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지 사회 초년생이 아프리카 우물 모금을 한 이유 1
내가 할 이야기가 많게 된 (이야기를 많이 쌓게 된) 시작은 아무래도 웰던프로젝트 라는걸 시작한 일인것 같다. 웰던프로젝트는 우물을 뜻하는 영단어 Well에서 따온 것으로, 아프리카에 식수펌프를 설치하기 위해 만든 모금이었다.
사실 이 프로젝트는 시작하자마자 끝날뻔, 아니 시작도 못할 뻔 했다. 왜냐, 식수펌프가 너무 비싸기 때문이었다. 우물 하나에 사딸라 $10,000. 한국돈으로 해서 천 만원으로 깎아줬지만, 그래도 쌩 모금으로 모으기엔 꽤 비쌌다.
근데 그걸 왜 했냐고 물우며느
내가 부자여서 했냐? 아니, 내 통장은 100만원도 있을까 말까할 정도로 거지였다.
그럼 뭐, 인류애가 넘쳐서? 노놉, 그정도로 인류애가 넘치는 인간은 아니었다.
그럼 왜? 라고 묻는다면, 어려워 보인다고 포기하기 싫어서였다.
그하지만 더 깊이 파고들면, 그간의 결핍이 만든 경험과 관련이 있지 않았을까? 싶다.
먼저 어릴 때, 나는 그림 그리는걸 좋아해 화가나 디자이너가 되고 싶다 생각했다. 하지만 부모님께 이 이야기를 하면 '환쟁이는 밥 못벌어 먹는다' 하고 혼만 났다.
미술은 돈을 못 번다는데, 하는 데에도 돈이 많이 든다. 처음에는 포기했다가 고등학교 때 미술부에 가입하면 방과 후 미술 수업을 받을 수 있다해서 해봤지만, IMF때 아버지가 보증을 선게 잘못되어 집안 사정이 점점 나빠졌고, 그나마 버텼던 집도 날아갔다. 그런데 아버지를 보증을 서게한 아버지 친구집은 작은 아파트를 건사했다는걸 알았고, 돈을 받아야 한다며 그 집에 들어가 1년간 부대끼며 살고, 그 때문에 싸우다가 학교 대신 병원과 경찰서를 오가며 고3 시절을 보냈다.
덕분에 라고 하기엔 뭐하지만, 첫 수능은 조졌다. 그런데, 달리 할 줄 아는게 없었다. 그래서 친구들이 대학에 가서 새내기 생활을 즐길 때, 시내에서 식당 알바를 했다. 시급이 3천원 정도였나...? 식당, 편의점 등에서 알바를 하며 보니, 우선 대학에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이라면 공부 외에 다른 방법을 찾을수 있었을지도 모르겠지만 정보를 구하기 힘든 당시로서는 그게 최선이었다. 다행히 공부는 돈을 많이 들이지 않고도 할 수 있는거라 독서실에서 총무로 일하며 EBS 교재로 공부해서 대학에 갈 수 있었다.
그런데, 대학은 내가 생각한 것과는 또 달랐다. 내가 상상한 대학은 잔디밭 같은 데에 앉아서 토론을 하는 '지식의 향연?' ㅎㅎ 이 펼쳐지는 곳이었는데, 그런것 보단 취업을 위한 학원 같았다.
그리고 적응하기가 어려운 부분이 많았다. 선후배 따지는건 그렇다치고, 1학년 학생들이 미팅을 하는 데에 학교 서열을 나눈다거나, '우리는 SKY가 아니니까 과장까지 밖에 못 올라가는거 알지?' 라는 이야기를 하는것도 적응이 잘 안되었다.
내가 너무 순진했던건가...? 학회나 서클도 가입하지 않고 아싸로 지냈다. 성적은 고만고만. 외국어 전공이었는데, 언어를 배우는건 좋았지만, 이걸로 뭘할 수 있지? 뭘 할 수는 있나? 학교를 계속 다녀야 하나?하는 고민도 했다. 하지만 중퇴를 하면 고졸. 뚜렷한 대안 없이 그만두는건 아니다, 졸압은 하자며 학교를 다니다가 그래픽 디자인 잡지를 하나 발견하고 탐독하기 시작했다.
화려한 그림들을 보며 와아, 나도 이런걸 만드는 일을 하고싶다, 라고 생각하던 중, 어느날 그 잡지 귀퉁이 한 켠에 에디터를 구한다는 광고를 보고 지원을 했다. 시험과 면접 결과는 합격. 그리고 합격과 동시에 졸업을 하며 바로 일을 시작했다.
그런데 좋아하던 잡지를 만드는 일을 시작했지만, 이 일도 생각한것과는 좀 달랐다. 인생은 산을 하나 넘으면 또 다른 산이 나온다. 그게 외국계 잡지였던 덕에 나의 주 업무는 본국에서 넘어온 콘텐츠를 번역하는 것이었는데, 월급은 120만원에 3개월은 수습이라 60만원, 4대 보험은 당연히 없고, 당당하게 격주 주6일 근무에 휴가는 1년에 3일이라고 했다.
편집장, 디자이너 한 명, 일반 에디터인 나, 이렇게 셋이서 잡지를 만들었는데, 수습이라고 일을 따로 가르쳐주는 사람은 없어 알아서 수습하면서(아, 그래서 수습인가?) 잡지 만드는 일 + 단행본 두 권도 만들었다. 회사에서 외주로 기사 번역을 맡기는 것도 있었지만, 페이가 너무 짜서 그런가, 번역을 심각하게 틀리는 사람들이 보내오는 텍스트를 고치느라 야근을 하며 디스크 비스무리한게 생겨 병원을 다니게 되었지만 추가 수당 같은건 없었다. (산재도 안되는데 추가 수당이 있을리가...?)
반가워, 네가 그 유명한 열정페이구나?
아무리 10여 년 전이라고 해도 60만원으로 살기는 힘드니 시간을 쪼개 저녁에는 아르바이트를 했다. 강남을 지나는 2호선 지옥철을 타다 천식이 도져 방법을 찾다가 방을 얻기는 힘들어 지옥철을 피해 회사 근처에 아침 6시반 영어학원을 끊어 수강하며 바쁘게 살았다.
그래도 일단은 하는데까지 해보자 라고 생각하며 버텼지만, 더 큰 고민이 생겼다. 잡지를 만들며 보니 나는 잡지에 나오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번역하거나 인터뷰 하며 전달만 하는것보다, 그 사람들처럼 ‘자신의 작업을 만드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걸 깨달은 것이었다.
‘역시 난 작업을 하고 싶은가보다... 그런데 어떻게 해야하지?' 하고 고민하다가 우선은 회사가 끝난 뒤 저렴한 화실도 다녀봤지만 알고보니 그 화실은 사람들을 사이비 종교로 끌어들이기 위한 미끼 비스무리한거였고, 이내 가는걸 포기했다. 아니 진짜 멀쩡한게 없네... 내가 뭘 할수는 있는거냐?!
그러다가 잡지에 나오는 아티스트들이 공부했다는 외국의 미술 학교에 가서 제대로 배워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유학 갈 돈이 어딨냐, 당장 생활비도 부족한데, 하고 고민만 하던 중, 행동을 하게 만든 소식을 듣게 되었다.
친구의 부고 소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