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학 선행에 관한 단상

#1. 신입생, 2월

by 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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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법학 영재’는 아니었음을 깨닫는다. 형법 공부를 시작한 지 1주일이 흘렀다. 어떻게든 머릿속에 넣어보지만 쌓이는 것보다 흘러가는 것이 더 많다. 그렇지만, 흘러간 흔적도 언젠간 도움이 된다는 말에 애써 스스로를 다독인다. 그래, 언젠가는 필요한 자산일거야. (그치만 그게 언제일까.)


민법과 형법, 두 과목을 동시에 한다는 건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었다. 늦은 퇴사 일정으로 오롯이 공부할 시간이 부족했기에 벼락치기를 시작했다. 백 명 중 한 명 나온다는 법학 천재가 나 자신이길 바랐지만, 그것이 헛된 희망임을 깨닫는 데에는 긴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오랜 시간 숨을 나누어 공부해야 할 내용을 한 호흡에 가져갈 때 숨이 차오르는 것을 느낀다. 상상 속에선 하루에 열 개 강의도 끄떡없이 들을 수 있을 것 같았는데 말이지. 현실은 한 시간만 앉아있어도 이렇게 고역일 수가 없다. 꾸역꾸역 앉아서 일단은 시간을 보낸다.


법학전문대학원 입학 전, 선행은 선택이 아니고 필수란다. 방대한 법학을 법학전문대학원용으로 압축했다고는 하지만 그렇게 압축한 분량을 3년 안에 끝내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나보다. 짧은 시간에 모든 내용을 풍부히 이해하기는 어려우니, 수업 시간 외의 시간을 활용해서 기본적인 개념과 법리를 익혀야 한다는 것이 소위 선행필수론의 요점이다. 입학 전에 다음 학기에 배워야 할 내용을 한 번 훑고 가야 한다는 말이 괜히 밉다. 분명 합격증을 받기 전에는 간절히 바라던 법학 공부였는데, 막상 시작하니 이런저런 불만만 가득하다.


그렇지만, 어쩌면 긍정적일지도 모르겠다. 처음 써본 형법 사례형의 첫 첨삭 평가는 ‘개소리를 예쁘게 써놨네’였다. 이걸 로스쿨 들어가서 중간고사 강평으로 들었다면?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 선행이 필요하다는 말들은 사실 우매한 신입생들을 구하기 위한 고귀한 전언이었나보다. 바닥난 밑천을 쓸며 한 주를 정리한다.




#2.


'나름대로' 써보려고 노력하고 또 '어떻게든' 양은 채운 것,


어디까지 배운 것이고 어디까지 배우지 않은 것인지도 모른 채 휘갈긴 답안에, 이렇게나 관용적인 피드백을 받았다. 부진정결과적 가중범의 형량에 따른 상상적 경합설 적용 여부...라는 이해할 수 없는 말들을 한가득 머금고 한가득 뱉어낸 결과다. (물론 그것이 엄밀하게 말하면 맞는 문장이었는지는 별론으로 한다.) 첨삭자가 좋게 포장해 주셔서 그렇지, 결국엔 "너는 틀렸다"는 말을 젠틀하게 적어주셨다.


법은 사회의 다양한 갈등을 조율하고, 그에 맞는 답을 도출하는 수식이라고 생각했다. 법학을 제대로 공부하기 전에는 사안을 넣으면 깔끔한 정답이 나온다고 믿었다. 법학을 공부한 이들에게 '그럼 이런 경우엔 ~인 사람이 잘못한 거야?'라고 물었던 질문들도 그런 믿음에서 기인했을 것이다.


그럴 때마다 '나는 잘 모르겠어'라며 대답을 유보하던 이들이 떠오른다. 그들의 겸손한 모습이 사실은 응당 당연한 결론이었음을 깨닫는다. 상황에 대한 충분한 설명도 없이 답만 물어봤구나. 법을 다루는 직업은 답에 다다르는 과정도 잔뜩 고민해야 하는구나. 너무도 피상적인 생각만 했구나. 공부하면 할수록 철없이 던졌던 질문이 얼마나 바보 같았는지 깨닫는다. 바보 같은 질문에 열심히 고민해 주었던 친구들은 천사임이 분명하다.


'나름대로' 무언가를 끄적이고 '어떻게든' 정답을 고민해 본다. 이런 상황에선 이런 법리가 적용되는 것이 아닐까-하면서 멋진 변호사가 된 척을 한다. 실상은 태어나서 처음 접한 생소한 언어를 애써 소화한 척하며 뱉어두는 것인데도 말이다. 조각가인 척 멋진 조형물을 만들고 있는데, 손에 쥔 것은 어린이용 레고인 셈이다.


근데, 어린이용 레고도 생각보다 튼튼하지 않았던가. 겉보기에 맞추기는 쉬워보여도 제작하는 것은 어렵지 않은가. 어린 아이들이 만지는 작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수많은 전문가들이 모여 머리를 싸매고 고민한 끝에야 작은 레고 키트가 세상에 탄생하는 것 아니던가. 나도 법학이라는 조그마한 레고 조각을 집어본다. 어린 아이가 자신이 만난 세상을 레고로 그려내듯, 나 또한 바라보았던 세상의 이야기를 법학의 어색한 용어로 그려낸다. 전문가들이 고민해서 만들어둔 레고 조각들을 열심히 꺼내고, 낑낑대며 끼워본다. 이렇게도 끼워보고, 저렇게도 끼워본다. 그래, 이거랑 저거랑 서로 끼울 수 있는 거라는 걸 알았으면 된 거지. 시행착오 투성이의 하루 끝에 여기 있는 모두가 아는 당연한 지식을 하나 체득했더라도, 그래도 괜찮다. '나름대로' 노력하고, 또 '어떻게든' 해보았으니까. 그게 선행의 의미라면 선행이 아닐까. 텅 빈 그릇 바닥을 긁는 마음으로 선행의 의의를 발굴해 본다.