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방울 두엄더미

우리는 새로운 잎을 길러낼 준비가 되어서야 새순을 틔워

by 두부언니


wind 05



Topˏˋ bergamotˏ mandarinˏ cardamon

Midˋˏ cypressˏ sandalwoodˏ vetiverˏ cedarˏ ambretteˏ carrot seeds

Baseˏˋ violetˏ muskˏ patchouli





하늘이 드디어 구멍을 보수한 모양이다. 비가 그쳤다. 여름내 내린 비는 바람에 스러진 죽은 나무며 낙엽을 고루 적셨고, 억세던 그것들은 이제 흙과 구분이 되지 않을 만큼 유해져 땅의 일부가 되었다. 그 아이는 두엄더미를 지붕 삼아 여름을 났다. 부식하는 낙엽더미가 타는 듯한 여름 태양으로부터 마르지 않도록 아이를 지켜주었고, 세차게 쏟아붓는 빗줄기를 피할 수 있게 도와주었다. 아이는 어둑어둑한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직 썩지 않은 채로 얼기설기 쌓여 있는 폐목 사이로 무언가 굼뜨게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그것은 지난가을에 알에서 부화했던 장수풍뎅이 유충(이었던 것)이었다.

계절이 바뀌는 동안 그의 모습은 상당히 바뀌어 있었다. 사실 유충(이었던 것)이 먼저 아는 체를 하지 않았다면 아이도 그를 못 알아보았을 것이다. 그는 아이 쪽으로 굼뜨게 다가왔다. 이제 그는 우윳빛의 여린 표피가 아닌 칠흑 색 갑옷을 두르고 있었다. 부쩍 커진 키와 덩치에 비해 다리의 개수는 오히려 줄어든 것처럼 보였다. 가장 달라진 점을 꼽자면, 이마에 난 거대한 뿔이었다. 두꺼운 기둥을 중심으로 좌우로 삐죽삐죽 솟은 그 뿔이 멋있다고 아이는 생각했다. 그가 코 앞까지 다가오자 바삭거리는 흙의 냄새가 공중으로 일었다.



그는 아이에게 다가와 커다란 뿔로 쿡쿡 찌르며, '이제 땅 위로 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아이는 기겁하며 그를 말렸다. 부드럽고 포근한 두엄더미가 보호하는 세상을 벗어난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무시무시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이 곳을 나가면 그들의 머리 위로 떨어지는 것들을 보호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을 것이다. 떨어지는 빗줄기에 찢겨, 몸이 반 토막이 날지도 모르는 일이다. '바깥세상은 위험'하다고 아이가 말했다. 벌써 그가 거대한 뿔로 찔러대는 통에 아이의 여린 피부에 상처가 난 것만 같은 기분이 되었다.


그는 아이에게 주위를 둘러보라고 말했다. 작년 이맘때 즈음 그가 부화할 때 아이의 곁에 있었던 다른 버섯들. 그들이 어디로 갔는지 궁금하지 않으냐고 물었다. 아이는 궁금했다. 아이가 이 곳에 머무는 동안 많은 포자들이 날아왔다, 땅 위로 솟아오르기를 반복했다. 한 번 땅 위로 올라간 그들이 다시 내려오는 일은 없었다. 하지만 아이는 개의치 않았다. 떠나는 이들이 있으면 또 새로운 포자들이 날아 올 테니까, 하고 스스로를 위안했다.


'나는 오늘을 위해 내 인생의 팔 할을 기다려왔다'며, 그는 뿔을 높이 들어 올렸다. 그러자, 그들의 머리 위를 가리고 있던 낙엽이 들썩였다. 폐목의 밀도가 빽빽한 것으로 보아 근처에 고목이 있을 것이라고 그는 짐작했다.


'땅 속에 있는 뿌리의 갈래 수를 아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저 위에 있을 거야'. 땅 위로 나가면 나무를 타고 높이 오를 것이다. 가장 높은 곳까지 올라 세상을 모두 둘러볼 것이라고, 그는 계절이 세 번이나 바뀔 동안 꿈꿔왔다. 아이는 눈을 질끈 감았다. 일순 쏟아지는 햇빛에 몸의 일부가 타는 듯했다. 그리고 그는 떠났다. 가장 가까이 있는 나무를 찾아 기어올랐을까. 가는 도중 머리가 깨지거나 다리가 부러지는 일이 그에게 일어나지 않기를 아이는 바랐다.


예전에 새 잎을 틔우지 않는 어린 나무에게 물었던 일을 떠올렸다. 한동안 새 잎을 피워 올리던 나무는 어느 순간 물이 부족한 것도, 햇빛이 부족한 것도 아닌데 잎을 피우는 일을 멈췄다. 아이는 나무가 일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러자 나무가 대답했다. '우리는 새로운 잎을 길러낼 준비가 되어서야 새순을 틔워'



아이는 햇살이 쏟아져 들어오는 구멍을 올려다보았다. 스스로 갓을 펼칠 준비가 되었는지 자문해보았으나, 여전히 아이는 답을 알 수 없었다. 폐목에서 풍겨오는 달콤하고도 묵직한 향기가 두방 망질 치는 아이의 마음을 다잡아주었다. 버섯은 먼저 떠난 풍뎅이의 잔상을 좇아 땅 위로 조금 솟아올랐다. 지면 위로 몸을 내밀자, 이제껏 맡아보지 못했던 꽃향기며 나무의 향기가 아이를 감쌌다. 버섯은 몸에 칭칭 동여매고 있던 갓을 펼쳤다. 각종 풀 내음과 산나무 열매의 냄새, 가을의 향기가 실려왔다.




Noteˏ
솔방울 / 나무껍질 / 버섯 / 두엄더미

뜨거운 여름과 눅눅한 장마가 지난 뒤 불어오는 가을바람 같은 향기입니다. 아직 여름의 물기가 완전히 가시지 않은 공기 중으로 부식된 나무와 낙엽의 냄새가 실려오는 것 같은 느낌이에요.

우리 모두에게 쉽지 않았던 2020년도 이제 반이나 넘게 지나갔습니다. 파란 하늘과 바삭한 바람이 불어올 날을 상상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향수입니다.


*이 글은 paffem의 'wind 05. 바삭한 가을바람'향수를 테마로 작성된 단편 소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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