕하세요.”
나는 꽤나 멀리 떨어진 체로 소녀가 활짝 웃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 찡긋하는 눈꼬리, 봉긋 올라오는 콧볼, 활짝 찢어지는 입꼬리. 부끄럽다는 듯 입안의 혀를 살짝 내밀어 보였고 정말 꽃이 피는 것 같이 예뻤다. 그 와중에 이런 감상을 하는 내가 노인 같고 싫었다. 무거운 어색함이 흘렀고 배아를 제외한 우리 셋은 최대한 그 어색함을 깨 보려고 노력했다. 다행히 무탁과 세아가 배아에게 열심히 대화를 시도했고 배아도 점점 말이 많아지기 시작했다. 두어 시간 정도 더 대화 섞고 술잔을 기울였고 우리 점점 서로 편해지고 많이 기분이 좋아져 있었다. 무탁이 대뜸 배아에게 꿈에 대해 물었다.
“꿈, 음. 거창한 꿈인지는 모르겠는데 직접 애를 낳고 싶다는 생각을 해요.”
누구도 예상치 못한 답변에 아주 잠깐 정적이 흘렀다.
“애를 낳고 싶구나.” 무탁이 무미건조하게 배아의 말을 그대로 따라 했다.
“네.”
“생각도 못해봤는데, 신기하네?”
“생각도 못할 만큼 신기한 건가요? 예전엔 다 그랬을 텐데.”
“혹시 채식이랑 연관이 있는 건가요?” 무탁은 그새 또 직업병이 도졌는지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나는 불길한 촉이 들어 황급히 대화를 종결짓고 자리를 마무리하려 했지만 배아는 그럴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런 질문을 왜 하는 건지, 아니면 원하는 대답이 있는 건지 무탁에게 되물었고 무탁은 배아의 당돌함에 기분이 상한 듯 말끝을 흐렸다. 세아 역시 썩 기분이 달가워 보이지는 않았다. 나는 중간에서 안절부절못했지만 내심 궁금하기도 했다. 애를 낳고 싶다는 말의 속 뜻에는 어떤 의미가 숨어 있는지 둘만 있을 때 조심스레 물어야겠다 싶었다.
“관련 없어요. 저 화장실 좀 다녀올게요.”
진작에 해산했어야 하는 자리였다는 생각이 머릿속에서 빗발쳤다. 나 역시 불편한 감정을 숨길수가 없었다.
“왜... 나 실수했냐?”
“됐어.”
“왜 뭐만 하면 예민해지냐 너는?”
“네가 그럴 행동만 하잖아. “
“내가 뭐 어쨌는데?”
“네가 원하는 대답이 있는 게 아니고?”
“내가 뭐라고 했어?”
“더 꼰대짓 하지 말고 그냥 가라. 술 많이 처먹었으면.”
“넌 네가 젊고 센스 있다고 생각해? 그래서 저런 애들 만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 절대 아니야. 쟤가 뭐 바라는 게 있겠지. 그런 생각은 안 해봤냐? 끼리끼리 놀아야지 사람은. 옛날에 노인네가 젊은 여자만 찾으면 얼마나 욕했는데 그건 알지?”
“말 조심해. 부러우면 부럽다고 말해 새끼야."
“부럽겠냐? 난 그런 변태 취향 없어.”
“야, 너 그만해. 무탁아 가자. ” 세아의 말이 체 끝나지 않은 채 나는 참지 못하고 주먹이 날아갔다. 내가 봐도 참 느려터진 주먹이었다. 누군가와 감정이 격해져 몸싸움이 일어난 게 얼마만이었던가, 아마도 백 년도 더 됐을 것이다. 몸에서 아드레날린이 계속 뿜어져 나오는 것 같았지만 우리는 여전히 둔한 반응을 하고 있었다. 엉거 주춤한 자세로 서로의 느린 주먹을 허공에 휘두를 뿐이었다. 내가 봐도 참 볼품없었다. 신체는 그대로지만 신경은 예전만 하지 못했다. 언젠가 생명공학 다큐에서 본 적이 있었다. 에버셀을 맞아도 신경은 되돌릴 수 없다고. 에버셀 덕분에 뇌세포, 근력, 골격, 그리고 피부의 젊음이 유지되어 아무리 나이를 먹어도 어느 정도의 신체 반응을 유지할 수는 있지만 절대적인 동체시력과 반사신경은 영구적으로 퇴화된다고. 그래서 그랬을 것이다. 우리는 누구도 유효타를 맞추지 못한 체 씩씩대며 서로 대치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서로를 붙잡고 엉켜 넘어졌고 계속해서 몸이 생각한 대로 반응해주지 않아 서로의 멱살을 꽉 쥔 체로 그저 죽일 듯이 노려만보고 있었다. 주변 사람들이 하나 둘 나서서 뜯어말렸고, 비웃는 사람도 여럿 있었다. 우리는 옷이 늘어난 체 서로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배아가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그날은 배아와 같이 있기 민망해 몸이 안 좋다는 핑계를 대고 일찍 헤어졌다. 집으로 가는 길부터 집에 돌아와 잠에 드는 순간까지 한참 동안 잠에 들지 못했다. 무탁이 녀석과 형편없는 클런치를 뒤로하고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던 배아의 눈빛이 머릿속에서 수도 없이 맴돌았다. 수치스러웠다. 나는 그저 감정적이었고 한없이 둔했고 전혀 위협적이지 못했다. 그저 분함에 못 이겨 소리만 고레고레 지를 뿐. 그저 젊은 얼굴에 나이만 지긋하게 처먹은 수컷 생명체. 차라리 치열하게 피 터지며 치고받았으면 배아가 나를 그런 경멸의 눈빛이 아닌 걱정의 시선으로라도 봐주었을 텐데 말이다. 동시에 화도 많이 났다. 배아는 그저 나를 쳐다보는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그녀가 겁에 질려했나? 그것도 아니었다. 당연히 걱정해 주는 것도 아니었다. 마치 길 고양이의 영역 싸움이라도 구경하듯 딱 그 정도의 그런 눈빛이었다. 패배감에 쓰라린 최악의 하루였다. 내 옆에는 늘 그랬듯 가족도 연인도 친구도 없었다. 무기력한 외로움이 나를 엄습했고 나는 애써 모른척하며 잠에 들었다.
다음 날 배아와 한강 주변에 유명한 랍스터 가게를 가기로 약속했지만 나는 그녀에게 끝까지 연락을 하지 않았다. 한심하게도 나는 삐져 있었다. 배아도 먼저 연락을 하지 않았다. 내 꼴을 보면 당연히 그럴 법도 했다. 나도 내가 혐오스러웠다. 내가 따로 연락을 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더 이상 볼 일이 없을 것 같았다. 배아는 여전히 아쉬울 게 하나도 없어 보였다. 다시 정리하자면 나는 감정적이지만 둔하고 위협적이지 못하며 나이만 지긋지긋하게 처먹어 여자한테 삐지기나 하는 한심한 수컷 생명체. 그래 그게 나였고 이게 맞는 표현일 것이다. 우리는 곧 남이 될 것만 같았다. 문득 우리가 겨우 이 정도 사이였다는 부정적인 생각에 사로잡혀 있을 때 배아에게 연락이 왔다. 지금 막 출발했다는 그 문자 하나에 온몸의 긴장이 풀리고 가슴이 뛰었다. 나는 급하게 샤워를 하고 서둘러 옷을 챙겨 입었다. 아까 그렇게 고뇌하던 배아에 댜한 내 마음이 뻔뻔하고 우스울 지경이었다. 이백살 가까이 나이를 먹고 갓 스무 살이 된 여자 한 명에 일희일비하는 나 자신이 부끄러웠다. 배아는 내게 행복이었고 또 절대적인 사람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 누구도 나를 이렇게 뒤흔들지 못할 것이다.
"다친 데는 없어요?"
"있겠어? 봤잖아 너도."
"낑낑거리는 거요?" 배아가 웃음을 터뜨렸고 나도 따라 웃었다.
“민망하네요 “
“가재 같았어요. 가재. 탈피 중인 가재요. “
“랍스터?”
나는 내 앞에 놓인 랍스터를 빤히 쳐다보았다. 머리부터 집게발 등짝 아래까지 껍질이 정확하게 반으로 갈라져 하얀 속살을 내놓고 있는 랍스터. 옆에 달려 있는 조그마한 다리들을 보자 왠지 모르게 역겨움이 올라왔다.
랍스터 집게를 뜯어내던 배아가 무심히 말했다.
“랍스터는 잘 늙지 않아요. 몸속에 텔로머라제라는 효소가 계속 작동하거든요? 옷감이 오래되면 헤가지고 낡아야 되는데 계속 옷에서 실이 자라는 거예요. 그래서 계속을 거듭해요.”
“죽지도 않는다는 건가?”
“아뇨, 결국 죽어요. 탈피할 때 힘이 모자라면 껍질에 갇혀 질식하죠. 마치 옷감에서 계속 실이 자라나 결국에는 감당 못하고 질식해 죽는 거 같아요. 아니면 튼튼한 껍질도 시간이 지남에 따라 병균이 생기고 결국 내부에 퍼져 죽기도 해요. 어느 방식으로든 노화는 진행되어요. 겉으로 티가 덜 날 뿐이겠죠. 죽지 않는 게 아니라, 죽음을 미루는 거죠. 안타깝지 않아요? ”배아는 젓가락 끝으로 투명한 껍질 조각을 가볍게 두드렸다.
“죽음을 미루는 게 안타깝다는 거예요? 그들에게는 좋은 거 아닌가?”
“글쎄요 모르겠어요. 그나마 사고를 할 수 없는 동물들이니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어요. 깊은 사유를 했다면 우울증에 걸렸을 것 같거든요. “ 배아는 멍하니 강 쪽을 바라보며 말했다.
긴장이 풀리려 하던 차였는데 금세 식사자리가 불편해졌다. 저격을 당한 듯 신경이 쓰였다. 왠지 내 이야기 같았기 때문이었다. 이 여자가 나와 거리를 두려 하는구나. 역시 그럴 줄 알았다. 무탁이 녀석 얼굴이 떠올랐다. 그 녀석 말이 결국에는 맞는 것 같다. 그래 끼리끼리. 나는 배아가 다음 말을 이어가기도 전에 혼자 모든 가정을 예측하고 비극적인 이 연애의 결말까지 도착해 버렸다. 배아는 자조적인 투로 내게 다시 입을 열었다.
“그래서 주안씨에게 솔직히 고백하고 싶은 게 있어요. 오늘 자리를 빌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