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겨진 마음을 펴는 건
나는 밤늦게까지 독서를 할 때가 많다.
하나 둘 불이 꺼지고 어둠이 지배하는 심야에도 내 방엔 불이 켜져 있다.
당연 이튿날은 소금 먹은 배추다.
소금 먹은 배춘건 내 사정이지 어김없이 일어나 아침밥을 짓는다.
아침밥을 먹여 남편을 내 보내고 집안을 치우는 건 매일 똑같이 반복하는 일상이다.
집안을 치우고 나면 유난히 좀 자고 싶은 날이 있다.
한 삼십 분만 이라도.
엊그제도 그랬다.
이리저리 어르고 달래서 나를 잠 속으로 빠뜨렸다.
얼마 못 가 옆에 있던 핸드폰이 암팡지게 울어댄다.
실눈으로 들여다본 전화번호는 모르는 번호였고 문자로 들어온 내용은 고혼진.
(젠장! 핸드폰이나 멀리 치워둘걸)
고혼진이고 뭐고 달아난 내 잠을 어쩔래.
잠만 잘 자면 고혼진 같은 거 필요 없어.
`잠보다 더 좋은 보약 있대?`
`전화번호는 또 어떻게 알았지?`
그때부터 잠은 100리 밖으로 도망쳐버렸다.
고~ 혼진 인지 고구만 지 참 밉다.
고작 10분도 안 됐는데 깨우는 건 뭐야.
적어도 30분 이상은 재우고 깨우든지 말든지.
상대방은 내가 단잠을 자려고 버둥거렸는지 밥을 먹는지 알 길이 없다.
그렇지만 나하고 안 맞는 조합인 거다.
왜 하필 그때냐 말이다.
선잠 자다 깬 어린아이처럼 화딱지가 부풀어 오른다.
이왕 이렇게 된 것 산책이나 가보자.
늘 속상하거나 답답하거나 뭔가 궁리를 좀 해야 할 때 산책길은 처방길이다.
엘리베이터가 중간층까지 내려갔을 때 고등학생으로 보이는 남자애가
엘리베이터를 탔는데 아뿔싸.
그 애는 혼자가 아닌 송아지만 한 누런 개 한 마리를 데리고 동승했다.
정말로 송아지만 한 덩치다.
엘리베이터가 그들먹하다.
개는 흘끗거리며 나를 자꾸 쳐다보았다.
강아지도 무서워 피해 다니는 겁쟁인데 좁은 엘리베이터 안에서 이 무슨 지옥행인고.
숨도 쉬어지지 않을 정도로 무섭다.
주인은 여유롭게 핸드폰을 들여다보고 있었고 나는 온몸이 경직 그 자체다.
개와 조금이라도 더 멀리 떨어져 보려고
엘리베이터 구석에 바짝 붙어서 초긴장 상태로 개주인을 쳐다보았다.
`차렷, 그대로 꼼짝 마.`
그건 개와 개 주인이 내게 하는 명령어였다.
초고속 엘리베이터도 그 시간만큼은 고장 난 듯 느리다.
양보하지 말고 제발 얼른 먼저 내려다오.
`먼저 내리세요.` 말하지 말고 뒤도 돌아보지 말고 얼른 내리란 말이다.
심장 떨어지기 전에.
그 앞에선 한 마디도 못하다가 학생이 저만치 사라져 버리자 나는 중얼거렸다.
"어떻게 저렇게 큰 개를 실내에서 키우나.
남의 심장, 간, 다 떨어지게. 참 이상한 집구석이야."
한 마디만 했다간 개가 `컹` 짖기만 해도 `쿵` 실신할 것 같은 위기감 속에서
겨우 해방된 뒤풀이다.
여러 사람이 사는 아파트는 별별 별종들이 다 산다.
그러거나 말거나 남에게 피해만 주지 않으면 되는 거다.
어른도 이렇게 무서운데 어린 아기는 또 얼마나 무서울건지.
이렇게 큰 개와 엘리베이터에서 마주하긴 처음이다.
새로 이사를 왔다면 이거 큰일이다.
다음에도 이 개와 마주하지 말란 보장이 없는데 그땐 어쩌지?
참 묘한 고민거리가 또 하나 보태졌다.
견주들이 하는 소리는 매번 "우리 개는 안 물어요."
물든 안 물든 큰 개 앞에서는 누구나 쫄린다.
개가 이성이 있는 것도 아니고 상황이 급박하면 언제든지 물 수 있다.
견주에겐 애완이지만 타인에겐 공포다.
견주는 늘 이런 입장을 염두에 두고 사람들을 겁먹게 해서는 안된다.
구시렁거렸지만 산책길은 언제나 옳다.
파란 하늘 아래 고추잠자리들이 군무를 즐긴다.
귀여운 것들, 무해한 것들, 유순한 것들.
산책길 주변은 늘 부산스럽다.
개미가 줄지어 기어가고 하루살이가 앞길을 막아서고,
어제 못 피었던 들꽃이 청순한 자태를 드러낸다.
부산스럽지만 질서가 있고 온전한 너와 내 차례가 있다.
속상했던 일, 짠했던 일들이 쫑알쫑알 피어나 내 마음에 정화수를 끼얹는다.
그 시간만큼은 내가 나를 대접하는 시간이다.
산책을 다녀와서 조금은 꿀꿀했던 기분이 사라졌고 저녁상을 차리는 일에도 활기가 붙었다.
그런데 남편에게 문자가 오길 "저녁 안 먹어. 누굴 만나기로 했어."
뭐야.
남아도는 저 고봉밥은 내가 며칠씩 물 말아먹어야 할 헌 밥이 된 거다.
오늘은 왜 이렇게 되는 일이 없는 날인가.
마음이 죄다 구겨졌다.
구겨진 마음을 펴는 건 그림을 그리는 것.
산책길에서 만난 이쁜 고추잠자리, 걔네들을 화폭으로 불러들이기로 했다.
화구 앞에 앉으면 구겨진 마음도 펴진다.
이래서 취미는 보약이다.
하얀 캔버스가 구름으로 꽃으로 잠자리로 피어나 나를 달래준다.
진짜 내 편은 나뿐이다.
누가 나를 잠시 위로해 줄지라도 그건 금세 사라진다.
기분이 나쁘거나 우울할 때 내가 나를 제대로 달래줘야 진정한 보살핌이 된다.
애쓰고 고달픈 하루라도 내가 기댈 곳이 진정으로 한 조각이라도 있다면,
그건 안온한 하루를 마감 짓는 소박한 보상이 될 것이다.
무해한 것들. oil on canvas.20X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