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역사와 양궐 체제
조선의 수도였던 한양, 지금의 종로구 일대엔 궁궐이 다섯 군데나 남아있습니다. 꽤 많은 숫자죠? 오늘날 대통령이 한 곳에 머무르며 국정을 운영하는 관행에 비추어 본다면 상당히 의아한 일입니다. 얼핏 생각하면 궁궐 하나만으로 충분했을 거 같은데, 왜 이렇게나 많은 궁궐을 지었던 걸까요? 혹시 조선의 임금들이 사치를 부렸던 흔적은 아닐까요?
글쎄요. 그렇게 보기는 어렵습니다. 조선의 왕권이 그렇게까지 강하지는 않았으니까요. 물론 오늘날 대통령과 비교해 본다면 권한이 막강하긴 했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왕권은 신료들의 견제를 많이 받았고, 제한적으로 행사되었습니다. 권력을 남용하며 폭주했던 연산군과 광해군은 반정으로 쫓겨나는 결말을 맞았고요.
게다가 조선의 미술은 이전 시대에 비해 소박하고 절제된 미감을 보여줍니다. 검소함과 실용성을 중시하는 성리학의 영향 때문입니다. 이런 조선이 다섯 군데나 되는 궁궐을 짓다니, 이걸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모르겠군요. 옆나라 중국이야 나라가 크고 국력이 강하니 별궁을 두었다지만, 작은 조선은 어떻게 궁궐을 다섯이나 짓고 운영하였을까요?
이 점은 조선의 역사를 살펴보아야 이해할 수 있습니다. 1392년 조선을 개창한 태조 이성계는 수도를 개경에서 한양으로 옮깁니다. 새로운 수도에 걸맞는 궁궐이 지어지니 바로 경복궁(景福宮)입니다. 태조가 경복궁에서 새 나라의 기틀을 잡느라 불철주야 노력하던 찰나, 다섯째 아들 방원이 왕자의 난을 일으킵니다. 거사는 성공했고, 그 결과 경복궁에서 많은 피가 뿌려집니다. 방원은 왕자의 난으로 실권을 잡았으나, 아버지를 의식했는지 형인 방과를 먼저 왕위에 올립니다. 자신은 2년 뒤 즉위하는데, 이가 바로 3대 국왕인 태종입니다. 태종은 많은 사람이 희생된 경복궁이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정적인 정도전이 설계했다는 점 또한 그가 경복궁을 기피하게 만든 요인이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새로운 궁궐의 창건을 지시합니다. 1405년 10월, 향교동에 새 궁궐이 완성되니 바로 창덕궁(昌德宮)입니다. 창덕궁은 법궁(法宮)인 경복궁을 보조하는 이궁(離宮)이었습니다. 태종은 평소 창덕궁에 머무르며 집무를 보았고, 중요한 행사가 있을 경우에만 경복궁을 활용했습니다. 이렇게 지어진 창덕궁은 왕들의 많은 사랑을 받았습니다. 후대의 왕들도 창덕궁에 오랜 기간 머물며 외국 사신 영접이나 조회 등 격식있는 행사가 있을 경우에만 경복궁을 활용하는 양상을 보입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명확한 기록이 남지 않아 정확한 이유를 알 수 없습니다. 일각에서는 풍수적인 이유로 경복궁을 기피했다고 추정하고 있습니다.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자연지세에 순응하여 지어진 창덕궁이 이념과 격식을 따져 지은 경복궁 보다는 생활하기 편리하여 선호했던게 아닐까 합니다. 창덕궁이 완성됨으로써 조선왕조는 법궁인 경복궁과 이궁인 창덕궁을 두는 소위 양궐체제를 갖추게 됩니다. 양궐체제란, 제1 궁궐인 법궁(法宮)과 보조 궁궐에 해당하는 이궁(離宮)을 함께 두고 관리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평상시에는 왕이 법궁에 머물며 정사를 보지만, 화재나 전염병 같은 변고가 발생할 경우를 대비하여 별궁인 이궁을 두었던 것이죠.
경복궁과 창덕궁, 두 궁궐을 활용하던 조선왕조는 9대 임금인 성종(成宗) 대에 다시 새로운 궁궐을 짓습니다. 8대 임금인 예종이 단명하며 등극한 성종은 세조 비 정희왕후, 예종 비 안순왕후, 친모인 소혜왕후(인수대비), 이렇게 세 분의 대비를 한꺼번에 모셔야 하는 상황에 직면합니다. 대비는 전직 왕비이자 왕의 어머니, 또는 할머니입니다. 그러므로 소홀히 대접할 수 없는 분들이죠. 현존하는 궁궐들만 봐도 대비의 공간은 왕비의 침전 못지않은 공역을 들였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 대비가 세 분이나 계셨으니 기존의 궁궐로는 부족했겠지요. 그래서 태종이 상왕시절 머물던 수강궁(壽康宮)을 확장하여 창경궁(昌慶宮)을 만들게 됩니다. 창경궁은 생활공간의 부족이라는 현실적 문제 때문에 창건되었습니다. 그래서 창덕궁과 연달아 붙어있죠. 창덕궁과 거리가 멀다면 임금이 대비들께 문안을 드리고 보살펴드리기 불편했겠죠.
평화로운 나날을 보내던 조선왕조는 1592년, 임진왜란이라는 전대미문의 위기를 맞게 됩니다. 명(明)을 정복하려는 야심에 불타던 도요토미히데요시가 조선을 침략해온거죠. 일본군은 부산포에 상륙한지 20일 만에 수도 한양을 점령합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궁궐과 종묘가 모두 타버리는 비극이 발생하죠. 이순신의 수군과 의병들의 활약, 명나라의 지원에 힘입어 전쟁은 조선의 승리로 마무리됩니다. 하지만 수많은 백성들이 희생되었고 국토는 쑥대밭이 되었죠. 국왕 선조는 도성에 돌아왔지만 거처할 공간이 없었습니다. 하는 수없이 월산대군의 저택에 임시로 머물게 되는데, 당시엔 이곳을 정릉동 행궁으로 불렀습니다.
전쟁으로 나라 살림이 피폐해졌기에 궁궐을 다시 짓는 일은 쉽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나라를 다스리려면 궁궐은 있어야 했기에, 조정은 재건을 추진합니다. 그리하여 광해군 즉위년(1608년)에 창덕궁이 중건되죠. 그런데 한가지 주목할 점은, 법궁인 경복궁 대신 이궁인 창덕궁을 지은 것입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풍수 상의 이유로 경복궁 재건을 꺼렸다는 견해가 있지만, 뚜렷한 기록이 없는 탓에 하나의 설로만 존재하고 있습니다. 창덕궁에 이어 1616년 창경궁까지 중건되면서 왕과 신하들이 나랏일을 살피는 어엿한 공간이 다시 갖춰집니다.
그런데 당시 국왕이었던 광해군은 여기에 만족하지 못하고 또다시 궁궐을 짓는 일에 몰두합니다. 이번엔 자그마치 세 곳으로, 인경궁과 자수궁, 경덕궁(지금 경희궁)**입니다. 임진왜란이 끝난지 얼마 되지 않아 어려운 형편에 종묘와 사직단, 창덕궁과 창경궁까지 쉬지 않고 지었습니다. 이제는 만족할 법도 한데, 광해군은 무서울 정도로 궁궐에 집착했습니다. 상식적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처사이지요. 당시 광해군의 심리 상태를 정확히는 알 수 없으나, 광해군의 부족한 정통성 때문으로 보는 시각이 많습니다.
잠시 광해군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광해군은 선조와 공빈 김씨 사이에서 태어난 둘째 아들입니다. 적통이 아닌 방계 출신으로 왕위를 이은 선조는 본인의 출생에 대한 열등감이 심했습니다. 그래서 반드시 왕비가 낳은 적장자에게 보위를 물려주려 했죠. 하지만 첫째 왕비인 인의왕후는 아들을 낳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임진왜란 당시 조정이 의주까지 피난을 가는 급박한 상황에 몰리자, 선조는 하는 수 없이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합니다. 본래 첫째 아들인 임해군이 있었지만, 품성이 좋지 않았기 때문에 대안으로 둘째인 광해군을 책봉한 것입니다. 광해군은 전쟁 기간에 분조(조정을 둘로 나누어 국정수행) 활동을 하며 많은 활약을 했고, 능력을 인정받게 됩니다. 신하들 사이에서도 광해군에 대한 평가는 좋았죠.
하지만 선조는 이를 못마땅히 여겼습니다. 전쟁이 조선의 승리로 끝나자, 새 왕비를 들이는데 이분이 인목왕후입니다. 새 왕비는 선조의 기대에 부응하여 영창대군을 낳았지만, 이로 인해 왕가의 후계구도가 꼬이기 시작합니다. 세자 광해군의 입지는 불안해졌죠. 선조의 인정을 받지 못한 상태에서, 적장자가 태어났으니까요. 불행중 다행으로(?) 선조가 일찍 승하하며 광해군은 왕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왕이 되고서도 불안했는지 친형 임해군과 배다른 동생 영창대군을 죽입니다. 새어머니 인목대비는 폐서인하여 별궁에 유폐시키죠. 이런 조치들은 훗날 반정 세력이 광해군 폐위의 명분으로 내세운 폐모살제(廢母殺弟)에 해당합니다. 당시 정서로 보아 온당치 못한 일이었죠. 임진왜란 당시 총기를 보여준 광해군이 막상 왕이 되자 이런 잔인무도한 일을 벌이고, 필요 이상으로 궁궐에 집착했던 모습은 그의 불안했던 입지와도 관련성이 있다고 여겨집니다.
그래서 광해군은 인경궁과 자수궁, 경덕궁을 동시에 짓는 무리수를 둡니다. 공사는 계속 진척되어 세 궁궐이 거의 완공될 무렵, 반정이 일어나며 광해군은 쫓겨납니다. 반정 세력이 새로운 왕으로 추대한 인물은 능양군으로, 이분이 조선의 16대 국왕 인조입니다. 인조가 등극하자 광해군 시대 폐정의 상징이던 인경궁은 헐렸고, 자수궁은 선왕의 후궁들이 머무는 비구니 사찰로 용도가 변경됩니다. 다만 경덕궁은 본래 정원군의 집 터였다는 이유로 보존됩니다. 뜬금없이 정원군이 누구냐고요? 선조와 인빈 김씨 사이에서 태어난 인물로, 인조의 친 아버지입니다.
경덕궁이 살아남은데는 인조 개인의 의지가 크게 작용했습니다. 왜냐면 인조 역시 광해군처럼 왕으로서 입지가 불안했거든요. 반정으로 즉위하긴 했지만, 왕실의 혈통을 따져보면 광해군보다 못했습니다. 신하들의 도움 없이는 왕이 되지 못했을 운명이었던 겁니다. 국왕으로서 당당하게 정국을 주도하기보다는, 은연중 신하들의 눈치를 살펴야 했죠. 이 점은 앞서 연산군을 축출하고 즉위한 중종도 마찬가지였죠. 그나마 중종은 왕비 소생의 대군이었으므로 혈통 상의 문제는 없었습니다. 하지만 인조는 아버지 정원군이 후궁 소생의 서자였으니 이런 부분이 더 크게 다가왔을 겁니다.
이 부분은 능력주의 사회인 오늘날엔 큰 문제가 아닙니다만, 당시는 신분과 혈통을 중시하던 조선시대입니다. 인조 입장에서는 나름대로 심각한 콤플렉스였을 겁니다. 그리하여 인조는 신하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아버지 정원군을 왕으로 추숭하는 작업을 벌이는데요. 마침내 아버지 정원군을 원종(元宗)으로 추존하는데 성공합니다. 인조가 경덕궁을 남겨둔 이유도 이런 측면과 연관지어 생각할 수 있습니다. 아버지가 머물던 공간을 성역화하고, 이렇게 형성된 권위를 바탕으로 자신의 집권을 합리화하고 싶었던 것이죠. 이렇게 광해군이 짓고 인조가 선택한 경덕궁은 조선 후기 창덕궁ㆍ창경궁과 함께 왕과 신하가 나랏일을 보는 중요한 공간으로 자리매김하게 됩니다.
숙종과 영ㆍ정조 시대를 거치며 발전하던 조선은 19세기로 접어들며 쇠퇴하기 시작합니다. 안동 김씨와 풍양 조씨 같은 소수의 가문이 국정을 좌지우지하는 세도정치가 펼쳐졌고, 관리들의 부정부패에 신음하던 백성들은 크고 작은 민란을 일으키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이무렵 근대화에 성공한 서구 열강들이 아시아 각국으로 침투해 들어왔죠. 일본은 미국에 의해 강제 개항을 당했고, 청나라 역시 아편전쟁을 계기로 열강들에게 수탈당하기 시작했습니다. 조선의 앞날은 풍전등화 같았죠. 이때 25대 국왕 철종이 승하하고, 새롭게 고종이 등극합니다(1863년). 나이 어린 고종을 대신하여 생부 흥선대원군이 실권을 잡는데요. 그는 1865년부터 무너진 왕실의 권위를 다시 세우고자 경복궁 중건 사업을 크게 벌입니다. 중건 공사는 1868년 마무리되었고 고종이 임어*(臨御)하면서 경복궁은 다시 법궁이 되죠.
나라를 다시 일으키고자 세운 경복궁이었지만, 당시 국제정세는 조선에 불리했습니다. 재빨리 근대화에 성공하여 조선을 노리던 일본과 조선에 대한 종주권을 놓치기 싫었던 청나라, 조선을 통해 부동항을 얻으려던 러시아 등 여러 열강들이 호시탐탐 조선을 엿보았습니다. 그 와중에 조선이 일본 견제를 목적으로 러시아 쪽으로 기울자, 일본은 이를 주도한 명성황후(민비)를 한밤 중에 습격하여 살해하는 만행을 저지릅니다. 이른바 을미사변이죠.
을미사변으로 신변의 위협을 느낀 고종은 경복궁을 버리고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하는 아관파천을 단행합니다. 당시 고종 입장에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을 겁니다. 하지만 일국의 군주가 궁궐을 버리고 타국의 외교공관에 머물게되니 체모의 손상이 이만저만한 게 아니었죠. 절치부심하던 고종은 러시아 공사관에 머물며 새로운 국가체제를 구상하게 됩니다. 어느 나라의 간섭도 받지 않는 어엿한 독립국말이죠. 그를 위해선 과거 조선이 지향한 제후국 체제를 탈피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고종은 새로운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정하고, 황제의 자리에 등극하게 됩니다. 이것은 더이상 청의 종주국이 아니며, 일본을 비롯한 열강들의 속박에서 벗어나겠다는 선언이었던 것입니다.
고종은 이제 대한제국을 다스리는 황제로 거듭났습니다. 황제 체면상 제후국 체제에 기반한 경복궁이나 창덕궁에서 머무를 수는 없겠죠? 또 을미사변을 겪었으니 기존 궁궐에 머무는게 불안하기도 했을겁니다. 따라서 각국 외교 공관들이 밀집한 정동 일대에 새로운 궁궐을 짓게 되는데, 이것이 경운궁입니다. 지금은 덕수궁으로 알려졌지만, 본래 이름은 경운궁이었습니다. 이렇게 마련된 경운궁은 10년간 대한제국의 여러 개혁과 근대화를 추진하는 산실이었죠.
하지만, 일본은 대한제국을 삼키려는 야욕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1904년 발발한 러ㆍ일 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자, 더이상 일본을 견제할 수 있는 나라는 없었습니다. 일본은 1905년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고, 급기야 1907년에는 고종을 강제로 퇴위시키기에 이릅니다. 고종이 퇴위하자 다음 황위는 황태자였던 순종이 이어받게 됩니다. 순종은 황제로써 창덕궁에 머물렀고, 아버지 고종은 경운궁에 머무르게 되었죠. 이는 부자 사이를 떼어놓으려 했던 일본의 모략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이때 순종은 고종의 장수를 기원하는 뜻으로 '덕수'라는 궁호를 올렸는데, 이것이 궁의 이름으로 굳어져 지금까지 덕수궁이라는 명칭으로 쓰이고 있습니다. 궁호가 경운궁에서 덕수궁으로 바뀌면서 사실상 이곳은 정치 공간으로서의 성격을 상실하고 말았습니다.
지금까지 간략하게나마 서울에 있는 5대 궁궐의 역사를 살펴보았습니다. 다섯 궁궐은 결코 한꺼번에 지어지지 않았으며, 역사적 상황에 따라 필요에 의해 창건되었습니다. 궁궐은 왕과 신하들이 한데 모여 나랏일을 보는 공간입니다. 그런만큼 궁궐에는 조선의 역사가 담겨있습니다. 궁궐을 깊이있게 이해한다면, 조선을 이끌어갔던 왕과 사대부들이 어떤 생각을 했으며, 역사의 고비마다 왜 그런 결정을 했는가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궁궐 현판이나 각종 장식에는 조선 사람들의 가치관이 담겨있습니다. 이를 알게되면, 작게는 조선시대 문화와 예술을 이해할 수 있고, 크게는 전통문화 전반을 이해하는 발판이 될 것입니다. 저도 아직 공부하는 입장이라 부족한게 많지만, 우리 문화를 즐기고 이해하고자 하는 분들께 작은 도움이나마 드리고 싶습니다. 앞으로는 주기적으로 궁궐에 대한 글을 써보겠습니다. 많은 기대 부탁드립니다.
*임어 : 왕이 머문다는 뜻
**경덕궁의 이름을 경희궁으로 바꾼 사람은 영조입니다. 그 이유는 원종의 시호인 경덕과 이름이 같기 때문이라는 명분이 바탕이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