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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사람과 나

장소를 압도하는 그들 - 그 후

by 무비 에세이스트 J

예전에 잘 나갔던 배우나 가수 혹은 몇 년 전 화재가 되었던 사람이나 가게가 요즘엔 어떤지를 보여주는 다큐식 방송들을 가끔 보게 된다. 내가 내 시간을 이런 방송들에 굳이 소모하는 이유를 생각해 보면, 한 시기에서 멈추어 있는 그들의 이야기가 마치 어정쩡하게 열린 결말로 끝나버린 영화 같던 차에 오랜만에 찾아온 속편 같은 기분을 들게 하기 때문인 것 같다. 물론 속편 역시 최종작이 아닐 수도 있긴 하다. 브리짓 존스의 일기가 마침내 종지부를 찍기까지 25년 정도 걸린 걸 보면 말이다. (르네 젤위거에게 감정은 없지만 더 이상의 브리짓 존스 시리즈는 제발 나오지 않길 바란다. )


이것은 지난겨울 허전한 마음을 품고 늘 같은 곳을 다니는 나에게 미약하나마 생의 에너지를 느끼게 해 주었던 그들의 후속 이야기다.


여전히 같은 길을 다닌다. 직장에서 작업실로 그리고 집으로 향하는 길이 일정하기 때문에 부러 돌아가려는 마음이 없는 한 그 길을 택하기 때문이다. 나는 그 길과 매일 들르는 마트에서 세 명의 사람을 만났더랬다.


모퉁이 청년을 기억하는가? 160이 조금 넘을 것 같은 작은 키에 통통한 체격, 안경을 낀 곱슬머리에 늘 같은 슬리퍼를 신고 나와 한 손에는 핸드폰을 다른 손으로는 담배를 피우던 그. 처음 그를 본 계절이 겨울이어서 그랬었는지 낯빛도 유난히 어두워 보였던 그를 당시 나는 내심 걱정했었다. 거의 매일 그런 모습을 보았던 데다가 그가 나온 집이라는 것이 모퉁이에 위치한 작은 원룸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던 차에 나는 우연히도 그의 정체라면 정체를 알게 되었다. 심지어 이름까지 말이다.


지난 2월에 난 백만 년 만에 헬스장에 가서 PT를 신청했었다. 에너지도 없고 많이 먹는데도 비실대는 나에게 삶의 전환을 만들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 운동 같았기 때문이다. 네이버에서 여러 헬스장을 알아본 후 멀지 않고 가격도 가장 저렴한 곳을 발견한 나는 그곳에 가서 큰 마음을 먹고 PT를 등록했다. 나를 맡게 된 트레이너는 20대 후반에 밝은 에너지를 가진 청년이었다 (그에 대한 이야기는 다음 글에서 전하게 될 것 같다). 아무튼 내가 헬스장 이야기를 하게 된 것은 모퉁이 청년이 바로 그곳에서 전혀 어울리지 않는 모습으로 러닝머신 위에서 걷고 있는 것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청년을 발견한 나는 정말 눈이 휘둥그레질 정도로 간만에 즐거운 충격을 받았다. 어려운 형편에 우울해 보이는 젊은 베르테르 같던 그가 이곳에서 유니폼을 입고 운동을 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런데 놀라움은 이제 시작이었다. 심지어 청년은 나와 같은 트레이너에게 PT마저 받고 있었던 것이다(지금도!). 와!! 정말 이 말이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그를 발견한 나는 트레이너에게 내가 그 모퉁이 청년을 알고 있다고 말하며 어떤 사람이냐고 물었다. 내가 그에 대해 들어도 아무 문제가 될 것이 없음이 분명하자 트레이너는 나에게 약간의 정보를 알려주었다. 나이는 자신과 동갑이고, 이곳에 온 것은 알코올 중독에 시달리다 그것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려고 온 것이다, 그는 가난하고 어려운 청년이 아니라 서울대를 나와서 많은 월급을 받는 직장에 다니고 있고 내년에 결혼을 할 것 같다 등등. 와!! 이번에도 이 말이 입 밖으로 나오고 말았다. 차가운 겨울 그를 모퉁이에서 매일 지나치며 나 혼자 가졌던 생각이 말 그대로 백 퍼센트 허구로만 꽉 찬 소설이었음이 드러나자 실없는 웃음마저 새어 나왔다. 그렇다. 그는 그런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래도 그에 대한 진실은 내 마음을 가볍게 해 주었다. 걱정할 상태가 아니었다니 얼마나 다행인가 싶었다. 그에 대한 진실을 알아버려서였을까? 요즘 들어 가끔만 보게 되는 그는 왠지 살짝 거만한 표정에 거들먹거리며 걷는 것만 같기 때문이다. 이번에는 여름이라 이런 것이겠지?


마트 청년은 여름이 오기 전에 그만두었다. 매일 가도 그를 발견할 수 없게 되자 마트는 다시 그저 마트가 되고 말았다. 마트 청년은 또 어디서 무엇을 하는 걸까? 잘 지내기를 바라지만 마트에서 한번 더 보게 된다면 무척 반가울 것 같다.


슈퍼마켓의 주인이자 건물주의 아들인 예의 그분은 아무런 변화 없이 아주 잘 계신다. 다만 그 역시 수줍음만을 미덕으로 삼고 있지는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제 나에게 이들은 한때의 사람들이 되고 말았지만, 지난겨울 그들은 똑같은 방향으로만 짜인 니트 같던 내 일상에 유일하게 방향이 다른 한 줄의 무늬 같았다. 이것으로 족하다. 이것이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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