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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팔 시위를 보며 생각난 네팔 이야기

남의 이야기가 아닌것 같다

요 전에는 더 나은 장소를 찾는 대신 더 나은 방법을 찾는 것이 어떤가 하는 내용의 글을 썼는데, 요즘 네팔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보며 개인의 노력만으로는 뛰어넘을 수 없는 환경이 있는것, 그리고 이게 남의 이야기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2014년, 한 NGO의 인턴으로 네팔에 가게 되었다. 네팔은 인도와 비슷하지만 나라 분위기나 사람들은 대체로 좀 더 차분하고 수줍어했다. 하지만 언뜻 평화로워 보이는 그 안을 들여다보면 사람들이 들고일어나지 않는게 이상할 정도로 문제가 많았다.


내가 따라간 NGO는 네팔 여성들의 제빵 교육을 위한 교육 기관을 만들기 위해 현지 신용협동 조합과 함께 일했다. 이 기관은 부유한 사람들의 돈을 유치해 높은 이자를 주고, 그 돈을 은행에 계좌를 만들기 힘든 서민들에게 빌려주는 대신 이자를 받는 작은 금융기관이었다. (서민들은 은행에서 대출은 커녕 계좌 개설도 힘들다고 한다)


이곳의 자금을 운용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영국이나 홍콩, 싱가폴 등에서 일하고 돌아온 구르카 용병의 부인들로(그리고 한국에서 돈을 벌어온 사람들도 소수 있었다), 이들은 해외에서 벌어온 돈과 연금으로 네팔에서 부유한 생활을 하며 그 돈을 운용해 다시 높은 수익을 내는 부유층이었다.


하지만 돈이 있어도 해결 못하는 일이 있었다. 하루는 이들과 모여 식사를 하는데, 그 중 한 분은 아들과 함께 나왔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곧 해외 대학으로 유학을 가게 되었는데, 원래 아들은 네팔에서 대학을 가고 싶었지만 네팔에서는 연줄이 없으면 아무리 공부를 잘 해도 법대나 의대를 갈 수 없어 유학을 보낸다고 했다.


그런데 이거, 똑같은 문제는 아니더라도, 이런 문제가 한국에 없다고 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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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돈 있는 사람들은 그나마 낫지, 서민들의 삶은 부정부패 때문에 답이 없어보였다.

이 날 우리가 먹은 밥 값은 약 10만원 정도가 나왔는데, 알고보니 그 식당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한 달 월급이 그 정도라고 했다.


약간 미안함을 느끼며 그 식당에서 나왔을 때, 식당 경비가 해맑게 웃으며 인사를 했다. 아- 우리 일행이 묵은, 바로 맞은편 호텔에서 낮에 경비를 서는 앳된 청년이었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호텔 경비를 끝내면 바로 이곳에 와서 일을 하는데, 못해도 하루에 12시간 이상 일하는 듯 했다.


그렇게 일하는게 이해가 되는게, 네팔은 월급 10만원으로 어떻게 살지 싶을 정도로 임금이 낮은 데에 비해 물가는 상당히 비쌌다. 내륙국인데다가 산업 기반이 거의 없어 인도에서 수입 해오는 것들이 많은데, 이 때문에 인도에서 전기를 끊겠다고 협박을 하는 일도 종종 있는듯 했다.


그런데 알고보니, 네팔은 온 네팔이 쓰고도 남아 수출까지 할 수 있을 만큼 전기를 생산할 여력이 있었다. 바로 히말라야의 큰 낙차를 이용한 수력 발전을 개발하면 되는 일이어서 외국 기업이 이를 제안했는데, 문제는 이를 담당하는 윗선들이 자신들이 받을 뇌물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이유로 개발 허가가 나지 않는듯 했다.


이런 부정부패 때문에 발전은 없고, 일자리도 생기지 않고, 네팔에서는 돈을 벌 방법이 없으니 많은 네팔 사람들이 일자리를 찾아 말레이시아, 사우디아라비아 등 해외로 떠났고,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


C3529C8F-9690-4DD6-A8E7-11AF3DED3579_1_105_c.jpeg 인터뷰 도중 정전이 되었다. 네팔에선 정전되는 시간을 알려주는 앱이 있을 정도로 정전이 일상이었다. 근데, 전기가 없는게 아니라는거...

일자리를 찾아 네팔을 떠나는 사람들의 행선지 중에는 한국도 있었다.

당시 카트만두와 인근 지역 시내에서 수 많은 한국어 학원을 봤다. 점점 정원을 줄이는 구르카 용병 시험에 비해 한국은 한국어 시험에서 일정 점수 이상을 따면 고용허가를 받을 자격을 얻을 수 있는 데다 다른 나라에 비해 월급을 많이 주기 때문에 한국으로 가고자 하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그 전에 한국에서 일하고 돌아온 사람들이 한국어 학원을 차려 많은 돈을 번다고 했다.


하지만 한국어 학원이 비싸 그나마도 다니기 힘든 사람들도 있었다. 한 번은 고향에서 도시로 올라와 햇빛도 거의 안 들어오는 작은 집에 사는 20대 젊은 부부를 인터뷰 했는데, 그 집에 낡은 한국어 교재가 있었다. 남편이 한국에 가서 돈을 벌고 싶어했는데, 학원비가 비싸 독학을 하고 있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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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모르는 부분이 있어도 혼자 하다보니 잘 하고 있는지 모르겠고, 하루 종일 일하고 돌아와 피곤한 탓에 공부를 거의 못해서 2년 넘게 초급 책 한 권을 반 밖에 못 보고 있는듯 했다. 게다가 부부 모두 고등학교를 중퇴한 상태라 월급은 낮고... 해외로 나가야 이 작은 방을 벗어날 수 있을텐데, 쉽지 않아 보였다.


이 친구, 한국에 갈 수 있을까…?

혹시 공부하면서 궁금했던게 있으면 지금 물어보세요 라고 했지만 남자는 잘 모르겠다며, 약간 자포자기한 듯 베시시 웃기만 했다. 순박하게 웃는 그 너머로, 이 집의 작은 창 너머로 새로 지은 아파트가 보이는데, 웬지 가슴이 먹먹해져 왔다. 아마 나도 취업도 잘 안되고, 이일 저일 전전하며 '나이는 먹어가는데 어떻게 해야 하나, 내 인생은 언제쯤 나아질까?' 하고 막막해 하던 때라 공감되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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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이번 네팔 시위를 보며, 그 때 보고 들은것들을 떠올리며, 늦었지만 드디어 터질게 터졌다는 생각과 함께 앞으로 이런 시위가 더 확산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많은 나라들에서 비슷한 일이 벌어져왔고, 이제 사람들은 정보를 공유할 수 있고, 참을만큼 참았기 때문이다.


한국은 네팔에 비해 덜한것 처럼 보일 수 있지만, 계엄 이후 터져나오는 일들을 보면서 기가 막히고 남일이 아니었구나 싶다었다. 그리고 그동안, 그때 네팔의 그 어두운 방의 창밖 아파트를 보며 느꼈던 먹먹함이 느껴질 정도로 이건 아니다 싶었는데도 정치인은 다 똑같고 뉴스도 보기 싫다며 무관심 했던것에 대해 반성하는 계기가 되었다.


네팔 사람들에게 이번 일이 썩은 환부를 도려내듯 아프겠지만 꼭 필요한 과정이 되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우리에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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