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나 오랫동안 공부했나 날짜를 세어보니 의대에 입학해서 공부한 지 3300일, 무려 9년이 지났고, 의사가 된 지 1861일이 지나서야 드디어 전문의가 되었다.
합격률이 94% 되는 시험에 무슨 걱정이냐고 했지만 몇 달 동안 배는 불러오고 이 와중에 임신성 당뇨도 진단받아 식단 관리도 하고 조기수축도 와서 시험을 보러 갈 수 있을지도 미지수였던 내겐 정말 감격스러운 소식이었다! 혼자 집에서 결과를 확인했는데 나도 모르게 합격!!!! 하고 소리를 질렀다.
며칠 전부터 불안감에 잠이 잘 안 왔다. 시험날 제대로 못 했던 게 계속 떠오르고 결정적으로 임신 핑계로 제대로 준비하지 못하고 친 거 같아 혹여 떨어지더라도 그럴만하지 싶기도 했다.
1차 시험공부를 하는 동안엔 이걸 언제 다 보나 싶어 혼자 막 울었던 날도 있었다. 임신이랑 전문의 시험을 너무 만만하게 생각했구나 싶어 갑갑하고 두려웠다. 각과 친구들한테 모르는 문제도 물어보고 단톡방에서 서로 으샤 으샤 하면서 한 주 한 주 버텼다.
태교는커녕 책상에 앉아서 3-4시간씩 고정된 자세로 있으니 설 연휴 직전에 결국 일이 터졌다. 배가 너무 아프고 뭉치는 빈도가 잦아져 응급실로 가니 자궁경부가 너무 짧다고 입원을 해야 한단다. 시험이 2주 남짓 남았는데 아가는 아직 31주밖에 안됐고 시험은 치러 가야 하니까 일주일 정도는 가만히 누워있으라고 하셨다. 복덩이에게 너무 미안했고 내 욕심이 커서 한꺼번에 하려다가 탈이 난 거 같아서 '아 그냥 시험은 욕심내지 말아야겠다' 생각하고 마음을 비웠다.
가만히 누워서 쉬니 다행히 3일 만에 수축이 사라졌다. 그만큼 앉아있는 게 복덩이한텐 너무 힘든 일이었나 보다. 좁은데 영양공급도 제대로 안되고 잠자는 사이클도 엉망이 되고 콜티졸은 있는 대로 분비되고 있었을 테니 좋은 환경이었을 리가 없겠지.. 그래도 무사히 고비를 넘겨서 복덩이한테 고맙고 미안했다.
퇴원 후에는 일주일 동안 기출이라도 눈에 바르고 가자는 심정으로 나름 열심히 했다. 그리고 희원이랑 수진이가 안 알려줬음 몰랐을 뻔한 임산부 전용 고사실에서 무사히 1차를 치렀다. 1차는 시험 합격여부를 떠나서 일단 시험을 치러 갈 수 있는 것만으로도 너무 감사할 일이었다. 1차 합격 소식을 듣고 나서 처음으로 든 생각은 "이제 책으로 하는 공부는 진짜 끝이다!"였다. 그간에 모든 고생과 설움과 걱정이 다 씻겨내려가는 느낌이었다.
대망의 2차 시험. 본 4 학생들에게 CPX 수업을 해줬던 나로서는 이걸 다시 해야 한다는 게 귀찮기도 했고 한편으로는 떨어지면 진짜 부끄러울 거 같았다. 학생 때랑은 다르게 진료를 봐오던 패턴이 있어서 시간을 맞추기가 쉽지 않았다. 며칠 동안 남편이랑 은영이랑 소윤이 덕분에 벼락치기로 케이스도 연습해보고 올해 시험 치는 다른 병원 선생님 한 분을 구해서 서로 피드백도 했다.
시험 이틀 전, 남편 회사에 코로나 확진자가 나와서 정말 시험을 못 보러 가는 건 아닌가 싶었다.. 다행히 증상도 없었고 자가 키트도 음성이라 또 한 고비를 넘기고 시험장에 도착했다. 첫날 첫 타임 시험이어서 정신없는 와중에 시험은 순식간에 끝났다. 다행히 케이스는 생각보다 무난했는데 그러니 오히려 빼먹은 게 너무 많아 정말 망친 거 같아서 우울하고 불안했다. 떨리는 마음으로 1주일을 보내면서 지금까지 공부해온 것들 뿐만 아니라 진료 본 거, 살아온 걸 반성하는 시간이었다. 혹여 너무 자만하지 않았나 떨어지면 내년엔 어떻게 준비를 해야 할까 이런저런 생각이 많았다.
그리고 오늘, 합격 발표 1시간 전에 같이 준비했던 선생님이 연락이 왔다.
'어떤 결과가 나와도 유진 선생님과 함께 공부한 시간이 제일 의미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선생님'
진심 어린 문자에 마음이 뭉클했다. 작년에 2차를 떨어지셨던 선생님이라 나보다 훨씬 절박해하셨는데 나도 선생님이랑 연습해서 정말 도움이 많이 됐다. 그리고 결과는 둘 다 합격!
정말 이 모든 과정이 무사히 끝났음에 감사했고 무엇보다도 복덩이가 잘 버텨줘서 고마웠다. 그동안 남편이랑 엄마가 진짜 많이 서포트해주고 다른 가족들이랑 친구들이 도와주고 응원해줘서 이렇게 모든 과정이 무사히 잘 끝났다. 내 합격에 자기 일처럼 기뻐해 주고 축하해준 사람들 덕분에 더 감사하고 행복한 하루였다.
9년 전 의대 입학할 때 마음이 따뜻한 의사가 되겠다고 했었는데 초심을 잃지 않고 이젠 더 좋은 의사로 거듭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