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인 선배의 위로

모두 다 힘들일을 겪고 살아. 특별한 일이 아니야.

by 하마생각

때는 미국에서 한국으로 야반도주하기 D-1일이다. 그때만 해도 맨날 울면서 잠들 때였다.

나는 퉁퉁 부은 얼굴과 무거운 몸을 이끌고, RA 교수님이 시킨 포스터 발표 미션을 완수하기 위해 학교로 향했다.

(내 주연구분야가 아니었지만, 교수님 대신 교내에서 하는 포스터 발표에 반강제로 참여하게 되었다.)


이미 한국으로 갈 짐을 다 싸놓은 상태라서, 단정한 옷이 없어 최대한 구색을 맞춰서 입고 학회장에 도착하였다.


소심한 나는 내가 잘 모르는 분야의 학회이기 때문에, 더욱더 소심해져서 내 포스터 앞에서 뻘쭘하게 서있었다. 속으로 '아무도 제발 질문하지 말아 줘..!'라고 계속 외쳤는데, 그 오라를 느꼈는지 (아무도 말을 안 걸었기 때문에) 한참 동안 병풍동안 혼자 서있었다. 그것은 그것 나름대로 더 뻘쭘했는데, 다행히 포스터 발표시간이 거의 끝날 무렵 한두 명의 연구자들이 내 포스터에 관심을 보여 이런저런 얘기를 하고, (사실 잘 못 알아듣는 질문도 많았는데, 나름 최선을 다해 대답했다.) 집에 갈 채비를 하는데, 같은 RA교수님 밑에서 일하는 중국인 선배가 말을 걸어왔다. 그녀와는 주로 Zoom 화면을 통해서만 소통했는데 (소통이라 해도 간단하게 연구과제 진행에 있어서 필요한 얘기만 몇 마디 나눈 정도?), 이렇게 가까이서 사적으로 얘기를 나누는 건 거의 처음이었던 것 같다.


중국인 선배: 헤이, 하마. 요즘 괜찮아?

나: 응? 아니 나 사실 너무 스트레스가 많아. 졸업논문을 잘 끝낼 수 있을 찌도 모르겠고, 지도교수님은 별로 도움도 안 주셔서, 걱정이 많아.

중국인 선배: 그렇구나... 그래도 한국에 간다니 너무 좋겠다. (같이 일하는 연구팀에게 한국 간다고 말해 놓은 상태였다.)

나: 맞아, 그건 그렇지.

중국인 선배: 나는 코로나 이후로 중국을 못 갔어. 비자가 만료됐는데, 중국에서 비자를 재발급받는 게 쉽지 않거든.

나: 아 그래?? ㅜㅜ 많이 힘들었겠다.


(갑자기 분위기 반전)


중국인 선배: 나도 졸업논문 쓸 때 정말 많이 힘들었어. 갑자기 지도교수님이 몇 주만에 졸업논문 발표를 끝내라고 했고 (포닥 펀딩으로 전환해 주기 위해서 논문발표/졸업을 앞당겼던 모양이다.), 논문 발표 전에는 많이 아팠거든. (실제 그녀는 졸업논문을 단 두 달 반 만에 써냈다고 한다. living legend..)

나: 정말? ㅠㅠ 많이 힘들었겠다...

중국인 선배: 그래서 나는 정신 상담을 받고 있어.

나: 근데 나는 영어로 정신상담받는 것조차 스트레스야.

중국인 선배: 응 그건 그렇지 (그녀도 영어가 second language이다.). 그래도 누구한테 내 얘기를 하는 것만으로도 도움이 많이 돼.

나: 그래? 나도 한번 도움을 받아봐야겠다.

중국인 선배: 응.. 그리고 내 얼굴에 이거 보이지? (그녀 얼굴에는 왕여드름(추정)이 있었다.) 이거 피부암 이래. (뜨헉...!!) 스트레스가 너무 많아서 생겼나 봐. 수술해야 된데.

나:...ㅠㅠ...

중국인 선배: 너도 지금 졸업논문 때문에 많이 힘들지? 너무 걱정하지 마. 교수님들도 그게 얼마나 힘든지 아니까 이해해 주시고, 쉽게 끝날 수 있을 거야.

나: 정말 그럴까?

중국인 선배: 당연하지. (그리고 그녀는 그녀의 중국인으로써 미국에서 박사/포닥으로 지내면서 힘들었던 경험을 여러 개 공유해 줬다.)

그리곤 말했다. 다른 사람들도 다 각기 힘든 일을 겪고 살아. 너무 힘들어하지 마.

나: 그렇겠지..? 고마워 너랑 얘기하고 내 마음이 많이 풀렸어.


"다른 사람들도 나름 다 힘든 일이 있어. 너만 겪는 거는 아니니, 너무 힘들어하진 마." 이 말이 어쩌면 되게 진부하고 누구나 할 수 있는 말인 것 같지만, 그때는 그 말이 나에게 큰 위로가 되었다. 내 어려움에 너무 매몰되어서 정상적인 생각을 못하던 때라 더욱 그런 것 같다.


또한, 아마 나와 아주 가까운 사이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시간을 내어서 본인의 얘기까지 해주며.. 떠듬떠듬한 영어로 (참고로, 그녀와 나 둘 다 영어가 매끄럽지 않다.) 나를 정성스레 위로해주려고 했던 그녀의 마음이 전달되어서 위로를 받은 것 같다. 그때 나는 마음이 정말 바닥이었는데, 생각지 못한 타이밍에, 생각지 못한 상대에게서 위로를 선물로 받은 느낌이었다.


또 나는 힘들면 자국으로 돌아가서 가족들 품에서 쉴 수도 있는데, 그렇게 하기 힘든 그 선배 얘기를 들으니 내 힘듦에만 집중해서 너무 크게 생각했던 나 자신을 돌아볼 수 있게 되었고, 마음에서 조그마하게 감사가 피어나기도 했다.


생각해 보면,

내가 예기치 못하게 사람에게서 오해를 받고 상처를 받기도 하지만, 내가 노력하지도 않았는데 선물처럼 다가오는 위로도 많다. 그렇게 값없이 얻는 위로는 신기루처럼 흘려버리고 내 상처에만 집중할 때, 인간관계에 회의를 느끼는 것 같다.


다시 한번 깊게 감사해 보련다. 그날의 위로를.

내 야반도주 D-1에 감사 한 방울을 떨어뜨려준 그녀의 따뜻한 마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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