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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거스 Dec 17. 2022

용역과 파견은 우리를 어떻게 착취하고 있나

책, 중간착취의 지옥도

  이렇게 가정해 보자. 내 월급이 200만 원인데 누군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일단 60만 원을 떼어간다. 뭐 때문에 가져가는지 말해주지 않는다. 나는 140만 원으로 한 달을 살아야 한다. 처음엔 이렇게 시작해도 갈수록 나아질지 알았다. 연차가 오르고 경력이 쌓이면 급여도 올라갈 줄 알았다. 그런데 1년이 되어 갈 때 즈음 갑자기 회사가 문을 닫는다. 퇴직금도 받지 못했다. 그런데 나는 같은 곳에서, 같은 일을, 같은 월급 받으며 계속하고 있다. 그리고 1년이 지나갈 때 즈음 회사는 또 문을 닫는다. 이런 일은 매년 반복되고, 떼인 퇴직금들은 둘째 치고, 다시 문을 여는 새로운 회사에서 나를 써줄까? 이번엔 잘리지 않을까? 그런 걱정 속에 살고 있다고 치자.

  무간지옥이 따로 있을까, 바로 그곳이 지옥이지 않을까? 삶은 나아지지 않고, 희망은 보이지 않고, 당장 내년을 계획할 수조차 없는 불안정한 삶.

  드라마 「나의 아저씨」에 나온 ‘이지안’, 「직장의 신」에 ‘미스김’은 파견이나 용역 같은 간접고용에 대해 보여주고 있다. 희망이 없는 삶에 대해서, 같은 일터에 있지만 함께 있는 그들이 내 동료도 아니고, 사장도 아닌 현실에 대해서.     


  우주로 관광을 떠나는 첨단의 시대에 플랫폼(앱)을 이용한 착취도 있다. 앱으로 집 청소를 맡기면 내가 내는 5만 7천 원 중 실제 청소를 하는 사람이 가져가는 돈은 4만 원뿐이다. 30퍼센트를 중간에서 가져간다.

대리기사는 고객들이 1만 원 내는 돈 중에 4,500원을 각종 명목으로 떼인다고 한다. 반절에 가까운 돈을 업체가 가져가는 구조다. 모두 사람장사를 하는 곳이다.      


  원청 - 용역·파견 업체 - 근로자로 이어지는 삼각구도에서 원청은 업체와 계약, 업체는 근로자와 근로계약을 한다. 원청은 용역업체에게 정해진 돈만 주면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구조다. 파견의 경우에는 일정 부분 원청에도 책임이 지워진다. 당연히 원청은 용역계약을 선호한다. 이런 간접고용의 중간에 있는 업체는 근로자와의 근로계약만 지키면 된다. 원청으로부터 근로자 몫으로 500만 원을 받아도 근로계약이 200만 원으로 되어 있다면, 300만 원을 삼킬 수 있는 구조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매년 새로운 업체를 차리면서 퇴직금을 떼어먹고, 정규직이 못 되게 막는 것 정도는 애교라고 봐야 할 지경이다. 어떤 폐기물 업체는 작업자가 유리에 찔리고 청소차 발판에 미끄러져도, 구멍 난 장갑을 홈이 닳은 안전화를 교체해 주지 않는다. 일하기 위해 필수적인 안전·피복비조차도 착복해야 하는 대상인 것이다. 원청은 그 비용을 계산해서 줘도, 중간에서 업체가 관리비와 각종 명목으로 떼어간다. 근로계약이 200만 원으로 됐다면 그것만 주고 300만 원은 삼켜도 되는 구조니까. 그 300만 원 안에는 목장갑이나 안전화, 안전모 값이 다 들어있다. 무엇을 관리하고 떼어가는 돈인가. 사실 왜 돈을 가져가는지 설명할 필요도 없다고 한다. 물어보면 알려는 준다는데, 그걸 쉽게 물어볼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바야흐로 중간착취의 시대라고 할만하다. 역사가 늘 그러했는지 모르겠으나 힘없는 자들이 감내해야 할 설움이라고 하기 에는 너무나 합당하지 않은 일이 아닌가. 노동부가 있고, 국회가 있고, 정부가 있는 이 시대에 이런 일이 벌어진다는 것이 아직도 믿기지가 않는다. 믿지 못하기에 내가 책상물림이나 하고 있는 공무원이겠지 하는 자조를 할 수밖에 없다.


  나는 원청 직원이었다. 대기업에 다닐 때는 원청의 연구원이었고, 공기업에 다닐 때는 원청의 감독관이었다. 그리고 현재도 고용이 보장되는 공무원이다. 내가 이 책을 읽고 논하는 것이 어찌 보면 강 건너 불구경 같은 일이 될 수도 있겠지만, 우리 모두는 누구나 잠재적으로 하청의 근로자가 될 수 있다. 내가 아니라도 가족 중에, 친구 중에 하청의 근로자가 있을 것이다. 정년퇴직 한 아버지가 경비원이 되실 수도 있고, 자식들 다 키운 어머니가 소일거리 삼아 청소용역업체를 다니실 수도 있다. 나 또한 공무원을 그만두게 되면, 정규직으로 제2의 인생을 시작하게 될 확률보다 계약직이나 아르바이트로 일하러 다닐 가능성이 훨씬 높다. 중간착취는 우리 모두의 문제다.


  부끄럽지만 공기업에 다닐 때 그런 생각을 한 적도 있다. 퇴직하고 할 일 없으면 업체나 차릴까. 대충 공사 하나씩 따내면 굶지는 않을 거 같다는 순진한 계산에서였는데, 그 세계에서 벌어지는 일은 사람 장사였다. 업체가 돈을 버는 게 노동자가 받아야 할 임금을 중간에서 가로채는 구조였다니. 발전소 현장에서 사망한 20대 청년 故 김용균 몫으로 책정됐던 522만 원은 그의 통장에 211만 원으로 찍혀있었다고 한다.

    

  나는 故 김용균이 근무했던 곳과 같은 계열의 에너지 공기업 발전소에 근무했었다. 그가 작업했을 환경이 얼마나 열악한지, 또 얼마나 위험한지 짐작은 할 뿐 정확히 알지 못한다. 차를 타고 근처를 지나다녀보긴 했지만 그 현장에 직접 들어간 적은 없기 때문이다. 업무도 달라서였지만, 특별히 공사가 있거나 감독할 일이 있지 않은 이상 원청이 직접 그 현장에 갈 일이 많지 않다. 발전소의 본체도 아닌 부속설비라서 그 공정의 교대근무도 하청 업체가 하는 걸로 알고 있다. 지나다니기만 했어도 그곳의 뿌연 분진과 멀리서 들려오던 굉음들은 기억하고 있다. 더럽고 위험한 일은 하청이 한다. 나는 배부른 원청이었구나 되뇌면서 내 부채의식이 더 큰 이유다.


  그 발전소에는 민주노총에 가입된 노조가 있었다. 당시 지부장이 발전소 청소용역업체 근로자들과의 연대 농성을 제안하여 많은 욕을 먹었다. 노조비는 우리가 내는데, 왜 관계없는 회사의 근로자들을 위해 시위를 해줘야 하냐고. 직원들은 우리가 그들과 같은 노동자임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엄연히 다른 계층(?)이라 생각할 수도 있겠으나, 우리는 같은 노동자다. 그리고 같은 노동자가 열악한 근무 여건 속에서 부당한 처우를 받고 있다면 얼마든지 연대해야 한다고 본다. 힘이 없는 자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연대밖에 없다. 노동운동이 그랬고, 민주화운동이 그랬고, 박근혜 대통령 퇴진 촛불이 그러했다. 세상은 연결되어 있다. 나만 잘 살고 있다고 해서 세상이 잘 돌아가고 있는 것이 아니다.


  책을 읽는 내내 느껴지는 참담함과 죄책감 때문에 울분이 터지다가도 눈물이 났던 거 같다. 세상은 늘 좋아지고 있다고 믿었는데, 없이 사는 이들에게는 더 깊은 지옥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 깊은 지옥에 사는 이들을 딛고서 좋은 세상을 살고 있는 사람들은 모두 공범들이다. 모르는 것도 죄이고, 방조 또한 죄니까. 세상을 어떤 시각으로 바라보는가는 선택의 문제겠지만, 적어도 눈을 감지 말자. 눈을 뜨는 것이 힘들지만, 눈이 시려 눈물도 나겠지만, 그래도 두 눈 부릅뜨고 어떻게 세상이 돌아가고 있는지 만이라도 알고 있자. 끝.

    

[제3회 법원본부 추천도서 독후감 공모전 자주상(1등) 수상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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