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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치명 Mar 26. 2021

성스럽지 못한

 나는 거절을 잘 못하는 성격이다. 좋은 게 좋은 거라는, 결국 나를 괴롭히는 사고방식에 오래 갇혀 있었다.


 대학생이 된 친구들이 나한테 리포트 쓰기를 부탁하기 시작했다. 함께 보낸 청소년 시기 내내 글을 썼고 문예창작을 전공해서 리포트 쓰기가 나에게는 쉬운 작업이라고 여겼던 것 같다.


 , 소설 감상문부터 인터뷰 정리 등 리포트 종류도 다양했다. 나는 어마어마하게 스트레스를 받았지만 내 입에서 자동으로 튀어 나가는 응, 이 문제였다. 그러다 지쳐서 친구들한테 이야기했다. "글쓰기 부탁받으면 너무 힘들어." 친구들이 내 의도를 파악하고 더 이상 나를 괴롭히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은 나의 착각이었다. "나는 처음 부탁하는 거잖아.", "나랑 너는 특별한 사이잖아." 그래, 거절을 못하는 내 탓이 가장 크지, 너희들은 그저 적당히 썩을 X 이고.


 대학을 앞두고 취업을 준비할 때는 더 했다. 나는 친구들의 자기소개서 늪에 빠졌다. 승무원과 무역 회사, 기타 등등 잘 알지도 못하는 세계에 들어가고 싶어 안달난 척 연기를 해야 됐다. 친구들의 꿈을 대신 꾼 것이다.


 어느 날 엄마가 오빠 자기소개서를 써주라고 했다. 초고는 줘야 한다고 했을 뿐인데 나에게 돌아온 것은 엄마 잔소리였다. "그냥 한번 써줘." 아니, 자소설도 뭘 알아야 써주지.


 내가 더 기가 막혔던 것은 나와 가장 친한 친구 S의 부탁이었다. "내 사촌 동생이 학교 숙제로 시를 내야하는데 네가 쓴 시 아무거나 주면 안 될까?" 나는 S의 부탁 쯤은 들어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우리의 깊은 관계는 이것으로 증명될테니까. 나는 응, 이라고 대답했다. S의 사촌동생은 내가 쓴 시로 상을 받았고 학교 대표로 시 교육청 주최 백일장에 참가했다.


 나의 문제적 응,  부작용은 상상 이상이었다. Y는 내가 아웃렛에서 큰맘 먹고 산 머플러를 탐냈다. "나 이거 줘. 너 원래 잘 주잖아. 그런데  나는 왜 안 줘?" 나는 결국 머플러를 빼앗겼다. 무조건적인 응, 은 미덕이 아니었다. 적어도 나에게만은. 종종 경제적 손실도 끼쳤기 때문이다.


 퇴근 후 팀장 집으로 호출을 당하기도 하고, 퇴근 후 원장의 복잡한 연애사를 꽤 오랜 시간 들어주기도 했

다. 물론 친절한 표정과 말투는 필수. 나는 집에 돌아 오면내 머리를 쥐어 뜯었다.  "지금 못 간다고, 지금 통화를 할 수 없다고 왜 말을 못하니, 등신아!" 남자친구의 무리한 요구도 결국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지금은 싫어.","그럼 나중에 꼭 해줘야 돼.","응. 응?", "약속 지켜!" 나는 나를 학대하는 일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기어이 당하고야 말았다.  망할 응, 때문에.


  나는 유치원에 다닐 때 집에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았다. 울면 잠이 오겠지? 자고 일어나면 엄마가 와 있을 거고. 나는 억지로 울다가 지쳐 잠이 들었다. 일을 마치고 돌아온 엄마가 나를 꼭 안아주곤 했다. "우리 아가 혼자서도 잘 있네." 나는 그때부터 착한 딸이 되기 위해 안 괜찮아도 괜찮은 척 하는 나쁜 습관이 생겼다. 나의 이 신경증적인 응,  착한 사람 콤플렉스로부터 발현된 것이 아닐까.


 나이가 들다보니 확신할 거절이 상대방에 대한 예의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아니, 혹은 싫어, 라고 대답하기 위해 노력 중이다. 나와 상대방의 입장을 바꾸어 보면 간단하게 해결됐다. 내가 똑같은 부탁을 상대방에게 하면 과연 들어줄까? 아, 니, 오! 그럼 상대방의 진심이 어느 정도는 보이더라. 물론 쉽지는 않지만 차츰 나아지겠지. 내가 응, 으로 인해 병이 드는 것보다는 가끔은 매정한 사람이로 비춰지는 것이 훨씬 괜찮으니.


  응과 아니오 사이를 헤맬 때 데카르트가 학문 수양을 히기 위해 네덜란드를 선택했던 이유를 되새겨야겠다. 남보다 내가 우선이다. 나에게 관심을 쏟자, 나의 욕망에 정직해지자. 그래서 나는 거절한다. 고로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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