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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또이또이 Mar 09. 2022

입산(入山)의 마음으로 책 읽기


지리산이 네게 산길을 내어줄 것 같아? 종주를 너무 우습게 본 것이겠지. 높은 산 몇 번 올랐다고 모든 산이 쉽게만 보였을까.


결혼 후 남편과 등산에 취미를 가지면서 남편 회사에 친한 동료들과 함께 주말이면 산에 오르곤 했다. 서울 근교에 있는 북한산, 수락산, 불암산, 아차산, 청계산, 검단산 등 다 똑같은 산처럼 보여도 각각 매력도 특색도 달랐다. 산세가 험하지 않아 주변을 두루 살피며 여유를 부렸던 산이 있는가 하면 식은 죽 먹기처럼 느껴지다가도 최고봉에 오를 때는 만만치 않게 격한 숨을 뱉어내야 하는 곳도 있었다.


선글라스를 끼고 스틱을 짚어가며 바디 라인을 은근히 보여주는 등산복을 차려입고 산행 입구에 섰을 때는 어떤 산이든 만만해 보인다. 몇 분 걷지도 않아 자켓은 허리춤에 걸려 있고 스틱은 질질 끌면서 위를 한번 바닥을 한번 힐긋거리며 종종걸음으로 대열의 끝에 걷고 있다. 초전 상황이야 어떻든 결국 정상을 찍고 내려와야 하는 성격이라 중간에 포기하는 것은 자신이 허락하지 않았다. 함께 가면 오래갈 수 있고 멀리 갈 수 있다는 말이 참말이다. 남편도 그렇고 동생도 그렇고 우리와 자주 산에 다녔던 선배님(?)도 서로 밀어주고 끌어주며 정상에서 어깨를 나란히 했다.


등산을 시작한 뒤 대부분의 산행에서는 늘 정상이 목표였다. 그곳에 오르기 위해 산에 들어가는 거였다. 정상을 찍고 내려오는 것이 마치 그 산을 정복한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그 어떤 산도 내게 정복 당하지 않았고 그러한 마음은 무척 경솔했다는 걸 뒤늦게 깨닫게 됐다.


남편과 나는 여름휴가의 종착지를 지리산으로 정했다. 아이들이 태어나기 전이니 우리에게 가지 못한 곳이 없었다. 노고단을 시작으로 천왕봉까지 늘 함께하던 길잡이 선배 없이 우리는 덜렁 혼자였다. 길만 따라가면 되겠지 생각했던 이 계획은 나중에 생각해 보니 터무니없었다는 걸 알았다. 열사병에 약한 내가 키가 큰 나무가 없어 그늘도 희박한 곳에서 산행을 감행 것도 문제였지만 '산이 다 그렇지 뭐' 대충 알아보고 만만하게 생각한 것이 결국 3분의 1도 못 가서 하산하게 된 가장 큰 원인이었다. 남편도 나도 지리산은 그저 웃고 마는 산이 되었다. 느리게 걷는 것 같지만 꾸준히 발걸음을 옮겨 놓는 이들이 있다. 호흡을 일정하게 지리한 능성을 계속해서 재촉하며 앞으로 나가는 사람들이 있다. 뒤에서 '먼저 갈게요' 하고 치고 나간다 한들 흔들리지 않고 갈 길을 가는 사람들이다. 우린 목표만 보고 산에 들어섰고 목적지 근처에 가보지도 못하고 돌아서 내려왔지만 치열했던 곳에서 살아 돌아온 것처럼 서로의 마음을 알아줬다.


겹겹이 울렁거리는 지리산 능선을 따라 세상에서 제일 감동적인 노을을 선물받았던 그때를 떠올리면 나는 겸연쩍은 미소를 지을 수밖에 없다. 만만히 봐서 미안하오. 호되게 내쳐줘서 고맙소. 이 정도 역량으로 천왕봉을 밟았다면 그 자만심이 우릴 잡아먹었을지 모를 일이다. 혼나고 기분이 좋은 건 남편도 나도 느끼는 바가 분명히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이런 노을을 볼 수 있어서 아쉽지는 않네. 좋은 경험을 했다고 생각했다.


행여 지리산에 오시려거든 언제 어느 곳이든 아무렇게나 오시기 바랍니다. 다만 등산(登山)은 말고 입산(入山)하러 오시길. 등산은 인간의 정복욕과 교만의 길이지만 입산은 자연과 한몸이 되는 상생(相生)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경쟁하듯이 지리산 종주를 하다 보면 보이는 것이라곤 앞 사람의 발뒤꿈치뿐이지요. 하지만 입산의 마음으로 계곡의 바위들을 타고 흔적도 없이 오르는 사람에게는 몸속에 이미 지리산이 들어와 있습니다. - 이원규의 <길을 지우며 길을 걷다> 중 -



산문집 같기도 하고 시집 같기도 하고 홀연히 떠난 여행지에서의 느낌을 담은 여행 에세이 같기도 한 이 책, <길을 지우며 길을 걷다>는 매우 순조롭게 손에 들어왔다. 글쓰기니 공부니 예술이니 가끔은 알 수 없는 고전집까지. 최근 내가 읽으려 펼치는 책들은 그야말로 공부였다. 어려워도 꾹 참고 읽는다. 어려운 내용의 글은 낭독을 하며 씹어 먹는다. 소화되지 않고 생으로 내 몸을 통과해 달아나고 나면 헛헛하고 읽는 과정에 쓰인 시간이 아깝다 느낄 때도 있다. 그래도 읽었다. 예전 같았으면 첫 페이지의 느낌만으로도 읽지 않고 덮었었다. 하지만 아주 조금 달라진 부분이 있다면 이 책을 선택하기까지 들인 정성을 생각해서라도 완주는 하려고 하는 편이다. 최고봉에 발 도장을 찍는 이치와 닮았을 수도 있고 어쩌면 아닐 수도 있다. 앞서가는 이들의 발뒤꿈치만 보고 정상으로 향했던 나는 아주 조금 주변을 볼 줄 알게 됐으니 말이다. 정상에 연연하기 보다 과정을 통해 얻는 무언가에 골돌하는 것에 더욱 마음이 쓰인다. 독서도 등산이 아닌 입산의 마음으로 한다면 어떨까. 무언가 꼭 얻으려는 조급함만 내려 놓아도 좋을 일이다.


그렇게 맹렬하게(?) 책을 읽고 있는 중에 <길을 지우며 길을 걷다>는 가붓하게 산책을 하는 기분으로 입산을 했다 산에 뿌려지는 안개로 길을 잃기도 하고 저자의 말처럼 그곳에 잠깐 서있기도 하면서 결국 나의 손을 잡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온다. 지리산을 만만히 봤던 등산 어린이가 다시 지리산을 간다면 입구만 살짝 들어갔다 조용히 내려올 요량으로 입산하지 않을까 싶다. 올라가야 맛인가 둘레길도 걸으면서 주변 경관에 둘러싸인 지리산의 모습도 참 멋지지 않을까 싶다.





#다시지리산에가보고싶다

#지리산종주는준비가필요하다

#산은정복의대상이아니다

#오랜만에술술읽히는책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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