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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정을 잊어버리셨나요?
by
천둥벌거숭숭이
Oct 22. 2024
검은 물 밑에서
당신의 바닥은 나의 천장. 아껴줘요.
날이 덥고 습하다.
하늘은 맑다가도 금세 먹구름을 몰고 온다.
수도꼭지가 열린 듯 세차게 내리는 비는
그 습함만을 남겨두고 떠난다.
비를 맞지 않아도 축 쳐지는 날씨에 걸맞은 영화를 찾아버렸다.
링을 연출한 감독이 야심차게 준비한 차기작.
2003년. 비명마저 삼켜버릴 거대한 공포가 온다며 많은 이들을 기대하게 했지만, 평점 5점 만점에 2.6점이라는 처참한 결과를 만든 비운의 공포영화.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찾아보는 사람이 있는 이유는 생소하던 소재를 이용해 극의 긴장감을 이끌어가는 감독 특유의 연출력과 옛날 영화에 대한 향수 같은 것들이 아닐까.
법원에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이혼 조정 중에 있는 한 부부의 이야기.
남편이 이혼을 요구했고 아내도 기꺼이 순응한다.
마찰이 있는 부분은 아이의 양육권에 있다.
평소 아이에게는 관심이 없었던 남편이었기에 아내는 분개할 수밖에 없었다.
조정실에서 위원들과 나눈 대화가 소란하다.
정신병원에 가서 진찰한 기록이 있던데 어떤 병이 있었던 것입니까
.
제가 결혼 전 하던 일이 책을 교정하던 일이었고, 교정하던 책 중에 잔인한 묘사를 중복해서 읽으니 마음이 어지러워 상담을 받은 적이 있다고 했다.
결혼 전의 일까지 나를 깎아내리려는
남편에게
서 한 번 더 정이 떨어진다.
그리고 지내던 집을 나와 아이와 함께 살 집을 구한다.
부동산 회사를 통해 월세가 저렴한 오래된 아파트를 구하게 된다.
월세가 저렴해서 찾는 이가 많았다.
집이 썩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재정사정이 여의치 않으므로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아이와 집을 둘러보다가 한눈을 판 순간 아이가 사라졌다.
옥상에서 찾은 아이는 처음 보는 빨간 가방을 메고 있다.
바닥에 있었다고 한다.
현재 아파트 내에는 아이가 없다고 말하는 관리자와 부동산 소개인이 아이에게 빨간 가방을 가지라고 말하지만 엄마는 마냥 찜찜하다.
그렇게 그 가방은 아파트 입구에서 한동안 유실물로 전시되고 있었다.
무사히 이사를 마치고 자리에 앉으려는 찰나 안방 천장 부분에서 물이 한 두 방울씩 떨어지고 있었다.
검게 변한 천장에서 물이 고여있는 듯하다.
바로 건물 관리인에게 말하지만, 귀찮은 듯 건의 사항에 기입한다고만 말한다.
아이는 처음 가는 유치원에서 자신을 당당히 소개하고 즐거워 보인다.
다만 상담하는 중에 아이를 대하는 유치원 원장과 교사의 모습이 엄마의 눈에는 마뜩잖아 보일 뿐이다.
쓰레기를 버리던 중 아이가 주웠던 빨간 가방이 버려진 모습을 본다.
결국 주인을 찾지 못한 모양이다.
이사를 하고 아이의 유치원 등원을 무사히 보낸 후, 직장을 구하기 위해 작은 출판사를 찾는다.
육아로 인한 6년의 휴직기가 있었지만, 바로 취직할 수 있었다.
새로운 시작을 위한 기분 좋은 저녁시간을 가지던 중, 아이의 가방을 챙기는 도중에 빨간 가방을 발견한다.
분명 쓰레기통에 있었는데 왜 여기 있는 거지?
불안한 마음을 갖고 아이를 집에 둔 채로 가방을 주운 곳으로 향한다.
어두운 옥상은 을씨년스럽다.
옥상에 있는 물탱크를 올려다보다가 문득 소녀를 본 것 같다.
다시 보니 사라진 소녀. 환영일까. 실재일까.
스트레스와 몸의 피로도가 겹쳐지니 정신이 불안정해진다.
조정기일에 법원에서 포효하는 엄마를 옆에서 보던 변호사가 도움을 준다.
엄마는 변호사를 수임하고, 이혼조정에 정신을 쏟는다.
일하던 도중에 아이가 다니는 유치원에서 전화가 온다.
아이가 토를 하고 쓰러졌다는 것이다.
이제껏 한 번도 그런 적이 없는데, 유치원에 온 첫날 아이를 다그치는 선생들의 모습이 머릿속에 그려지면서 선생들에 대한 분노가 표출된다.
그녀를 진정시키던 원장이 한 소녀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2년 전에 있었던 한 소녀의 실종사건.
갑자기 자신을 떠난 엄마를 그리워하던 아이는 적응하지 못하고 유치원에서도 힘들어하다가 어느 날 갑자기 사라져 버렸다고.
그 소녀가 하는 행동이 지금 엄마의 아이가 하는 행동과 비슷하다고 한다.
어린 시절 부모의 방치에 가까운 육아로 인해 상처를 가지고 있는 엄마는 아이에게 자신과는 다른 삶을 선물하고 싶다.
변호사에게 부탁해 검은 천장에서 흐르는 물을 관리자와 부동산 중개인에게 주의를 주게 하고, 지금보다 더 나은 환경을 만들려고 노력한다.
아이를 돌보며 잠든 사이, 부분적으로 흐르던 물이 천장 전체에서 흐르는 것을 보게 된다.
그리고 아이가 없어졌다.
관리실은 비워져 있고, 옥상에도 없다.
혹여나 찾은 위층의 문이 열려있었다.
물이 가득 고여있는 위층에서 아이를 발견한다.
이 물들은 어디서 왔고, 왜 아이는 여기에 있었던 것일까.
빨간 가방과 2년 전 실종된 소녀. 모든 이야기의 중심이 바로 이곳이라고 말하는 듯하다.
검은 물 밑에서의 한 장면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축축하다.
[
검은 물 밑에서]에
맞는
영화다.
물은 살아가는 데에 있어서 반드시 필요한 존재다.
사람을 이루는 수많은 세포들 중에 가장 큰 분량을 자랑하는 것이 바로 물이다.
우리는 물 없이는 살아갈 수 없다.
조금만 부족해도 죽을 수 있고, 조금만 과하면 견딜 수 없다.
갈증은 채우면 끝이 나지만, 과할 때는 많은
문제를
가져온다.
물이 흐르는 배관에 구멍이 생기면 누수가 일어난다.
물은 조용하게 강하다.
틈새를 비집고 나와 흐른다.
물이 스민 곳은 검게 변하고 그곳으로 흐르기 시작한다.
집 밖은 간밤에 몰아친 비로 강렬한 습기를 가져왔다.
부슬부슬 내리던 가을비가 거세게 변한 것이 한순간이다.
변덕스러운 가을날씨에 딱 맞는 영화였다.
환절기에는 많인 변수들이 나타난다.
주인공에게는 인생의 환절기를 겪는 시기였다.
행복하진 않아도 익숙한 결혼생활이 남편의 갑작스러운 이혼요구로 깨지게 되었다.
결혼으로 인해 경력이 단절되었던 출판사 일을 다시 시작하게 되었고, 집을 새로 구하고, 딸과 둘만의 시간을 가지게 된다.
그러는 와중에 법원을 다니며 양육에 경제적 기여만 담당했던 남편이 양육권을 요구하기 시작하면서 주인공 삶의 근간이 흔들리는 시간을 마주하게 된다.
하루하루의 생활이 늘 힘이 부친다.
그러는 와중에 아이는 유치원에 적응이 어려워 보이고, 집이 안전하지 않다는 생각까지 하게 된다.
집은 안정된 곳이어야 한다.
나는 최선을 다하는데, 주변 사람들은 최선을 다하지 않는다.
양육에 관심이 없던 남편이 양육권을 요구하고, 관리비를 내는 아파트의 관리직원이 자신의 일을 제대로 하지 않는다.
매일매일 예민하게 하루를 보내지만, 아이마저 주인공에게 호의적이지 않은 것만 같다.
이 불안한 마음이 축축한 습기와 맞물려 고립되어 간다.
아이에게도 환절기처럼 불안이 찾아왔다.
편하게만 느껴졌던 집이 한순간에 바뀌었다.
늘 엄마와 함께하는 하루를 보냈지만, 이제는 유치원에 가고 직장 생활하는 엄마를 기다려야 한다.
아빠는 늘 자주보지 않았기 때문에 괜찮다.
새로운 유치원에서 만난 친구들이 반갑다.
그중에서 신기한 친구도 만났다.
아파트 옥상에서 만난 친구와 이야기하는 것이 좋았다.
하지만 엄마가 화만 낸다.
함께라서 좋았던 엄마가 자주 곁에 있지 않으면서 소리치는 하루가 많아진다.
외로움을 몰랐던 아이에게 하루의 빈 공간이 생기고, 그 공간을 처음 보는 아이가 채워주려 하고 있다.
엄마는 모른다.
설명을 하기에 아이의 어휘력과 표현력이 서투르다.
사실은 모두가 처음인 인생을 살면서 뭐든 능숙하게 해내려고 애쓰는 것을 서로 모른 척할 뿐이다.
그렇게 서로의 불안이 끊임없이 내리는 비와 어우러진 축축한 영화가 만들어진 것이다.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급격한 환경변화, 이사, 새로운 친구들,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
그래도 사람은 하루를 살아간다.
어떻게 해서든 완료를 해낸다.
분명 누군가는 보다 쉽게, 다른 이는 겨우겨우 살아내는 귀한 하루를 보낼 수도 있다.
흔히 하는 인사에는 날씨가 기본적으로 포함되어 있다.
좋은 아침, 날씨가 선선해졌죠? 이제 더위가 끝났나 봐요. 금방 겨울이 오네요.
선명하게만 느껴졌던 여름이 가고, 기다리던 가을이 오려나 했는데, 그 가을을 느끼기도 전에 강렬한 가을비가 내리고 있다.
비가 오고 나면 날이 금방 선선해진다.
벌써부터 뉴스에서는 강한 한파가 시작될 거라고 말한다.
가을비는 축축한 습기뿐만이 아니라 강렬한 한기를 가져오는 것이다.
비가 오고 난 다음날의 하늘은 유난히 맑다.
어제 비가 왔다는 것을 금방이라도 잊은 것처럼.
축축한 영화를 다 보고 난 후에는 희미한 여운만이 남았다.
엄마는 딸을 영원히 사랑하고 있다고.
딸은 엄마가 곁에 없어도 엄마의 사랑을 기억하고 있다고.
갑작스러운 변화가 생기면 사람은 당황한다.
하지만 거기에 멈춰서 있지는 않는다.
시간은 계속해서 흘러가고 하루를 온전히 살아내고자 하는 본능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검은 물밑에서 많은 일들이 있었지만, 그 순간이 지난 다음은 아련한 기억만이 남아있을 뿐이다.
지금 내리는 비도 언젠가는 그칠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새로운 계절을 맞이할 준비를 해야 한다.
환절기에 주위를 환기시키기 좋은 영화였다.
그래도 지금 내리는 비가 더딘 속도로 내리기를 바란다.
가을을 조금 더 느끼고 싶으니까.
짧은 가을을 당신과 더 오래 하고 싶으니까.
사진출처 : 다음포털사이트,[검은물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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