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순하고 소박한 하루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는 동안 주미와 수연의 얼굴엔 잡티가 제법 생겼지만, 살아오며 가슴에 맺혔던 앙금은 길 위에 녹아내렸는지 표정은 한결 밝아졌다. 순례길은 두 사람의 몸과 마음을 편안하게 만들었다.
물론 수연의 발에 생긴 족저근막염은 마지막 날까지 그녀를 괴롭혔지만 말이다.
수연은 순례자 생활을 즐겼고, 주미는 해맑고 생기 넘치는 얼굴로 변해갔다.
사실 순례자의 일상이란 단순함의 극치였다. 새벽에 일어나 대충 아침을 먹고, 여섯 시간에서 여덟 시간 동안 종일 걷다가 알베르게에 도착하는 것이었으니 말이다. 오후 1시나 2시쯤 숙소에 도착해 샤워를 하고, 순례자 점심을 먹고, 빨래를 하고, 가까운 마트에 들른 뒤 늦은 오후 햇살을 즐기는 것이 전부였다.
그 단순한 일상이 순례자의 하루였다.
생각할 것이라곤 자고, 먹고, 빨래하고, 다음 날 걷기 위한 준비를 하는 정도였지만, 그렇게 걷다 보면 처음 머릿속을 채우던 생각들이 어느 순간 길가의 잡풀처럼 스쳐 지나갔다. 점점 머릿속이 비워지고, 맛있는 또르띠야와 따뜻한 카푸치노를 먹는 단순한 일상만 남았다. 잡생각이 끼어들 틈이 없었다.
순례자 생활의 가장 큰 고비는 장시간 걷는 데서 오는 육체적 피로인데, 그 고통을 받아들이는 순간 그것은 오히려 일상처럼 익숙해졌다.
걷는 고통은 목적지에 도착하면 사라지지만, 생각의 고통은 스스로 만들어내는 것이기에, 긴 길을 걸으며 고통의 근원이 자기 자신임을 깨닫게 되는 순간을 마주하게 된다. 육체적 고통을 통해 정신적 고통의 뿌리를 들여다보게 되는 것. 몸이 감당할 수 있는 만큼 걷고, 멈추고, 쉬는 그 반복된 리듬이 주미와 수연에게는 큰 위안이 되었다.
수연은 며칠 간격으로 단체 채팅방에 사진을 올렸다. 덕희는 “두고 봐라. 나도 3년 안에 간다. 알찬 정보 다 정리해 놔라”라며 기세 등등했고, 숙이는 “난 마음만 함께하는 걸로”라며 응원했고, 성미는 “거기 가면 멋있는 남자 만날 수 있어? 나도 한번 가봐야겠네!”라며 올드미스 특유의 농담을 했다. 수연과 주미는 곧 덕희가 이 길을 반드시 걸을 것이라 확신했다. 덕희는 원래 결심하면 반드시 행동에 옮기는 사람이니 말이다.
두 사람은 폰체바돈(Foncebadón)에서 폰페라다(Ponferrada)로 가는 길목, 철의 십자가(Cruz de Ferro)에서 사진을 찍어 친구들에게 보냈다. 운이 좋아야만 볼 수 있다는 아침 햇살을 한껏 받은 순간이었다.
순례길 25일째, 주미와 수연은 비야프랑카(Villafranca del Bierzo)의 작은 알베르게에서 이른 새벽, 긴장된 얼굴로 짐을 챙겼다. 비야프랑카에서 오 세브레이로(O Cebreiro) 가는 길은 스페인 중부 레온 주에서 서쪽 갈리시아 지방으로 넘어가는 코스로, 새벽 5시 30분에 출발해 평지길 20km를 걷고, 산길 7km를 오르는 꽤 험한 여정이었다.
전날부터 인솔팀장은 일행 모두에게 겁을 주었다. 훗날 인솔팀장이 밝히길, 걷는 길이 험하다는 경각심을 주어야 전날 과음을 피하고 마음을 단단히 먹게 되어 모두가 안전하게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기 때문이란다. 20여 일을 걸어온 일행에게 적당한 긴장을 주는 일종의 노하우였던 셈이다.
경험 많은 인솔팀장은 칠흑같이 어두운 새벽, 가로등 하나 없는 도로 옆 좁은 인도를 따라 일행을 빠르게 이끌었다. 1미터도 되지 않는 좁은 길 위를 15명의 순례자들이 뱀처럼 줄지어 걸었다. 전날 밤 내린 소나기 탓에 도랑의 물소리가 발자국 소리와 뒤섞여 더욱 크게 들렸다. 앞만 겨우 비추는 헤드랜턴을 켠 채 모두가 걸음에 집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