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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 그게 뭐라니?(42)

마음으로 들고 온 자전거

by 김 미 선


지난주는 내내 비가 왔었다.

적게 온 강수량을 앙갚음하듯 폭우를 쏟아내던 하늘이 이제는 해맑다.

언제 그랬냐고 시치미를 떼듯이.

비로 마음이 아픈 모든 분들에게 새로운 희망을 축원한다.


그 무엇이든 적당한 것이 제일 좋다.

너무 많아도 너무 적어도 늘 문제가 생긴다.

많으면 흘러내리고 적으면 쪼그라드는 것이 세상 이치다.

적당히는 큰 탈이 없다.


이제 비도 올만큼 왔으니 또다시 더위가 질리도록 우리를 들볶아댈 것이다.

가마솥 옥수수처럼 땀방울을 흘리다 보면 여름도 어쩔 수 없이 물러간다.

광복절이 되면 한낮에는 여전히 뜨겁지만 저녁과 새벽공기가 달라진다.

찬물이 시원한 것이 아니라 오싹한 느낌, 그 시기가 반드시 온다.


그러고 보면 얼마 남지 않았다.

낮이 길고 과일이 풍성한 여름이 가버리면 나는 왠지 한 해가 다 간 것처럼 슬프다.

낮길이가 짧아지고 바람이 서늘해지면 외로움이 슬금거리고 나를 찾아온다.

이 열정의 여름이 끝내 도망가지 말았으면 좋겠다.

악을 쓰고 울던 매미도 차츰 기력을 쇠진하여 어디론가 사라져 버리면,

매미의 시원한 가창력을 누가 대신해 줄 것인가.


매미의 목청이 사라진 저녁노을은 노란색으로 물든다.

가을빛은 노란빛을 앞세우고 온다.

가을빛이 오기 전에 푸른 여름을 더 붙잡아두고 싶다.


지난주 미술도구들이 또다시 끌려 나왔다.

여름이 도망치기 전에 얼른 그림 한 점이라도 더 챙겨야 하리.

여름과 가을은 다르니까.


그림은 뜀이 아닌 쉼이라고 했다.

뜀이 아닌 쉼이지만 사물을 창조해 내는 생산적인 시간이다.

때론 그림이 나를 데리고 놀고 한편으론 내가 그림을 가지고 논다.


어떤 결과물이 나타나느냐에 따라 그림이 나를 데리고 놀았는지

내가 그림을 가지고 놀았는지 판단 짓는다.

의기소침과 의기양양이 두 개의 구멍을 만들어 나를 심사한다.

의기양양과 의기소침은 기분에 따라서 좌우된다.


작은 선들이 모여서 하나의 하모니를 이룰 때 그림이라는 물성이 완성된다.

희디 흰 캔버스에 선을 긋고 색을 칠하고 마음을 입힌다.

그림실력은 출중하지 않아도 그것을 향한 성의는 충만하다.

무한대 선들과 점들이 모여들어 만들어낸 하나의 완성품.

거기엔 물감밑에 숨어든 인내가 있다.


사람은 심상이 지배한다.

마음속에 챙겨진 말을 하고 마음에 들어야 선택할 수 있다.

속마음에 응집된 것들을 그대로 꺼내놓는 것이 또한 그림이다.


마음이 헝클어지면 조급증이 몰려온다.

고요한 침묵이 지배하는 공간에서 허둥대기 시작하면 붓이 흔들린다.

중심이 없는 붓은 술 취한 사람의 걸음걸이다.

희망을 전달해야 할 그림이 술에 취하면 곤란하다.


그림을 그리기 전에도 까닭 없이 심난스러운 날이 있다.

누가 뭐라지 않아도 괜스레 우울해지는 순간이 있다.

회색빛이 치받치고 올라오는 날이다.


그럴 때면 산책길로 나선다.

산책길은 온갖 나무와 잡풀과 야생화들이 어우러진 자연학습관이다.

혼자 그 길을 걷고 있으면 뽀글거리던 기포가 사라진다.


며칠 전 산책길에서 수풀에 세워진 자전거 한 대를 보았다.

한눈에 봐도 늙었다.

자전거도 늙었다고 구박을 당하는구나.

고요한 침묵만이 자전거의 버려짐을 애도한다.


저 처량한 자전거가 그림으로 다시 태어난다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 집에 가서 자전거를 그려보자.`

마음속에 들고 온 자전거는 그날 나의 동반자가 되었다.

연결선이 조금 찌그러지고 초라하지만 어떠랴.


자전거에 생명을 불어넣는 작업으로 신이 났다.

자전거 위에 바구니도 얹고 누군가를 태우는 짐칸에도 들꽃들을 앉혀놓기로 했다.

죽어가던 자전거가 활기를 찾았다.

어디든지 다시 씽씽 달려갈 것만 같다.


수많은 꽃들과 자전거는 찰떡궁합으로 뭉쳤다.

꽃송이들이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자전거가 생기롭다.

자전거가 고독할 이유가 없어졌다.


나비 두 마리의 안무로 그림이 완성되었다.

완성하여 사진을 찍으니 외롭고 슬프던 자전거가 결코 외로워 보이지 않았다.

꽃도 나비도 자전거도 그림 속에서 가족이 되었다.

버려진 자전거도 찾아오지 않는 주인을 원망하지 않으리라.

세상모든 것들은 순환의 원리를 지켜가기에.
































나는 외롭지 않아. oil on canvas.30x30

2차 덧칠이 이뤄지면 훨씬 선명한 꽃들이 피어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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