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을 찌를듯하던 호기로움은 어디로 갔는가? 불과 한 시간 전만 해도 세상을 다 품을 기세로 대관령 정상에 서있던 나였다. 아침 6시에는 잠에서 깨어있는 기적을 행했었다. 여느 날 같았으면 실타래처럼 이불 칭칭 감고 침대 속에 파묻혀 있었을 시간인데 말이다. 그런데 지금 나는 앞이 아닌 뒤를 향해, 그것도 뒷걸음질을 치고 있는 것이다. 온 세상 친구들을 다 만나고 올 것만 같이 '앞으로 앞으로'를 외쳐도 모자랄 판에 이러고 있는 건...... 다 저 개 때문이다.
까맸다.
컸다.
다리가 길었다.
어... 귀는 세모였던 것 같다.
아... 그리고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뒷걸음질을 치는 그 순간 동공이 길을 잃었기 때문이다. 심장이 심각하게 요동치고 있을 때 그가 내 앞에 서 있었다. 태산 같은 모습이었다. 조금 전만 해도 나의 등 뒤에 있던 그였다. 첫날 첫 기분에 들떠 해맑기만 하던 소풍 나온 어린애 같던 그였다.
까맣고 크고 다리가 긴 그 개가 나타난 곳은 양떼목장 담장길부터 30여분 정도 걸어오면 있는 세 갈래길 오른쪽이었다. 갈래길 왼쪽으로 가면 1구간 선자령 방향이고, 오른쪽으로 가면 2구간 국사성황당 방향인 곳이다. 그는 자기의 왼손으로 내 오른손을 급하게 잡는다. 잠시 주춤하더니 원래 가려던 1구간 왼쪽 방향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세상에... 그 녀석이 계속 쫓아오나 보다. 안 되겠는지 그 개가 나타났던 2구간 국사성황당 쪽으로 방향을 튼다. 헉...... 또 쫓아오나 보다. 그가 좁은 길 위에서 진을 빼고 있다.
그런데 내가 하는 일이라고는 금방이라도 땅으로 떨어질 듯한 심장을 부여잡고 있는 것이 전부이다. 그것만 하기에도 숨이 차다. 그가 개와의 길싸움에서 승리하지 못한다면, 강릉 지역 신문에 '개에 놀라 떨어진 심장, 바우길에서 발견' 기사가 실릴지도 모를 일이다. 오른쪽으로 가도 또 쫓아온 그 개를 피해 다시 왼쪽으로 방향을 튼다.
"저 쪽으로 얼른 먼저 가고 있어."
나 혼자 먼저 가라니 이건 무슨 또 소풀 아니 개풀 뜯어먹는 소리? '혹시라도 저 녀석이 곱게 다져진 이 흙길을 벗어나 숲을 돌아 더 약자로 보이는 나를 향해 돌격이라도 하면 어떡하라고?' '나와 떨어져 저 녀석과 맞짱이라도 뜨겠다는 건가? 영화를 너무 많이 봤군...' 이런 마음과는 달리 난 그저 고분고분 그 사람의 말을 듣는 한 마리 순한 양. 발에 모터가 달린 듯 걷기 시작한다. 얼마나 지났을까? 그가 쫓아와 말을 붙인다.
"이제 안 따라와."
"아, 이런 산에 개가 왜 있어? 빨리 바우길 사무국에 전화해 봐. 개 있다고."
그는 급하게 바우길 사무국에 전화를 건다. 직원이랑 통화를 하더니 곧 끊어버린다.
"근거리에 민가가 있대. 거기서 키우는 개일 수도 있다는데... 뭐 어떻게 할 수 있는 게 없다네."
개와는 떨어졌지만 여전히 내 발에는 모터가 달려있다. 까맣고 크고 다리가 긴 그 개에 대한 생각으로 경치고 뭐고 하나도 눈에 들어오지가 않는다. 심지어 올라오면서 봤던 풀꽃은 이름까지 외웠는데 뇌에서 삭제될 위기에 놓였다. 우려는 늘 현실이 되는 법. 실제로 삭제됐다. 머리가 나빠서가 아니다. 개 때문이다.
"그런데 아까 양떼목장 지날 때부터 굿소리 들렸잖아. 그 개 거기서 온 거 아닐까?"
"그래, 그럴 수도 있겠다. 그 개가 나타난 쪽이 쪽이 국사성황당 방향이었으니까."
"요즘에는 반려견을 산이며 바닷가며 여기저기 갖다 버린다잖아. 특히 휴가철에 심하대. 그래서 들개가 그렇게 많아진다고 하더니... 그런데 아까 그 개는 들개 같지는 않더라."
난 정말 이때까지만 해도 전혀 몰랐다. 그도 상상도 못 했을 것이다. 우리가 진짜 들개를 만나게 될 줄은.....10분 정도 지났을까? 나는 10분 전에 뱉었던 그 말을 똑같이 내뱉게 된다. '또'라는 말과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