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현의 맛있는 음식 인문학>
한국일보 오피니언 섹션에
매달 칼럼을 연재합니다.
28번째 칼럼의 주제는 '당근'입니다.
즐겁게 읽어 주세요 :)
Q : 68세 A씨다. 요즘 부쩍 눈이 침침해져 고민이다. 즐겨보던 스마트 폰 동영상도 줄이고 인공 눈물도 자주 넣지만 한 번 약해진 눈 건강은 쉽게 회복되지 않는다. 영양제도 꼬박꼬박 챙겨 먹건만,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 하는 노화 현상인걸까. 게다가 부쩍 푸석해진 피부까지 이만저만 속상한 게 아니다. 결국 더 비싸고 좋다는 영양제 광고를 찾아봐야 하는 걸까?
A : 당근만큼 여러 분야에서 종횡무진 활약하는 채소가 있을까. 밥상 위에서 국민 채소로 역할을 다하는 것은 물론이고 마치 사람처럼 통통 튀는 발랄한 캐릭터로 활용되기도 한다. ‘당연하지!’ 대신 ‘당근이지!’를 외쳤던 시절도 있었고, 최근에는 중고 거래 앱 이름으로도 쓰이며 하나의 고유명사로 자리 잡았다.
이처럼 귀엽고 친숙한 이미지로 사랑받는 당근이지만, 영양학적 관점으로 살펴보면 분위기가 달라진다. 당근은 ‘채소계의 인삼’ 또는 ‘비타민A의 황제’라는 권위 높은 칭호로 불린다. 그만큼 이 단단한 채소 안에 뛰어난 영양성분이 농축되었다는 말일 것이다. 노화 현상에 당근이 훌륭한 해결책이 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당근의 영어 ‘Carrot'은 켈트어 'celtic'에서 유래한 것으로 색깔이 붉다는 뜻이다. 당근이 붉은색을 띄는 것은 카로틴 성분 때문이다. 카로틴은 우리 몸에서 비타민A로 변해 프로비타민A라고도 부른다. 여러 채소 중에서도 당근은 비타민A 함량이 높은 순위로 1, 2위를 다툰다. 100g만 먹어도 성인 하루 섭취 필요량을 채울 수 있으니 괜히 ‘비타민 A의 황제’가 아니다.
‘몸이 천 냥이면 눈이 구백 냥’이라는 말이 있다. 그만큼 눈 건강은 특히 중요하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신체 중 노화가 가장 빨리 찾아오는 기관이기도 하다. 게다가 시력은 한 번 나빠지면 회복이 어렵다.
당근에 함유된 베타카로틴이 시력 건강에 도움을 준다. 눈에 좋은 다양한 영양제가 있지만, 올바른 생활 습관과 건강한 식습관부터 들여야 시너지 효과를 낼 것이다. 베타카로틴은 또 활성산소를 억제해 노화를 방지한다. 피부 건강은 물론, 암 발생 빈도까지 낮춘다. 게다가 해독 효과가 탁월해 흡연가들도 친하게 지내면 좋은 채소다. 베타카로틴은 껍질에 성분이 많이 함유돼 있으니, 되도록 껍질째 먹어야 영양분을 잘 섭취할 수 있다.
‘당근 라페’는 당근을 얇게 썰어 만드는 프랑스식 피클이다. 독일식 양배추절임 ‘사우어크라우트’랑 조리법이 비슷하지만, 당근 라페가 좀 더 아삭한 식감을 갖고 있다. 당근은 칼로리는 낮고 포만감이 크기 때문에 최근 젊은 층 사이에선 당근 라페가 다이어트 요리로 각광받고 있다. 그러나 미용 목적 외에도 새콤한 맛이 입맛을 돋우기 때문에 춘곤증이 급습하는 이 계절에 더 없이 좋은 요리이기도 하다.
채 썬 당근에 소금 한 꼬집을 뿌려 절이면 수분이 나온다. 20분 동안 절인 후 수분을 꼭 짠다. 홀그레인 머스터드 2큰술(ts), 레몬즙 2큰술, 올리브 오일 4큰술, 설탕 2큰술, 파슬리 가루를 넣고 잘 섞어 드레싱을 만든다. 이제 당근과 드레싱을 가볍게 섞으면 완성이다. 냉장고에서 숙성할수록 맛에 깊이가 생긴다. 홀그레인 머스터드의 톡 쏘는 맛과 달콤한 드레싱의 조합으로 당근을 싫어하는 사람도 부담 없이 먹을 수 있다. 느끼한 음식을 먹을 때 피클처럼 곁들여 먹어도 좋고, 바게트 위에 크림치즈나 요거트를 바른 뒤 오픈샌드위치로 즐겨도 좋다.
당근 라페에 양배추를 넣는 조리법에 대해 긍정적인 의견과 부정적인 의견이 있다. 당근에는 아스코르비나아제 성분이 함유되어 있는데 비타민C를 파괴하는 성질이 있다. 그래서 양배추를 넣으면 양배추 속의 비타민C 흡수를 저해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다행히 아스코르비나아제는 열과 산에 약하다. 라페를 만들 때는 레몬즙이 들어가므로 어느 정도 단점을 보완할 수 있다. 레몬즙 대신에 식초를 소량 넣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다.
남은 채 썬 당근으로는 따듯한 요리를 즐겨보자. 겉은 바삭하면서 속은 쫄깃한 당근 전이 주인공이다. 당근 300g 기준으로 부침가루 또는 튀김가루 3큰술을 넣고 골고루 섞는다. 전분 가루를 사용할 경우는 소금을 서너 꼬집 넣어야 간이 맞는다. 올리브유를 듬뿍 두른 팬에서 모양을 잡아 굽는다. 당근 속 베타카로틴 성분은 지용성이기 때문에 기름 또는 지방과 함께 조리하면 흡수율이 높아진다. 이런 이유로 달걀을 추가하면 포만감이 높아질 뿐만 아니라 달걀의 지방 성분이 당근의 베타카로틴 흡수율을 높여주는 효과까지 있다.
아이들에게는 치즈를 추가해 보자. 말을 안 하면 당근인지 절대 모를 쫀득한 식감과 달큰한 맛을 자랑한다. 어른도 거부할 수 없는 환상적인 맛이다.
어릴 때 싫어하던 음식이 나이가 들면서 좋아지는 경우가 있다. 그중 하나가 당근이 아닐까. 카레 속에 들어간 주황색 당근이 언뜻 보일 때마다 숟가락으로 저 멀리 치웠던 기억은 이제 흐릿해진 지 오래다. 이제는 일부러 당근을 구하여 당근이 주인공인 요리를 만든다. 그 안에서 느껴지는 선명한 단맛과 아삭한 식감이 얼마나 싱그러운 활기를 주던지. 생동감 넘치는 계절 우리 몸에도 선명한 주홍빛으로 에너지를 더해줄 시간이다.
한국일보 사이트에서 칼럼 전문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 (25.4.9 발행)
https://www.hankookilbo.com/News/Read/A202504071032000387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