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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안 Dec 06. 2022

쉽게 읽히는 번역? 좋아요. 좋은데.

몇 달 전 '심심한 사과' 논란을 보며 통탄을 금치 못했다.

모를 수 있다. 모르는 건 잘못이 아니니까. 그런데 생소한 표현을 보고 '내가 모르는 다른 뜻이 있는지' 찾아보는 몇 초간의 수고조차도 들이려 하지 않는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다는 사실에 놀랐다.  



심심-하다3 甚深하다

형용사

I.  (주로 ‘심심한’ 꼴로 쓰여)

1.      마음의 표현 정도가 매우 깊고 간절하다.

 심심한 감사를 드립니다.

 심심한 조의를 표합니다.

 그동안의 노고에 심심한 경의를 표하는 바입니다.            



작년에 <유 퀴즈 온 더 블럭>에 영화평론가 이동진 님이 출연하신 편을 보면서도 깊은 공감을 했다.


영화 『기생충』(2019)의 한 줄 평을 '상승과 하강으로 명징하게 직조해낸 신랄하면서 처연한 계급 우화'라고 남겼는데 어려운 단어로 허세를 부린다는 악플을 받았다고 한다. 이건 논란이랄 것까지는 없지만 굳이 어려운 단어를 꼽자면 '명징하다' 정도일 것 같다.


- 명징()하다: 깨끗하고 맑다.

- 명확()하다: 명백하고 확실하다.


비슷해 보이지만 뜻은 엄연히 다르다.


사실 나도 유사한 경험을 한 적이 있다. 어느 카탈로그 번역을 하며 선택했던 용어에 '어려운 한자어'라는 피드백과 함께 수정 요청을 받았다. 어떤 유의 카탈로그였는지는 밝힐 수 없지만 해당 용어는 미디어에서도 언급되는 용어였고 맥락상 그 단어 외에는 대체할 수 있는 표현이 없었다. 원어인 한자어를 그대로 한국어로 바꿨다는 오해를 받기 딱 좋긴 했으나 어쨌든 억울했다.


그때는 촉박한 기한 내에 말도 안 될 만큼 어마어마한 분량의 번역을 소화해야 했다(사실 이런 작업을 승낙하게 된 비하인드 스토리는 따로 있지만 밝힐 수 없음을 이해해주시길 바란다). 하루에 잠도 몇 시간 못 잤고 화장실 갈 때 빼고는 컴퓨터 앞에 앉아 있기만 해서 온 몸이 쑤시고 아팠다. 마감 기한이 가까워질수록 이명 때문에 시끄러워서 잠도 못 들 정도로 몸도 정신도 피폐해졌다. 이렇게까지 나 자신을 극한으로 몰아넣어가며 번역한 이유는 단 하나였다. 스스로 납득하고 만족할 수 있으려면 그렇게 해야만 했다. 명색이 통대 졸업생인데, 어느 하나 허투루 선택한 단어가 없었다. 누가 알아주길 바란 건 아니지만 하늘을 우러러 대충 하려는 마음은 추호도 없었기에 한자어를 그대로 한국어로 치환했다는 오해를 받은 상황에 약간 발끈했다.

그래서 연 설명하는 글을 써서 보냈고, 다행히 진의가 받아들여져 용어가 수정되는 일은 없었다.


모두가 다 아는 쉬운 말 내지는 글을 구사하는 게 진짜 말을 잘하는 것이라고들 한다. 하지만 나는 그게 능사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특히나 우리말에서 한자어가 차지하는 비중은 꽤 높다. 국립국어원에 따르면, 정확한 수치는 알 수 없지만 <표준국어대사전>의 표제어에 한정하면 한자어가 차지하는 비중이 57%라고 한다. 모든 한자어에는 그 한자어가 칭하는 적확한 뜻이 있고, 우리말을 풍부하게 구사하고 심도 있게 이해하려면 한자어를 알아야 한다.


요즘 청소년들의 문해력이 심각하리만치 떨어진다는 뉴스를 본 기억도 있다. 영어를 중시하는 교육 문화, 독서량 부족 등원인으로 꼽을 수 있을 것 같다. 글로벌 시대에 영어를 구사하면 폭넓은 의사소통이 가능하다는 건 말해봐야 입 아픈 사실이다. 영어 못하는 나는 영어 잘하는 사람들 보면 정말이지 눈에서 하트가 튀어나올 만큼 멋있다. 그런데 나는 우리말을 깊이 있고 맛깔나게 구사하는 사람도 참으로 멋져 보인다. 마음 깊은 곳에서 존경심이 우러나오기까지 한다. 이를 테면 영화평론가 이동진 님 같은 분 말이다.


요즘은 두꺼운 종이사전을 갖고 다닐 필요도 없지 않은가. 스마트폰으로 포털사이트 애플리케이션을 열어 손가락 몇 번 움직이면 뜻도 한자도 금방 찾아볼 수 있다. 우리 모두 국어사전과 조금 더 친해져 보는 것은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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