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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 직장인의 2024년의 사진일기

by 조이

도쿄에서 일하는 5년차 직장인입니다. 2024년 저에게 의미있었던 순간을 월별로 모았습니다.


2024년 1월 - 교토

장소: 교토 오하라 호센인


교토는 제게 조금 특별한 도시입니다. 난생처음으로 해외에서 교환학생으로 장기간 살아 보는 경험을 이곳 교토에서 했어요. 이때의 기억으로 저는 한국 밖에서도 살아갈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었고, 2년 후, 이번에는 해외 취업에 성공해 다시 한번 일본행 비행기를 타게 됩니다.


하지만 여행과 유학과 취업은 정말 달랐어요. 회사 생활이 정확히 3년이 되던 때, 마음의 병을 얻고 수개월 간 휴직을 했어요. 쉬는 동안 뭘 해야 할지도 모르니, 그냥 권태로웠던 마음에 무작정 교토에 다시 가 봤어요. 교토로 향하는 기차와 일주일간의 호텔만 예약하고, 언제 돌아올지 정하지 않았습니다. 저를 일본에 오게 해 준 곳에 다시 간다면 뭔가 힌트를 얻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이왕 교토에 간 것, 새로운 곳에 가보고 싶었어요. 언젠가 치앙마이에서 만난 여행자 언니가 말한 ‘오하라’가 떠올랐습니다. 교토에서 북쪽으로 버스를 한 시간 타고 굽이굽이 산길을 들어가야 갈 수 있는 곳. 반나절 할애할 시간이 충분하다면서 말이죠.


아침 일찍 도착한 오하라는 그야말로 절경이었습니다. 오랜 역사를 지닌 절인 ‘호센인’에 바로 입장했습니다. 벽 두 쪽이 모두 통창으로 되어 있고, 창밖으로는 700년이 훌쩍 넘은 고목이 반겨줍니다. 겨울이라 앙상함만 가득하리라 생각했는데, 웬걸. 그 웅장한 뿌리에 든든함까지 느껴졌습니다. 옆에는 한국에서 오신 단체 관광객들이 계십니다. 가이드님의 공짜 해설을 같이 귀동냥하여 들었어요. 여행 중 생각지도 못한 행운이었습니다. 교토는 이 나무처럼 저에게 언제 가도 편안함을 주는 장소였습니다. 교토에서 얻은 평화로움은 다시 도쿄에서의 새로운 결단으로 이어졌습니다. 교토는 이 고목처럼 그 자리에 머무르면서 언제 가도 편안함을 주는 장소였어요. 이 편안함은 제게 새로운 결단을 내릴 용기를 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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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3월

장소: 도쿄를 가로지로는 스미다강 근처의 우리 집


교토 여행으로 힘을 얻고 돌아온 저는 드디어 혼자 살기를 결심합니다. 그동안은 회사 기숙사, 쉐어 하우스 등 타인과 저의 생활을 교류했었어요. 4월 복직을 결심하고 일본 생활을 조금 더 편안하게 하고 싶어 내린 결정이었어요. 당시 저는 아침 출근길 꽉 찬 전철만 타면 속이 울렁거리는 증상이 있었어요. 그래서 회사와 조금 더 가깝고 환승이 편리한 ‘분쿄구’ 지역에서 집을 찾습니다.


제 조건은 신축, 7평, 2층 이상, 가장 가까운 역에서 도보 10분 이내, 월세 120만 원 이하. 그다지 까다로운 조건은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그 시기 분쿄구에 나온 집 데이터베이스를 최신 순서대로 다 봐도 마음에 드는 곳이 없었어요. 어떤 집은 4차선 도로 앞이라 소음이 걱정되었고, 완벽하다고 생각한 집을 찾아갔는데 베란다 밖으로 공동 묘지가 보여서 도저히 참을 수 없다 든지. 양지바른 곳에 묘지를 지으니 오히려 그 근처가 자연 재해 피해가 없고 입지가 좋은 곳이라고 하던데, 저는 익숙하지 않더라고요.


집 찾기가 어느새 한 달이 넘어가고 이 넓은 곳에 제가 살 집은 없다며 자책하던 나날. 그러다가 부동산 담당자님이 ‘스미다구’ 지역의 한 집을 추천해 주십니다. 저만 믿고 일단 집 보러 가보시라며. 다슬님에게 딱 어울리는 동네여서 희망 지역이 아닌 것 알지만서도 추천한다며. 날을 잡고 혼자 집을 보러 다녀왔어요. 역에서 내리니 큰 공원이 있네요. 연못까지 있고 입장료도 무료라 산책하기 딱 좋았습니다. 집 근처 1분 거리에는 레코드판으로 노래를 틀어주는 맛있는 커피 스탠드가 있어요. 이곳에서 라떼를 마시며 누구의 노래인지 모를 재즈를 듣고 있으니, 제 머리가 아니라 몸이 이곳이 정답이라고 하는 것 같았어요. 그렇게 이 집은 2년간 제 집이 되었습니다. 이 곳에서 벌써 하나둘 많은 추억을 쌓았습니다. 참, 아까 이야기 한 커피 스탠드는 친구들이 놀러 오면 꼭 데려가는 우리 집 필수 코스가 되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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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6월

장소: 도쿄 Kanda Square


저는 공유 오피스 회사에서 B2B 세일즈 직무로 일하고 있습니다. 제가 담당하는 거점에 새로 들어오시는 신규 고객 유치, 기존 고객의 계약 갱신, 확장, 세일즈 전략도 짜고 있습니다. 복직 후 맡은 거점은 ‘칸다 스퀘어’라는 빌딩에 있는, 도쿄의 서브 오피스 지역입니다. 이 거점을 맡으면서 걱정이 앞섰어요. 플로어 전체를, 그것도 4개 층이나 임대해서 쓸 정도로 큰 규모인 데다가 입주사도 200여 곳이나 될 정도로 많았거든요. 또한 2인실의 작은 구획부터 100인실이 넘어가는 구획까지. 담당해야 할 구획의 규모가 다양해서 타겟을 정하기 어려웠어요.


이 밖에도 13개의 거점을 동시에 담당했습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많이 머물렀던 곳이 이곳, 칸다 스퀘어였어요.

저희 오피스에는 오피스 입주사 간의 커뮤니티 형성을 서포트하는 ‘커뮤니티 팀’이 있습니다. 이 동료들이 저의 오아시스였어요. 보내야 할 제안서가 밀려서 정시 이후까지 맥주 한 잔 들고 (우리 회사에서는 16시부터 맥주가 무제한으로 제공된답니다!) 라운지에 앉아 작업하고 있으면, 백룸에서 어울리는 안주를 찾아와 아무 말 없이 갖다주는 M. 두 배 사이즈로 확장 이전하는 기업의 입주 온보딩 프로세스를 함께 짜 주었던 S와 Y. 이들 덕분에 제 회사 생활이 조금 더 다채로워졌습니다.



2024년 9월

태국 치앙마이 The Simple Man


그런데도 8월 말, 또 한 번의 휴직을 했습니다. 이번에는 회사의 권고였어요. 과도한 업무량이 문제였지요. 이왕 쉬게 된 것, 태국 치앙마이로 떠났습니다. 태국 역시 제게 많은 추억이 있는 곳이에요. 대학생 때 세 달 정도 혼자 살았던 기억이 있어요. 뭐가 그리 좋아서 그곳을 다섯 번이나 다녀왔는지 지금의 저는 그때의 저를 온전히 이해할 수 없지만, 태국의 슬로우 라이프가 좋았던 것 같아요. 다시 다녀온 치앙마이는 5년 전과는 많이 바뀌어있었습니다. 여행 산업이 더욱더 발달하고 관광객들이 자주 찾아가는 것도 있지만, 대학생 때 느꼈던 배낭여행 느낌은 이제는 어디에도 없었습니다.


제 마음이 변해서일까요. 대학생 때는 호스텔에 머물며 세계 각국에서 온 사람들과 대화하는 것이 여행의 즐거움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번화가에서 조금 멀리 떨어진 곳이 좋았습니다. 그래야 더 많은 곳에 들릴 수 있잖아요. 하지만 이번에는 번화가 옆 평범한 호텔로 숙소를 잡았어요. 그때 좋았던 것에 지금까지도 열정이 있는 것은 아닌가 봐요. 치앙마이에는 유명한 재즈바인 ‘North Gate Jazz Co-op’이 있어요. 이 곳의 프리함을 정말 좋아했는데, 다시 가 본 노스게이트에서는 어떻게 즐겨야 할지 몰랐어요. 제 몸이 어색해하는 거 있죠?


대신 이번 치앙마이 여행에서는 바 한 군데에 꽂혀서 매일 출석 도장을 찍었습니다. ‘The Simple Man’. 뱀부 사장님이 혼자서 운영하는 라이브 바 입니다. 칵테일을 한 잔 시켰어요. 사장님이 카운터 안으로 들어와서 직접 만들어 보지 않겠냐고 하는 거예요. 처음 만들어 보는 칵테일에 신나서 계량을 하는데, 술이 너무 많이 들어갔어요. “괜찮아, 네가 마시고 싶은 만큼 넣어 마셔.” 이런 가게가 또 있을까요.


사장님의 인생 모토는 ’Simple mind, Simple life’ 입니다. 회사에 다니다가 적성에 맞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고 1층에는 바, 2층에는 호스텔을 운영하며 느지막이 일어나 밥을 먹고, 호스텔에 온 여행자들과 수다를 떨고, 저녁이 되면 바에서 손님들과 수다를 떨어요. 술 한 잔 시키고 마감까지 있어도 되고, 배가 고프면 밖에서 안주를 사와도 되고, 셔터를 내리고 집에 가고 싶을 때까지 술을 마셔도 되는 곳입니다. 그렇게 오늘 하루 내가 하고 싶은 것을 이곳에서는 다 할 수 있었어요. ‘노스게이트 재즈바’에서 예전의 설렘을 찾기 어려웠지만, 대신 ‘더 심플 맨’에서 진짜 나다운 시간을 보낼 수 있었습니다.


조이, 너는 생각이 너무 많아! 뱀부 사장님의 애정 어린 핀잔이 귓가를 스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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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1월

장소: 오키나와 ‘Halekurani’


일본에 살면서 꼭 한번 가보고 싶던 오키나와. ‘할레쿨라니’라는 리조트 호텔에서 숙박했습니다. 아주 작은 디테일까지 신경 써서 ‘고객의 망설임을 없앤다’는 호스피탈리티 정신이 모든 곳에서 느껴졌습니다. 호텔 내 식당에 저녁 예약을 하려고 프런트에 전화하니, ‘조이님, 안녕하세요! 무엇을 도와드릴까요?’라는 인사말이 들립니다. 방 번호와 예약자명을 먼저 체크한 것이지요. ‘여보세요’, 혹은 ‘프론트입니다’와 같은 기계적인 멘트가 아니어서 오히려 당황했어요.


소프트웨어뿐만 아니라 하드웨어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수영장에 갈 때 사용하도록 어매니티 백을 주는데, 여기에는 룸 카드를 꽂을 수 있는 작은 포켓이 달려있어요. 배스로브에 카드를 넣으면 돌아다니다가 빠질까 봐 당황하던 참에, 이런 섬세한 디테일이 참 감동적이었습니다. 커다란 욕조에는 머리를 기대기 좋도록 푹신한 패드가 붙어 있고, 마주치는 모든 사람마다 눈을 보고 정겹게 인사해 줍니다.


할레쿨라니의 작은 디테일들이 감동적이었던 건, 어쩌면 일상에서도 비슷한 순간들을 자주 놓치고 있기 때문일지도 몰라요. 지하철에서 누군가 문을 잡아주던 순간, 자주 가는 카페에서 직원이 제 이름을 불러주던 작은 일들이 떠오르더라고요. 이런 작은 배려들이 우리의 하루를 얼마나 따뜻하게 만드는지 새삼 깨달았어요. 이런 작은 것을 크게 느끼는 힘이 일상을 비일상으로 만들어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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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의 핸드폰 사진첩을 열어 보세요. 사진 한 장 한 장이 여러분만의 이야기를 담고 있어요. 그 속에는 잊고 지냈던 따뜻한 순간들, 감동을 준 디테일들, 그리고 앞으로 새롭게 찍힐 새로운 기억들이 모두 들어 있을 거예요. 올 한 해 좋은 것으로만 가득 채워 나가요.




[도쿄의 조각들]은 도쿄 5년차 직장인인 저의 일상을 엿볼 수 있는 주간 레터입니다. 매주 수요일 발행 후 시간 차를 두고 브런치에 업로드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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