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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두근두근콩 Mar 09. 2023

서행하세요.

터널을 미끄러져 들어가다 세로로 달린 빨간 표지판을 발견했다.


서행하세요


속도감을 즐기다가 곧 브레이크에 발을 가져간다. 차츰 줄어드는 속도에 적응해 가며 잔잔한 평온함을 즐긴다. 문득 얼마나 빠른 속도로 삶을 살아내려고 했었나 하는 생각이 스치듯 지나간다. 요즘은 심지어 5분 단위로 시간을 끊어내듯이 살고 있다는 사실을 문득 깨닫는다. 얼마 전 지인과 시간 약속을 잡느라 통화를 했다. 요즘 어떻게 지내는지 이야기나 하자며 가볍게 만날 일정을 정하는 중이었다. 


"토요일 11시 어때요?"

"네, 저도 토요일 좋아요. 혹시 11시 15분도 괜찮아요?"

"11시 15분요? 어머 두 근 콩님 많이 바쁘신가 봐요.~"

"네? 그건 아닌데요... 왜요?"

"시간을 5분 단위로 쓸 정도로 바쁘신 거 아닌가 해서요."

"제가 그랬나요. ㅎㅎㅎ"


나는 그때까지도 내가 얼마나 타이트한 삶을 살고 있는지 잘 알지 못했다. 10분이면, 잠시 쿠팡에 들어가서 필요한 물건을 장바구니에 담을 수 있는 시간이었고, 30분은 좋아하는 책을 20여 페이지 정도 읽을 수 있는 시간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나의 10분, 15분도 허투루 쓰고 싶지 않았다. 아이를 학원에 데려다주고, 직장으로 이동하고, 짬을 내서 김밥 한 줄 사 먹고 하려면 10분도 소중한 시간이라는 걸 뼈저리게 느끼고 있던 참이었다. 약속시간에 너무 일찍 도착하는 것도 싫었다. 미리 도착해서 어정쩡하게 보내는 시간이 마치 버려지는 시간 같았고, 그 시간을 이용해 할 만한 것들을 늘 정해두었다. 남겨진 시간도 낭비되는 인생 같아 아까운 마음이 앞섰다. 그렇게 10분이나 5분 단위까지 시간을 끊어 쓰는 것이 습관처럼 자리 잡고 있어, 삶이 이렇게 팍팍하고 인색하게 돌아가고 있는 줄도 의식하지 못했던 것이다. 


지인이 비춰준 내 모습에 순간 얼굴이 달아올랐다.  "인생을 낭비하지 마라!, 잠깐의 시간도 의미 있게 써라!, 낭비되는 시간을 줄여라!" 같은 말들 속에서, 내 몸과 마음은 많이 지쳐 있었다. 365일 중 피곤함을 느끼지 않는 날은 단 하루도 없었다. 오후 4시만 되면 이미 기력은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숨이 들고 나는 순간을 느끼고 관찰하지 못하며 기력을 소진해 갔다.


서행하세요.


유튜브 강의를 2배속으로 들으며 빠른 속도로 달리는 것만 생각했던 모습이 계기판에 떠오른다. 삶의 운전대를 잡고 있는 내게 있어 브레이크는 존재감이 약했다. 브레이크의 위치부터 다시 확인해야 한다. 그런 다음 브레이크를 밟아도 되는 순간, 밟아야만 하는 때를 관찰해야 한다. 고속 주행의 쾌감에만 빠져들어 있던 내게 오늘은 '서행하세요'라는 표지판을 잘 보이는 곳에 놓아본다. 오래 달리기 위해서, 안전하게 달리기 위해서 오늘은 서행을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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