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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장 구석에 놓여있던 청자의 비밀

청자상감동화 포도동자문 조롱박 모양 주자

by 늦깎이 미술사학도

작년 11월부터 올해 3월까지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진행된 고려 상형청자 전시가 성황리에 막을 내렸습니다. 저는 이 전시를 두번이나 관람했으며 도록까지 구매했습니다. 상형청자의 매력에 빠진 것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유튜브에 업로드 할 영상을 만들기 위해서였죠. 좋은 영상을 만들기 위해 도록과 각종 논문을 뒤지며 공부했고, 전시도 두차례나 관람했습니다. 하지만 공들여 만든 영상 네 편 모두 저조한 조회수와 시청지속시간을 기록했습니다. 처절한 실패였죠.


유튜브는 본 글의 주제와 거리가 있으니 논외로 하고, 상형청자에 집중해 보겠습니다. 당시 박물관에서 전시를 유심히 보던 찰나, 주자 한 점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그 주자는 기형이 조롱박(표주박)이므로 식물 모양 상형청자로 분류되었습니다. 조롱박의 기형에 꼬인 덩굴을 연상시키는 손잡이, 긴 주둥이와 작은 뚜껑을 갖추고, 넓적한 승반 위에 올려진 완전한 모습의 청자 주자였죠.


당시 전시장에는 이 주자를 포함한 여러 조롱박 모양 주자들과 죽순 모양 주자, 참외 모양 병 등이 놓여있었는데, 이 주자는 그저 비슷한 유형 가운데 하나로써 눈에 잘 띄지 않는 안쪽에 놓였습니다. 식물형 상형청자로 분류는 되지만 뚜렷한 개성은 없다고 판단된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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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자 상감 동화 포도 동자 무늬 조롱박 모양 주전자와 받침_PS0100100100500001900000_0.jpg
여러 식물 모양 상형청자들과 함께 전시되었던 <청자상감동화 포도동자문 조롱박 모양 주자>


하지만 이 주자는 저의 주목을 끌었습니다. 왜냐면 표면에 장식된 독특한 문양 때문입니다. 그것은 여지껏 다른 도자기나 회화에서 보지 못했던 포도동자문이었죠. 어쩌면 제가 도자기를 잘모르기 때문에 이 작품에 관심을 갖게 되었는지도 모릅니다. 가끔씩 읽어본 도자 연구 논문들은 주로 기형과 유색, 굽받침 등이 중요한 분석 대상이었고, 문양에 대한 논의는 상대적으로 적었습니다. 문양은 오히려 회화 같은 타 장르에서 다루어지는 경향이 있습니다. 현존하는 작품이 부족한 시대를 연구할 경우 도자의 문양이 간접적으로나마 도움을 주기 때문입니다.


오늘 거론할 조롱박 모양 주자의 포도동자문도 비(非) 도자 분야 연구자들이 많이 다룬 소재입니다. 불교미술, 금속공예, 복식 등 다양한 학자들이 관심을 가졌죠. 덕분에 공부할 거리가 많아져 저로써는 힘들었네요. 공부를 하면서 한가지 놀랐던 점은 이 문양의 기원이었습니다. 우리 미술의 대부분이 중국에 기원을 두고 있는만큼, 저는 이 문양도 중국에서 들어왔다고 생각했습니다.


포도동자문의 기원 : 고대 로마

하지만 포도동자문은 중국에서 기원하지 않았습니다. 현존하는 가장 이른 사례는 고대의 로마 미술에서 발견되고 있습니다. 그리스와 인접한 로마는 일찌감치 그리스 문화를 받아들였고, 자신들의 기질에 맞게 발전시켰습니다. 로마는 지중해의 패권을 장악하였고, 그들이 받아들인 그리스 문화는 유럽 문화의 주류가 됩니다. 그리스 문화의 한가지 특징은 다신교라는 점입니다. 다양한 신들이 존재하였고 신앙되었죠. 이들 대부분은 로마에서도 이름만 바뀌어 그대로 신앙되었습니다. 오늘의 주제인 포도동자문과 관련된 신은 디오니소스입니다(로마식 표현은 바쿠스).


디오니소스(바쿠스)는 축제와 유흥, 풍요, 다산 등 여러 쾌락을 관장하는 신입니다. 당시 로마에서는 풍요와 다산을 기원하는 디오니소스 제의가 활발하게 이루어졌죠. 그를 나타내는 여러 상징 가운데 하나는 포도입니다. 이는 포도주를 즐겨마셨던 그리스ㆍ로마 문화의 반영으로 추정됩니다. 무성한 덩굴에 많은 열매가 달리는 포도는 그 모습 자체로 풍요를 연상시키죠.

800px-Dionysos_Louvre_Ma87_n2.jpg <디오니소스 조각상>, 2세기 로마, 프랑스 루브르 박물관


당시 로마인들은 미술에 풍요를 상징하는 포도 도상(이미지)를 적극 활용했는데요. 대표적으로 석관 장식에서 그 모습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게티 빌라 박물관이 소장한 <로마 석관>에는 날개달린 어린 아이들*이 포도밭에서 포도를 수확하여 발로 밟아 으깨는 모습이 부조로 확인되는데, 모두 포도주를 만드는 과정입니다. 이러한 장면은 디오니소스 축제와 관련하여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세상에, 장례식용 석관에 축제를 연상시키는 이미지라니, 조금 의아하지요? 하지만 여기에는 망자가 사후세계에서 영원한 풍요와 즐거움을 누리길 기원하는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풍요롭고 즐거운 디오니소스 제의와 같은 날들이 저승에서 계속되길 바랬던 것이죠.


*이들은 사랑의 신 에로스(Eros)로 추정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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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석관>, 290~300년경, 게티 빌라 박물관 소장(오른쪽은 확대 사진)


디오니소스 이미지는 기독교 미술로 계승됩니다. 기독교는 기존의 그리스ㆍ로마 신화를 인정하지 않았으나 수백년간 로마인들의 문화 속에 각인된 다신교의 전통은 쉽게 뿌리 뽑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한 양상을 로마 <콘스탄티나 영묘>의 천장 모자이크화에서 관찰할 수 있습니다.

산타 코스탄차 영묘2.jpg 로마 <콘스탄티나 영묘>, 350년경


<콘스탄티나 영묘>의 천장 모자이크화를 보시면 죽은 콘스탄티나의 초상 주변으로 어린 아이들이 포도를 수확하여 수레에 실어 옮기고, 발로 밟아 으깨는 장면이 묘사되어 있습니다. 고인이 된 콘스탄티나의 행복을 기원하는 장식으로, 앞서 보셨던 게티 빌라 박물관 소장 <로마석관>과 다르지 않습니다. 한가지 차이라면 아이들의 등에 날개가 없다는 겁니다. 이들은 더이상 사랑의 신 에로스가 아닌 평범한 사내아이일 뿐입니다. 기독교의 공인 이후 조성된 영묘이기 때문에 신화적 요소가 배제된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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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스탄티나 영묘의 천장 모자이크화, 350년경


그런데 이곳에 안치되었던 콘스탄티나의 석관은 기존의 신화적 도상을 계승 하였습니다. 이 석관은 현재 바티칸 박물관에 보관되고 있는데요. 날개달린 사내 아이들이 포도주를 따서 수확하는 장면을 묘사하고 있죠. 다만 기존의 도상과 차이가 하나 있습니다. 포도 수확과 포도를 밟아 으깨는 장면이 정면과 측면으로 분리되었다는 점입니다. 기존의 도상을 둘로 나눈 이유는 명확히 알 수 없지만 모종의 의미가 있는 것으로 추정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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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스탄티나 석관(정면)>, 350년경, 바티칸 박물관
콘스탄티나 석관 측면부조.jpg <콘스탄티나 석관(측면)>, 350년경, 바티칸 박물관


포도동자 도상과 불교의 만남

포도동자 도상은 동서 교류를 통해 간다라와 인도로 전파됩니다. 알렉산더 대왕의 원정 이후 이 지역과 유럽은 많은 교류가 이루어졌고, 이는 서방의 미술이 동방으로 전파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당시 이 지역으로 많은 그리스계 이민족들이 유입된만큼, 이를 디오니소스 제의의 흔적으로 보기도 합니다.


다만 로마인들이 장의미술(葬儀美術)에 포도동자 도상을 활용한 반면, 이 지역 사람들은 주로 불교미술에 활용했습니다. 그래서 해당 이미지들은 불탑이나 사원 건축의 부조 등에서 많이 발견되죠. 아래 탁실라 박물관 소장품을 보시면 무거운 꽃줄을 든 동자들이 확인됩니다. 이들이 서구적인 이목구비에 튜닉 차림, 콘트라포스트 자세를 취한 점으로 미루어 헬레니즘기 로마미술의 영향이 엿보입니다. 어깨에 맨 꽃줄은 상당히 도식화되어 마치 뱀처럼 보이는데, 늘어진 부분에 포도가 달려 있습니다.

Festoon-Motifs-Taxila-Museum- Gandhara4.jpeg <꽃줄을 든 동자>, 탁실라 다르마라지카 출토, 1~3세기, 탁실라 박물관


영국박물관이 소장한 <꽃줄을 든 동자> 부조편 역시 유사합니다. 다만 몇가지 차이를 짚자면 동자들이 나신에 가깝고, 꽃줄이 늘어진 곳에 석류와 포도가 달려있다는 정도지요. 연구에 의하면 이러한 부조에 묘사된 동자들은 에로스가 아닌 인도의 토속신 약샤(Yakṣha)입니다. 약샤는 우리말로 야차(夜叉)라 합니다. 본래는 인도의 토속신이었으나 불교에 흡수되어 불법을 수호하고 부처님께 공양을 올리는 존재가 되었죠. 따라서 부조편의 약샤들은 로마 석관에 새겨진 에로스들과 의미가 다릅니다. 겉보기에 이들은 열반에 든 부처님께 꽃과 과일 공양을 올리는 모습입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불탑과 사원에 공양한 이들에게 그 공덕이 돌아가기를 기원하며 조각되었을 것입니다.

패널 간다라 출토 부조.jpg <꽃줄을 든 동자>, 2~3세기, 파키스탄 출토, 영국박물관


아래 영국박물관이 소장한 부조편은 덩굴 속에서 약샤 하나가 포도송이를 들고 서있습니다. 포도가 기본적으로 풍요를 상징하는 점을 생각해보면, 이들 부조 편은 부처님 세계의 풍요와 기쁨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또한 우리가 사찰 건물에 화려한 단청을 칠하여 불세계의 장엄함을 드러내듯, 이들 부조편도 비슷한 맥락으로 불탑이나 사원을 장식했으리라 추정됩니다.

간다라 출토 부조2.jpg <포도덩굴과 동자>, 1~3세기, 영국박물관



중국의 포도동자 도상

사마천의 『사기』나 반고의 『한서』를 참고하면, 중국에 포도가 유입된 시기는 한나라 시대로 판단됩니다. 당시 한(漢)이 흉노와의 전쟁에서 승리하며 실크로드를 개척하자 서역과의 교류가 활발해지는데, 그 과정에서 포도가 유입된 것이죠. 서역에서 중원까지 먼 길을 달려온 포도는 귀한 대접을 받았습니다. 중국인에게 포도가 귀한 과일로 인식되자 각종 기물에서는 포도동자 도상이 활용되기 시작합니다. 포도동자 도상이 일정한 상징성을 지닌 하나의 모티프로 자리잡은 것이죠. 이무렵 포도동자 도상은 문양화되어 다양한 기물을 장식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포도동자문을 활용한 기물의 사례를 들어보겠습니다. 5세기 북위의 수도였던 대동시에서 출토된 <금동포도동자문고족배>입니다. 명칭은 꽤나 복잡하지만, 금으로 도금한 받침이 큰 술잔 정도로 보시면 됩니다. 이 잔의 표면에는 포도동자문이 새겨져 있습니다. 당시 중국과 서역 간의 문화 교류를 살필 수 있죠. 포도동자문은 이 술잔 외에도 각종 기물이나 사찰의 장식으로 널리 활용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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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동포도동자문고족배>, 5세기 북위,


하지만 당나라 태종 이후 중국에서는 포도의 가치가 줄어듭니다. 토착화에 성공하여 흔해졌기 때문이죠. 포도의 가치가 떨어지자 포도동자문 역시 의미가 퇴색되며 쓰임이 줄게됩니다.


그래도 문화적 관성 때문인지 도자기에서는 포도동자문이 계속 활용되었습니다. 북송~금대 운영된 요주요에서 발견된 <청유각화영희포도문병>이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참고로 중국의 포도동자문양은 다산과 다복을 기원하는 의미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포도의 특성상 씨앗을 품은 열매가 많이 달리기 때문이죠. 풍성한 열매가 달리는 포도처럼 자손을 많이낳고, 집안도 번창하라는 염원이 담긴 것입니다. 동자 역시 사내아이를 많이 낳으라는 의미로 볼 수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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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유각화영희포도문병>, 12~13세기(북송~금 시기), 중국 요주요 출토



한국의 포도와 포도동자문

중국과 밀접한 교류를 해온 우리도 일찌감치 포도를 접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옆나라 일본도 8세기 초에 포도 관련 기록이 발견되고 있습니다. 일본보다 서쪽에 있는 한반도에는 보다 일찍 들어왔다고 여겨집니다. 박세욱 선생님의 논문 「우리나라 포도와 포도주 전래에 관한 小考」는 이미 삼국시대 포도가 전래된 것으로 기술하고 있어 참고할 수 있습니다.


이 시기의 유물 가운데 포도 모티프가 활용되는 사례는 백제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왕의 관 꾸미개입니다. 중앙을 자세히 보시면 포도송이로 추정되는 장식을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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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 꾸미개>, 백제 6세기, 공주 무령왕릉 출토, 국립공주박물관, 국보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한 <포도넝쿨무늬 암막새>는 건물에 올리는 암키와입니다. 포도 문양이 새겨져 있는데, 그 모습이 포도라기 보다는 마치 뱀딸기에 가깝습니다. 상당히 도식화된 모습이죠. 하지만 박물관 측의 설명에 따르면 포도송이라고 합니다.

PS01001001_chu000_2021_0205150307277_chu000776-000-70000.jpg <포도넝쿨무늬 암막새>, 통일신라, 국립중앙박물관(정내 776)


포도 문양은 고려로 계승되는데요. 이 시대의 대표 미술인 청자를 장식하는데 쓰였습니다. 서두에 소개한 청자 주자가 대표적인 사례죠. 특히 해당 주자는 동안료를 활용하여 포도송이를 붉게 강조하였습니다. 기술적인 어려움 때문에 붉은색이 깔끔하게 입혀지진 않았지만, 정성을 다해 만든 고급 청자라는걸 한눈에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전 시대의 포도 문양과 다른 점은, 넝쿨 사이로 뛰노는 동자들이 배치된 것입니다. 드디어 이 땅에 포도동자문이 등장한 것이죠. 고려의 포도동자문 역시 앞서 보셨던 중국 요주요 출토 도자기처럼, 다산과 다복을 기원하는 의미로 추정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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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자 상감동화포도동자문 조롱박 모양 주자>, 고려 13세기, 국립중앙박물관


이 작품 말고도 포도동자문 청자는 여러점 존재합니다. 중국에서는 포도가 흔했지만, 고려에서는 여전히 귀한 과일이었습니다. 왕실과 고위 귀족들은 더러 포도주를 즐기기도 했다고 전합니다. 그렇다면 이런 주자에 포도주를 담아 마셨을 가능성도 있는 셈이지요. 청자가 왕실과 귀족들의 전유물이라는 점을 생각해보면, 포도동자문이 새겨진 청자의 위상도 어느정도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청자 상감 포도 동자무늬 주자_PS0100100100900123400000_0.jpg
청자철화포도동자무늬매병_PS0100100102400014000000_0.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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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도동자문양으로 장식된 각종 청자들.

당시 포도가 얼마나 귀했는가는 문헌으로 확인됩니다. 『고려사』와 『고려사절요』에 따르면 1285년부터 1308년까지 원(元) 황제가 충렬왕에게 여러차례 포도주를 하사한 기록이 남아있습니다. 포도주는 대륙을 다스리던 황제가 고려 왕에게 하사할만큼 귀중한 물산이었던 것이죠.


그리고 이시기를 살았던 고려의 문인 중에 안축(安軸)[1282~1348] 이라는 인물이 있습니다. 그의 문집인 『근재집』에 실려있는 시 한수를 통해 당시 포도주의 위상을 엿볼 수 있습니다.




화주 은자가 포도주를 가지고 와서 나에게 권하다〔葡萄酒和州隱者持以勸余〕


값비싼 한 말의 술은 아첨하기에 좋아 / 斗酒千金足市恩
옛사람들은 귀인의 집안에 바쳤지 / 古人曾獻貴人門
어리석고 졸렬한 산옹은 기교가 없어 / 山翁癡拙無機巧
헛되이 포도주 마시며 시골에서 늙어가네 / 虛食涼州老一村





안축은 1330년 5월 강릉도(江陵道) 존무사(存撫使)**로 임명되어 이듬해 9월까지 재직하는데요. 이때 화주(和州, 함경남도 영흥군)에 살던 어떤 이가 안축을 찾아와 포도주를 바친 모양입니다. 포도주를 바친 의도가 단순한 선물인지, 뇌물이었는지는 알 길이 없습니다. 다만 안축은 귀한 포도주를 권세가 대신 자신에게 바친 이를 어리석은 산옹(山翁, 산 노인)으로 묘사하였네요. 당시 포도주가 귀하게 여겨졌음을 짐작케하는 시 한 수입니다.


**존무사 : 고려후기 강릉도와 평양도에서 백성들을 위로하고 수령을 감찰하던 지방관직


이렇듯 포도는 고려에서 귀한 과일로 인식되었습니다. 탐스러운 포도송이와 사방으로 뻗어나가는 덩굴의 모습은 풍요와 다산, 부귀를 연상시켰을 것입니다. 이러한 이미지가 득남을 기원하는 동자와 결합되며 청자의 장식 문양으로 활용되었던 것입니다.


포도동자문은 조선으로 이어졌습니다. 도자기에는 활용되지 않았지만, 여성들의 복식을 꾸미는 문양으로 쓰였습니다. 아래 사진은 단국대학교석주선기념박물관이 소장한 <청주 한씨 스란치마>입니다. 스란치마는 상류층 여성들이 예복으로 착용했던 고급 치마입니다. 스란은 무릎과 밑단을 화려하게 장식한 문양을 말하며, 금실로 수를 놓거나 금박을 붙여 만들었습니다. 조선시대 스란치마 중에는 이처럼 포도동자문으로 장식을 한 사례가 많이 남아있어 고려의 문양을 계승한걸 확인할 수 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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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 한씨 스란치마>, 16세기 전반, 단국대학교석주선기념박물관


이 스란치마의 포도동자문은 기본적인 형태가 고려청자의 그것과 유사합니다. 다만 비슷한 크기의 동자와 포도가 반복적으로 나타나죠. 마치 도장으로 찍은 것 같은데요. 그 이유는 (치마에서) 스란으로 장식하는 부분의 면적이 제한되기 때문은 아닐까요? 개인적인 추측입니다.


이번 글에서는 고려청자를 장식한 포도동자문양에 관하여 간략하게나마 살펴보았습니다. 비록 이 청자를 전시한 박물관의 기획의도와 다른 방향이었지만, 나름대로 재밌는 정보를 알게된 의미있는 시간이었습니다. 특정한 문양이 유럽에서 인도, 동아시아까지 단절되지 않은채 전파된 것도 놀랍고, 각 지역의 문화적 특성에 맞게 변화하며 뿌리내리는 모습도 신기했습니다. 매력적인 문화는 이질적인 다른 문화권에서도 충분히 살아남을 수 있다는 것을 포도동자문양이 보여준 셈입니다.



(본문과 같은 내용의 영상입니다)

https://youtu.be/Zs4Dakvfeh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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