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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천소해 Dec 04. 2019

구역질 나는 마음의 냉정함

영화 <디태치먼트>에 대한 짧은 단상과 리뷰

*2018년 작성 글


    좋은 보호자란 그가 가진 목소리로써 타자와 자신 간의 냉정한 거리감을 좁히고 데울 줄 아는 사람일 것이다. 사실 냉정함을 느낀다는 것은 냉정함으로 인해 온도의 감각이 죽어가는 상황 속에서 사치일지도 모른다. 보통의 경우엔 이 민감한 온도를 지나치기 쉽다. 누군가의 목소리를 모르고도 일상에 불편함이 없었다면 자신은 그들에 비해 더 큰 권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영화는 카뮈의 “어느 하나에도 이러한 깊이를 느끼지 못하는” 자아가 감각하는 부조리의 인식상태를 언급하며 시작한다. 주인공 헨리는 좋은 보호자와 선생님이 되기를, 조금이나마 아이들을 정신적으로 더 풍족한 길로 인도하기를 원하는 인물이지만 동시에 역설적으로 그렇지 않기를 노력하는 인물이다. 그는 그저 ‘가르친다’는 것에 위안을 얻으며 자신의 깊은 상처를 치료하고 발전적으로 회복하는 단계를 거치기를 회피한다. 그래서 그는 임시교사를 맡으며 떠돌아 다니기를 반복한다. 무엇이 그를 그렇게 소심하게 만들었을까. 90분내내 스크린을 관통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일기의 존재이다. 헨리의 할아버지는 일기장을 가지고 있고 헨리는 끊임없이 할아버지가 일기를 썼는지 확인하며 기억의 파편에 접속하려고 시도한다. 그렇지만 결국 기록된 것은 할아버지가 숨을 거둘 때까지 아무것도 발견되지 않는다. 헨리의 결핍된 자아는 여기서 더욱 괴이해진다. 비록 그가 7살 때였긴 했지만 사실 그는 어머니가 자살하게 된 이유가 무엇인지 알고 있다. 어머니는 할아버지의 폭력의 대상이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할아버지라는 분리될 수 없는, 그 자체가 가지는 무게로 인해 혹은 정신적인 고립감이 주게될 혼란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헨리는 온전히 할아버지를 부정하지는 못한다. 그렇기에 계속해서 의미없이 요양원에서 죽어가고 있는 할아버지의 일기장을 뒤적거리며 유년에서부터 이어져온 자신의 결핍을 설명하고 싶어한다.

    헨리가 온전히 그를 증오하지는 못했지만 옳지 못한 보호자로부터 받았던 상처와 충격은 상당했던 듯하다. 그는 선생이라는 직업을 선택했고 언제나 그를 불안정하게 만든다. 사소한 일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자신은 성도착자가 아니라고 울부짖는 장면에서도 잠깐 할아버지의 모습이 스쳐지나가기도 한다.

    그는 자신의 잃어버린 유년과 상처받고 고립된 자아를 보상받고 싶어한 것 같다. 자신과 같은 이들이 더 이상 생겨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에 교사가 된 것도 있지만 동시에 아이들과 거리를 둔다. 그는 아이들을 가르치는 즐거움에 빠진 열정적인 동료 여교사를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고 오히려 단절감을 느끼기도 한다.

    그는 어찌보면 교사 일을 하며 자신의 결핍에 대해 반성하는 마음으로 ‘가르침’의 마약에 취해있는다. 알량한 책임감과 함께. 아이들을 적당히 거리를 두고 훈육하고 아이들과 적당히 농담하고 적당히 책을 읽어야 하는 이유까지 설파하며 가르침을 준다. 아이들에게 좋은 선생님이라고 존경받기도 한다. 헨리는 이렇게 적당히 교사 노릇을 하며 ‘임시교사’라는 위치로 이러한 냉정한 태도를 정당화시킨다. 그는 더이상 다가가지 않는다.

  

  

    

    그러던 중 그는 에리카라는 길거리에서 성매매를 하는 소녀를 만나게 되고 우연히 그에게 친절을 베풀게 되면서 그와 자신의 집에서 같이 살게 된다. 그렇지만 그는 에리카에게 건넨 자그마한 마음의 태도를 조금 더 적극적으로 변화시키지 못하고 결국 그에게 부여된 책임을 회피하고 만다. 이러한 그의 냉정한 태도는 메레디스라는 그의 학생에게도 이어진다. 메레디스는 가정과 학교로부터 받는 끊임없는 외압-외모평가, 쓸데없는 훈계질, 자신의 예술관에 대한 그다지 고민되지 않은 관습적이고 이유없는 비난, 동급생들의 따돌림-에 고통받고 있다. 그녀는 헨리에게 도움을 요청하며 안기려고 하지만 그는 그저 ‘괜찮아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질 거야’라는 말을 하며 그녀를 받아들이려는 시도를 하지 않으며 밀어낸다. 평소 수업시간에 그녀에게 ‘좋은 보호자’라는 이미지를 보여왔던 헨리의 그간 행동이 그저 자신의 심리적 안정감을 위한 역겹고도 냉정한 태도였음이 여실히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이는 후반부에 결국 메레디스의 자살로 이어진다. 그는 할아버지, 가정의 부조리함, 사회의 부조리함을 넘어 ‘자기 자신’의 부조리함을 깨닫게 된다. 그가 취해왔던 알량한 거리두기, 냉정함에 대한 반성은 이 영화의 흐름을 주관하는 커다란 주제이다. 영화는 소설 <어셔 가의 몰락>의 문장을 언급하며 끝나는데 그 문장을 이 태도를 ‘구역질나는 마음의 냉정함’이라고 명명한다.

    이 영화를 볼 때마다 헨리의 태도가 나와 너무나도 닮아 있어서 서늘한 부끄러움과 함께 물밀듯이 덮쳐오는 고통에 빠지고 만다. 언제나 새로운 것들에 대한 용기를 보여주지 못했다. 천천히 일기를 곱씹으면서 ‘옳다, 명확히 옳지는 않아도 적어도 내가 제시할 수 있는 최선의 방향성이다’라고 생각했던 것들. 그에 반대되는 상황에 난 언제나 매몰되고 또 매몰되어 왔다. 헨리처럼 어린 시절의 결핍에서 시작되어 말해지지 않는 것들, 위태로운 삶의 경계에 대해 증언하는 일에 목숨걸기로 생각했던 것들. 다 잊어버리고 어느새 점점 사유하기를 멈췄던 것 같다. 눈 오는 날, 경사 큰 언덕의 빙판에 미끄러지듯이 미끄러지는 상황을 인지하면서도 생각을 거부하고 스스로를 관습적인 인간으로 만들고 있었던 것 같다. 그렇기에 다시금 내가 오랫동안 품고 있던 이것, 구역질나는 마음의 냉정함을 생각하고 곱씹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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